말씀: 이사야 42장 1-4절
마스크를 쓰고 지내다 보니 벌써 6월이 되었다. 불편하고 불안한 가운데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며, 그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으니, 큰 축복 받은 행복한 사람들이다.
6월은 이사야 말씀 가운데 예수님에 대하여 선포하는 말씀을 통해 평안 누리길 축복한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약 700년 전, 이사야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어떤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 알려준다.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1절)
앞으로 오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완벽한 분, 하나님의 일을 완벽하게 하실 분이라고 선포한다. 이렇게 오신 예수님을 우리가 지금 믿으면서, 그 안에서 산다는 것이 기적이다.
주변을 자꾸 경계하고 안전한지 확인하게 되는 요즘, 우리는 2700년전 이미 예언한 예수님 안에서 평안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예수님 안에 있으면 평안한가? 예수님께서 정의를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본문말씀에 3번이나 반복되는 말씀이 ‘정의’다. 이방 모든 나라에 정의를 베푸신다(1절), 진실로 정의를 시행하신다(3절), 세상에 정의를 세우신다(4절)
이사야 시대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가 살아있었을까? 세상은 뒤죽박죽 엉키고 틀어져 있었다. 강한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착취하고, 큰 제국이 작은 나라를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짓누르는 시대였다.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사1:21)
하나님이 선택한 백성들도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정의인지 몰라서가 아니라 말해봐야 변하지 않을 것 같고, 자신에게 불이익이 올 수 있으니 그냥 조용히 살거나 타협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부르신 것이다.
본문에서 예언된 예수님이 오신 2000년 전에는 달랐을까? 예수님이 누구신지 본문 말씀을 인용한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그렇지 않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마12:14)
예수님이 메시아로 오셨는데, 구약의 예언이 눈앞에 펼쳐졌는데, 자신들의 기대에 예수님이 어긋난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들의 힘과 기득권을 이용하여 예수님을 죽여서 제거해 버리려고 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의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오신 예수님은 새로운 정의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정의하면 쉽게 경제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여 억울하게 손해 보는 것이 없게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은 그 차원을 뛰어넘으셨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실로 정의를 시행할 것이며”(3절)
여기서 정의로 번역된 희브리어는 ‘미쉬파트’, 재판정에서 재판관이 판결을 내리듯이 하나님께서 판결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결이 정의며, 하나님의 판결은 생명을 살리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다. (사41:10,14, 겔33:11)
예수님이 본격적으로 백성들을 향하여 나아갈 때 선포하는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를 세우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번 자에게 다시 보게 됨을 전파하며 눌린 자에게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당시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먼 자, 눌린 자는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소외된 이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들에게 먼저 다가가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정의고, 예수님이 이 일을 위해 정의의 종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정의를 위해 소란스럽게 떠벌리지 않으시고(2절), 포기하지 않으셨다.(4절)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 이 놀라운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줄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살고 있다.
정의의 종인 예수님 안에 사는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조금이나마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정의의 종인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선악을 따지기 전에, 내편 네편 따지기 전에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모습,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않는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어야 한다.
우리는 험악한 절망의 시대에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붙들린 사람들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존귀하게 여기며 정의의 종 예수님을 닮으려는 사람들임을 잊지 말자.
이사야 42:1~4 42장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나의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신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공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로 거리에 들리게 아니하며 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4 그는 쇠하지 아니하며 낙담하지 아니하고 세상에 공의를 세우기에 이르리니 섬들이 그 교훈을 앙망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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