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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세 가지 요청
요한복음 15:4~4 유우열 목사 2009-09-20
주님의 세 가지 요청(요14:4)

 주님의 세 가지 요청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혹시 형사님이신가요?”라는 인사를 받았답니다. 요즈음에는 형사라고 해서 인상이 매섭거나 나쁘지 않아요. 형사 콜롬보에 나오는 형사처럼 상당히 코믹하고 부드러운 모습도 있어요.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 속에는 형사라고 하면 날카롭고 예리한 이미지가 있어서 그 목사님께 그렇게 인사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저는 목사입니다.” 라고 했더니 그 사람은 “아, 예, 실례했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그 목사님은 집으로 돌아와서 거울 앞에 서서 혼자말로 ‘아니, 내가 형사 같다고! 내 인상이 그렇게 날카롭고 예리하고 무섭게 생겼나? 아니, 어떻게 나에게는 예수님 닮은 모습이 없는가?’라고 말하면서 모르는 사람에게서라도 “혹시 목사님이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어야 하는데 “혹시 형사님이십니까?” 라는 질문을 받은 것 때문에 자신에게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가슴아파하며 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가 늘 바라는 희망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닮기 원하는 것입니다. 초신자에게 “혹시 권사님이세요?”하고 인사하면 얼마나 기분이 좋겠어요. 그런데 권사님에게 “오늘 교회 처음 나오셨습니까?”하고 인사하면 기분이 나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당신은 예수님처럼 생겼습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의 첫인상 속에서, 말과 행동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기 원하고 성품을 닮아가기 원하는 간절한 바람이 있습니다. ‘그분은 참 겸손하더라. 예수님 닮은 모습이 있더라. 그분은 참 온유하더라.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 줄 알더라. 예수님의 냄새가 나더라.’ 이런 삶을 살기 원하는 부분이 저와 여러분 모두에게 있는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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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님을 닮아 간다는 것은 인격적이고 성격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의 모습도 닮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통당하셨기 때문에 고통마저 닮기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욕을 먹으셨기 때문에 욕을 먹으며 일하는 모습마저도 닮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행하셨던 그 모든 것을 닮기 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중세시대에는 주님께서 가난하셨다는 것 때문에 주님을 닮으려는 노력으로 스스로 가난해지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베네딕트라는 사람은 매우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평생 동안 일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대부호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 그가 주님의 삶을 따라가다 보니 자신이 너무 부자인 것을 알았습니다. 아마 그도 겸손하고 온유했을 것입니다. 그는 주님을 닮아가는 모습에서 한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어느 날 베네딕트는 자기 재산을 전부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수도원을 만들어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닮으려고 가난한 자가 된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란시스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그도 부호의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모든 재산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닮기 위함이고 둘째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무엇일까요? 따라해 보실까요. “신앙생활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 땅에서 번영하고 형통하는 것만이 아니에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았지만 이제는 그 예수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이 가지셨던 생각과 가치를 나의 생각과 가치관으로 여겨서 그대로 살아가려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노력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랫동안 예수를 믿었음에도 주님을 닮은 구석이 없다면 형식적으로 믿은 거예요. 진심으로 주님을 닮으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지요.

 주님을 닮으려고 하는 사람은 주님의 모든 것까지 닮아야 되는 거예요. 구약의 룻기서를 보면 룻이 어머니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 누우시는 곳에 나도 눕고, 어머니 죽는 곳에서 나도 죽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시라고 말합니다. 어머니가 가는 곳에 어디든지 따라가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새벽을 깨우셔서 기도하셨어요. 그래서 우리는 새벽을 깨워서 기도하는 것 까지도 예수님을 닮아야 됩니다. 요즈음은 밤의 문화가 활개를 치는 것 같아요. 청소년들은 보통 새벽 2시까지도 잠을 안자는 것 같은데 입시 준비를 하다보니까 이런 습관이 생긴 것 같아요.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야행성이에요. 그래서 새벽을 깨운다는 것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면 이런 저런 모든 이유들을 제쳐놓고 예수님이 새벽을 깨우셨으니까 나도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얼마나 분주한 삶을 사셨는지 몰라요. 특별히 사람 대하는 일에 아주 분주했습니다. 사람대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아시지요. 세상 직업 가운데 사람대하는 일이 제일 힘든 일이에요. 예수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병든 자들, 온갖 문제 있는 자들을 만나시고 그들을 위해서 진액을 쏟아가며 기도하시는, 아주 심신이 노곤한 가운데서도 그 다음날 아침 새벽 같이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 나아가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의 모습을 보이셨어요. 그래서 우리도 새벽 기도를 해야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주님을 닮아가려고 힘쓰고 있는 성도들을 가리켜, 따라해 보실까요.  “크리스천” 크리스천이라고 합니다. 아무에게나 크리스천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아요. 사도행전 11장에 있는 말씀대로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냄새가 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렇게 주님 따라가려고, 주님 닮아가려고 애쓰는 성도들에게 주님께서는 세 가지를 요청하십니다.

