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요한의 출생과 반응(눅1:56-66)
정서 전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감정은 그 사람의 감정으로만 있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슬퍼하면 자신은 별로 슬프지 않았는데 그 슬픈 감정이 자신에게 이입되어서 자신도 모르게 슬퍼하게 되고 또 어떤 사람이 환하게 웃으면 자신은 별로 기쁠 일이 없지만 그 사람이 웃는 것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웃게 되는 것입니다.
감정도 전염이 되지만 행동도 전염이 돼요. 다른 사람이 하품을 하면 자신도 따라하고 어른들이 아이에게 숟가락으로 밥을 떠먹일 때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의 입을 벌립니다. 이런 경우도 있어요.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옆 사람이 화장실에 간다고 하면 자신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는데 그 말을 들을 때 자기도 가고 싶어집니다. 감정도, 행동도, 정서도, 표정까지도 전염이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전염시키느냐가 중요해요. 어떤 사람은 주변사람들에게 웃음을 전염시킵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좋은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기도 해요. 상대방에게 웃음을 주고, 기쁨을 주고, 감사한 마음을 전염 시킬 수 있다면 그 사람이 바로 축복의 통로라고 믿습니다. 이 시간에 은혜 받고 다른 사람에게 좋은 감정을 전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이나 긍휼의 감정도 전염돼요. 예를 들어 어떤 모임이 있는데 결산을 해보니 돈이 조금 남았어요. 그러면 그 남은 돈을 정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옵니다. ‘오늘 거하게 먹고 끝냅시다.’ ‘아니야, 먹어봐야 뭐하겠니. 이것을 가지고 어려운 사람을 돕자.’ 이렇게 되면 한 번에 먹어 치우자라고 하는 생각이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생각으로 바뀌어 집니다. 전염이 되는 거예요.
또 이런 것도 있을 수 있어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거예요. 누군가를 만났기 때문에 믿음이 전염되는 거예요. 믿음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믿음이 성장한 거예요. 감정이 전염되는 거예요. 이것은 참 귀한 거예요. 저는 우리 믿음의 성도님들이 이런 성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이런 경우도 있어요.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믿음이 뚝 떨어졌어요. 불평이 없던 사람이 불평이 생겼어요. 누구를 비난하거나 욕하지 않던 사람이 욕을 하고 비난하게 돼요. 왜 그런가요? 그런 분위기에 전염되어서 그래요. 대여섯 사람이 모여서 누구를 욕하는 분위기가 되면 자기 혼자서 그 사람을 칭찬한다는 것이 어려울뿐더러 잘못하면 왕따 돼요. 그래서 함께 욕하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한 순간 욕을 먹을지언정 칭찬하고, 격려하게 되면 그 분위기가 반전됩니다. 이런 전염을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축복의 통로라고 믿습니다.
교회 분위기도 그렇습니다. 옆 사람들에게 은혜가 전염되고, 믿음이 전염되고, 감사가 전염되고, 행복이 전염될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입에서 원망만 나오고, 불평만 나오고, 짜증이 나오면 안돼요. 짜증도 전염이 돼요. 옆 사람이 짜증난다고 말하면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짜증이 나요.
왜 이런 말씀을 먼저 드리는가 하면 오늘 본문의 말씀이 천사 가브리엘을 통하여 이미 예언되었던 세례 요한의 출생에 대한 말씀인데 요한이 태어남으로 인해서 그의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이웃 모두에게 큰 기쁨이 전염되어 갔기 때문입니다. 세례요한 한사람 때문에 기쁨이 전염되어가더라는 거예요. 나 한 사람 때문에 믿음이 전염되어가고 기쁨과 즐거움이 이웃사람에게 전염되어 질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세례요한의 출생은 단순히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기쁨으로 한정되지 않고 요한의 출생에 대한 소식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기쁨이 되었고, 어떤 이에게는 믿음을 불어넣었고, 어떤 이에게는 두려움이 되었으며, 어떤 이에게는 놀라움이 되었습니다. 세례요한 한 아이가 태어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전체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으며, 절망 가운데 있던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공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요한은 엄청난 정서 전염을 시킨 사람입니다.