1. 나를 따르라
 첫 번째 주님의 요청은, 따라해 보실까요. “나를 따르라” 많은 무리들이 주님을 따랐지만, 정작 주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고 초청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4장1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여러분!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어요. 우리 사랑하는 모든 복된 성도님들이 차별되고 수준이 다르게 주님을 따르는 자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쉽게 말하면 내 삶의 모델을 주님으로 정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젊은 청소년들의 방을 보면 상당부분 사진들이 붙여져 있습니다. 가수, 탤런트, 스포츠 선수 등의 얼굴을 벽에 붙여놓고 그들을 자기 인생의 모델로 여기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들처럼 되고 싶어 합니다. 비록 그들처럼 스타가 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그를 좋아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 인생의 모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삶의 모델로 삼고 예수님처럼 되려고 하고, 예수님처럼 되지 못한다할지라도 예수님만 보아도 행복하고 가슴이 요동치는 삶을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한 번 사는 인생의 진정한 모델로 ‘오직 예수’라는 결단이고 고백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날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는 확신은 있지만 내적으로부터 주님을 따르겠다는 강력한 동기가 생겨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경우에는 과연 내 안에 주님께서 내주하고 계신지 의문을 품어 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장5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우리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버린 자라는 거예요.

 내 안에 예수그리스도께서 계신지 안 계신지 알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에 중국을 다녀오면서 출발부터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빌 헐이라는 분이 지은 ‘온전한 제자도’ 라는 책을 계속 읽으면서 다녔어요. 저자 빌 헐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 속에서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처럼 되라고 강권하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하나님은 당신 속에서 일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순종을 독려하는 음성이 마음속에서 솟아난다면, 분명 하나님이 그 안에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확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보다 한 단계 더 깊이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님을 믿는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그 단계에서 한 단계 더 들어가서 예수님을 따르는 단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내 삶의 지휘관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훈련시키시고, 인도하시고, 가르치시는 모든 것에 복종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순종은 가장 기본의 조건이 됩니다.

 나치 독일의 총칼 앞에서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이 시대의 대표적인 순교자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순종하는 자들만이 믿는 자들이요, 믿는 자들만이 순종하는 자들이다. 믿음은 순종할 때 비로소 진짜 믿음이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든지 그 말씀 앞에 순종하는 자들만이 믿는 자들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순종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말씀하시옵소서. 제가 듣겠습니다.” 주님 앞에서 철저하게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알아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 훈련을 할 때에 이런 질문을 했었어요.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에 먼저 주님께 묻고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까, 아니면 묻는 것을 잊어버리고 행동하고 나서 주님께 묻는 경우가 많습니까? 상당수의 사람들이 먼저 행동하고 묻는 경우가 많다고 답하였습니다. 심지어는 묻지도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회개해야 됩니다. 먼저 주님께 묻고 행동해야 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깨닫고 그대로 철저하게 순종하는 거예요.

 따라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일에는 영광이 있고 면류관이 준비되어 있는 것을 믿습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주님의 복제본이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복사기에 그림을 넣고 복사를 하면 원판과 거의 같게 나옵니다. 더구나 요즘은 컬러이미지 복사기가 나와서 원판과 구별하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오만 원짜리 돈을 넣고 복사를 해서 똑같이 복사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을 실제 돈으로 사용하면 위조 범이 됩니다. 이처럼 아무리 예수님을 닮았다 할지라도 ‘내가 예수님이다.’ 라고 말한다면 위조 범이 되는 것입니다. 이단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칼라복사기로 복사를 해도 주님이 될 수는 없는 거예요. 다만 우리는 주님의 복제품은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주님을 따른다는 의미를 바로 아시고 주님을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주님을 따라가는 과정 중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두가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와서 나보다 조금 부족한 사람을 보아도 너무 업신여기지 마세요. 우리 모두는 아직 미완성으로 공사 중이기 때문이에요. 옆 사람을 보고 말해보세요. “공사 중이시군요.”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문제가 많지만 주님을 닮아가려고 노력하고 있는 공사 중인 상태입니다.

2. 나와 함께하자
 주님의 두 번째 요청은 주님과 함께 하자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나와 함께하자.” 마가복음 3장 13절로 15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주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나와 함께하지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이것은 주님과의 사귐입니다. 주님과의 사귐은 주님을 따르기로 결정한 자들의 발전된 모습입니다. 우리 복된 성도님들이 주님과 사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사귄다는 말은 참으로 행복한 말이며 중요한 일입니다. 좋은 친구를 사귀어야 됩니다. 누구를 사귀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사귀는 친구와 동류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귄다는 말은 매우 중요합니다.  친구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기도 하고, 친구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습니다. 부부가 살아가는 것도 남녀 간에 만나서 평생을 사귀는 거예요. 좋은 믿음의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평생 사귐의 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가정은 행복한 가정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사귈 줄 모르면 평생 불행해져요. 사귄다는 것은 나를 희생하는 거예요. 결혼한 부부들도 총각이 처녀를 사귈 때처럼 평생을 사귀면 행복해 집니다. 사귐은 진중해야 하고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온전히 나를 내려놓아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사귀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의 시간을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아야 되고 내 환경과 형편도 주님을 위해서 내려놓아야 돼요. 주님은 우리와 사귀시기 위해서 하늘 보좌를 버리셨어요. 그리고 성령으로 우리 안에 오셨어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으셨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사귀자고 말씀하시는데 시간이 없어서 바쁘다고 말한다면 곤란한 것이지요.