IMF 당해 온 국민이 절망가운데 빠져 있을 때 박세리 선수가 US 오픈에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맨발로 연못에 들어가 퍼팅을 하는 한 장면으로 온 국민의 감정을 상승시켜서 우리도 할 수 있다 우리도 극복할 수 있다는 감정전염을 시켰던 것처럼 세례요한의 출생은 많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로마의 포로로 잡혀있었던 저들에게 희망이 있다는 아름다운 감정을 전염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세례요한이 태어남을 통해 주변 사람에게, 더나가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염시켰던 감정 세 가지를 살펴보면서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1. 즐거움
이처럼 세례요한의 출생으로 첫 번째 전염시킨 것은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58절을 함께 읽어 보실까요.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그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즐거움이라는 감정이 전염되었어요. 저는 우리 모든 성도들이 즐거움을 전염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이 즐거움이 전염된 것은 엄밀하게 따지면 세례요한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 때문이에요.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사가랴의 가정에 요한을 주셨기 때문에 모두가 즐거움을 갖게 된 것이지요. 이처럼 우리도 이웃에게 즐거움을 전염시킬 수 있는 자가 되어야 돼요. 특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즐거움과 기쁨을 이웃에게 전염시킬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좋은 신앙이 무엇일까요? 좋은 신앙은 삶속에서 평범하게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쁨을, 즐거움을 발견해내는 것입니다. 아멘. 따라해 보십시오. “좋은 신앙은 우리의 삶속에서, 평범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즐거움을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든 사람이 공유할 수 있도록 즐거움을 전염시키는 거예요. 좋은 인격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즐거움과 행복을 남에게 전염시켜줍니다. 그래서 가정과 사회가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이 되는 거예요.
남편이 아내를 즐겁게 해 주어야 됩니다. 즐겁게 해 준다는 것은 즐거움을 전염시킨다는 거예요. 아내도 남편을 즐겁게 해 주어야 돼요. 양주동 박사가 아내는 ‘안해’라고 표현했어요. 집안에 있는 해라는 거예요.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면 아내는 남편에게 즐거움을 전염시켜주어야 돼요. 온갖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돌아온 남편에게 기쁨을 전염시켜주어야 돼요. 할렐루야! 짜증스러운 일을 만났다 할지라도 상대방에게 기쁨을 전염시킬 수 있다면 이것이 축복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바로 축복의 통로라고 말 할 수 있는 거예요. 사소한 일에도 즐거워할 줄 아는 것이 능력입니다. 무슨 큰일을 해야 꼭 능력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즐거움을 옆 사람에게 전염시켜주는 능력이 큰 능력이라고 믿습니다.
기쁨을 전염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인지 보십시오. 어떤 엄마가 아기에게 즐거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었습니다. "짝짝짝 손뼉을 치며/ 아빠가 곧 오실 거야/ 달콤한 사탕을 갖다 주실 거야/ 맛있게 먹어야 해, 사랑하는 내 딸!" 이 때 엄마의 목소리는 즐겁고, 곡조는 활기찬 빠른 알레그로입니다. 그러자 딸아이는 환한 얼굴로 기쁘게 웅얼거렸습니다. 그런데 다른 어떤 엄마는 자기 아기에게 똑같은 노래를 저음으로 즐겁지 않은 목소리로 느리게 불러줍니다. 그러자 아기는 스트레스에 가득 찬 표정으로 반응하였답니다. 이런 아이는 우울증에 걸릴 수도 있다고 합니다. 말도 못하는 아기이지만 엄마의 감정이 전염된 것이지요. 엄마가 아기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이 단순한 차이가 아이가 자라면서 주위 사물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평생에 걸친 인간관계에서 갖는 감정에 큰 차이를 낳는다고 합니다. 아이에게 즐겁게 해줄 줄 아는 것이 엄마의 능력입니다.
카네기 연구소에서 성공적인 CEO는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해서 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그 결과는 공부를 잘한 사람도 아니고, 기술이 있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공적인 CEO라고 답한 것은 모든 사람을 즐겁고 기분 좋게 일할 수 있도록 격려하고 자극할 수 있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품을 가진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성공하더라는 것입니다. 즉 긍정적인 정서전염을 잘 시킨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 놀라움
두 번째 느끼는 감정은 놀라움입니다. 감격스런 감정이 전염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이 태어나자 8일이 지나서 율법대로 할례를 행하기 위해 아마도 회당으로 갔을 것입니다. 관례상 아들의 이름은 할례를 받고 난 후 정하였습니다. 친족들은 관습과 전통에 따라 부모의 이름을 따서 사가랴로 정하려 했지만 엘리사벳은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요한이라 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들이 네 친족 중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없는데 어찌 요한이라고 하겠느냐고 실랑이가 벌어집니다. 이때 성소에 들어갔다가 아직 벙어리로 있던 남편 사가랴에게 이름을 무어라고 지을 것인가를 물으니 말은 하지 못하고 서판에 쓰기를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럼과 동시에 사가랴의 입이 풀리고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들의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모든 친족과 이웃은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볼 때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셨어. 하나님께서 도와주셨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역사하셨어.’ 이런 것들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의 심령이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나 혼자 하나님 만난 것에 감사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옆 사람에게 간증되어 질 때에 전염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면서 날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격스럽고, 새롭고, 신비한 은혜들을 날마다 경험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적이 일어나서 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날마다 놀라야 돼요.