 지난 주간 중국에 있을 때 큐티를 하면서 몇 마디 단어들을 집중 묵상해 보았습니다. 예레미야서는 유다가 죄로 인해 심판받을 것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심판을 해야 하는 이유들이 적혀있는데 그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어요. 유다백성들이 이렇게 행동했다는 거예요.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신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하지 아니하니” 또 하나님께서 말씀을 전해주셔도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고 반응했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꾸준히 사귀려고 그들에게 접근하셨는데 그들은 듣지도 않겠다고 하고 사귀지도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주의 말씀을 욕으로 여기겠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유다의 멸망 원인은 하나님과의 사귐의 실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있자, 나와 사귀자’ 고 요청하십니다. 우리가 그 사귐의 자리로 가서 주님과 친밀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의 사귐의 자리로 더 나아갈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주님과 사귐의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주님과 깊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나는 너무 바빠서, 너무 피곤해서 주님과 대화할 시간이 없습니다.’ 이렇게 살아가지는 않으시는지요.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대화의 자리, 주님과 사귀는 사귐의 자리로 나오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교제의 자리를 가리켜 히브리서 4장13절에서는 ‘은혜의 보좌’라고 합니다. 때를 따라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되는 자리라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은혜의 보좌를 가리켜 시은소라고 합니다. 

 주님과 사귀는 자리는 다른 곳이 아니에요. 바로 새벽 미명에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에요. 서두에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은 바쁘시고, 힘드시고, 더 아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새벽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는 지난 주간 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에 정식으로 새벽기도 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어요. 단지 그 시간에 일어나 조용히 침대에서 큐티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리고 오늘 새벽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이런 찬양가사가 떠올랐어요. ‘내 기도하는 그 시간 내게는 가장 귀하다’ 조용한 이 자리에서 주님과 교제한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시간인지 다시금 느꼈습니다. 이번 세이레 특별새벽기도회가 하나님의 시은소,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가서 때를 따라 주시는 은혜를 입는, 주님과 친밀해지는 축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3. 내 안에 거하라
 주님의 세 번째 명령은 오늘 본문 말씀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내 안에 거하라” 주님께 순종하기로 결단한 자들은 주님과 깊은 사귐을 가져야 하고 그 다음 단계로 주님 안에 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 안에 있는지 내가 주님 안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체감을 누려야 돼요.

 여러분! 케이블카를 타 보셨나요? 다 타보셨을 것 같아요.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마치 케이블에 붙어있는 케이블카와 같습니다. 예전에는 케이블카에 대해서 별로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데 이번에 중국에 가서 자세히 보니까 케이블카는 케이블과 카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분리된 것이었습니다. 저도 케이블과 카는 고정으로 붙어 있는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타고 내리는 동안 케이블과 카는 분리되고 사람이 탄 후에 다시 연결되어서 산을 오르고 내리는 것입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케이블이 돈다고 해서 카가 저절로 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붙어있을 때, 그것도 카가 케이블에 붙어있을 때만 도는 것입니다. 어떤 바람과 흔들림, 날씨와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카가 케이블에게 붙어 있어야 오르내릴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안에 거하라’는 것은 바로 이처럼 주님에게 꼭 붙어있는 상태입니다. 케이블은 주님이고 카는 바로 나입니다. 주님은 환경과 시대와 상관없이 항상 같은 속도로 우리의 삶속에 역사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케이블을 꼭 잡으면 문제가 없지만 내가 케이블을 놓는 순간에 문제가 생깁니다.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카가 케이블에 붙어 있듯이 내가 주님에게 붙어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선 말씀하십니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주님과 일체감입니다. 손이 아픈데 머리가 안 아프다고 말 할 수 없어요. 발이 아픈데 손이 안 아프다고 말 할 수 없어요. 한 곳이 아프면 온몸이 아픈 거예요. 주님이 욕을 먹으시면 내가 욕을 먹는 거예요. 교회가 비난을 받으면 가슴이 아려야 돼요. 교회가 어려우면 나의 어려움으로 느껴야 돼요. 이것이 일체감이에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을 통해서 주님과 일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새로운 삶의 형태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고 이 세상을 떠나셨어요. 그래서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성령으로 주님과 호흡하고, 성령으로 충만해져서 주님과 일체감을 누리게 될 때에 비록 육신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만 주님과 나는 하나 되어 승리하며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과 일체감을 누리는 성도는 이런 찬양을 합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주님만 따라가리.” 할렐루야! 아무리 험악한 길이 있어도, 어떠한 삶의 짐이 있어도 주님과 일체가 되어서 주님을 따라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구원받았다는 수준에서 머물러 있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 이상 내가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주님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나의 수고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장하고 주님을 닮아 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거룩한 신앙에 도전의 목표를 세우고 앞을 향해서 나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요한복음 15:4~4
15장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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