예레미야 선지자는 예레미야 애가 3장 22절로 23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지만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기에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생명 주셔서 아침에도 눈을 뜨게 하시고 호흡하게 하시니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김재관 장로님이 기도할 때마다 제가 늘 감동을 받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생명주심에 감사합니다. 밤새 통증으로 고통당하고 신음하며 힘든 밤을 지냈지만 떠오르는 태양을 맞이할 수 있는 새로운 아침을 주심에 감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나를 도와주시고 승리하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하고 고백하며 몸은 아프지만 은혜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모습 속에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매일매일이 평범한 일상이지만 그 가운데서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감동, 하나님이 나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감동이 충만해져서 이 감정들이 옆 사람에게 전염되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제는 제 아내가 방에서 나오면서 감격스런 얼굴을 하며 나오는 것입니다. ‘목사님 오늘 큐티하면서 얼마나 은혜가 큰지 몰라요. 너무 은혜 받았어요. 감격해요.’ 라고 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저도 전염이 되어서 감사한 마음이 생겼어요. 큐티는 자꾸 나누어야 돼요. 나눈다는 것은 옆 사람에게 내가 받은 은혜를 전염시키는 거예요. 이것이 간증이에요. 이런 가운데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은혜로 살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우리 복된 교회 성도들이 이런 아름다운 감정들이 서로서로에게 전염될 수 있게 되길 축복합니다.
글에서 읽은 이야기인데 전쟁포로를 가두는 감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간수를 보면 감옥에 갇힌 대부분의 사람들이 얼굴을 찌푸리며 짜증을 내는데 어느 한 사람만 환하게 웃었어요. 웃으니까 간수가 그에게 가족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얼른 수첩에서 사랑하는 자녀와 아내의 사진을 보여주며 눈물을 흘렸어요. 간수는 그 모습을 보고 자신과 같이 그도 한 가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그와 친하게 되었어요. 후에 그 간수는 그를 은밀하고 조용하게 풀어주었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아름다운 감정들을 전염시킬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것들을 전염시켜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교회에 오면 새로운 에너지를 받아 충만해지고 감정도 좋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3. 두려움
세 번째로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의 감정입니다. 늙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고, 늙어서 무슨 아들을 낳겠느냐고 의심한 죄로 벙어리가 된 남편 사가랴가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서판에 쓰니 즉시 혀가 풀려서 말하게 되는 기적을 본 이웃들에게는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감정이 생겼습니다. 65절로 66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골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이르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까 하니 이는 주의 손이 그와 함께 하심이라” 이런 두려움이란 감정은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의 감정을 거룩이라고 합니다. 나쁜 의미로 두려움(phobia)은 공포증, 병적인 공포를 뜻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모세가 성막을 완성하고 봉헌할 때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임재 하였고 백성들은 두려워 떨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르기 전 구름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저들은 떨며 순종을 서원하였습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임재를 경험하니 두려움이란 감정이 퍼져나갑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베드로가 이 기적을 체험할 때에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하고 고백합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존 번연이 교회당의 종을 치는데 갑자기 그에게 거룩한 두려움이 엄습해 왔습니다. 자신의 죄가 생각이 나면서 높은 곳에 매달려 있는 종이 자기 머리위로 떨어져 죽을 것 만 같았습니다. 그는 겸손하게 무릎을 꿇고 두려움에 떨면서 회개하며 기도하였고 그는 천로역정이라는 제 2의 성경을 기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존 번연은 자기의 지난날을 반성하면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는 죄 많은 인간이었다. 나는 세 번이나 죽을 뻔하였다. 한번은 바다에 떨어져 익사할 뻔하였다. 두 번째는 보트가 뒤집혀 강물에 빠져 생명이 위험했다. 세 번째는 독사에 감겼으나 물리지는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경고였는데 나는 내 행동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17세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터에서 전우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절대자인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고 합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존 번연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삶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거룩한 두려움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이런 거룩한 두려움이 다른 사람에게로 전염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고, 주님 앞에 돌아오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의 믿음이 성장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세례요한의 출생으로 말미암아 주변 사람들에게 즐거움의 감정이 전염되고, 놀라움의 감정이 전염되고, 거룩한 두려움의 감정이 전염된 모습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나 한 사람이 가정에 있으므로, 직장에 있으므로 나로 말미암아 좋은 감정들이 전염되는 것이 복음 전파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예수그리스도는 오셔서 이런 것들을 전염시키셨어요. 복음을 전염시키셨어요. 사도바울을 욕할 때 ‘저는 염병 같은 사람’ 이라고 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전염시키는 자라는 거예요. 사랑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에요. 회개의 마음을 전염시키는 사람이에요. 오늘 우리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염시키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1:57~66 1장 57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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