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눅 2:28-35)
할렐루야! 오늘 2010년도 첫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옆 사람에게 인사해 보시지요. “올해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세요.” 아멘. 뉴스를 보니까 올해가 국운이 융성할 해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나라가 잘 되어야 우리도 잘 되는 것입니다. 작년에는 우리나라가 무역수출을 세계에서 9번째로 많이 했답니다. 역사 이래 특별히 일본보다 무역수지가 많았던 해라고 합니다. 아멘. 참 감사하지요.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이것이 웬 은혜이고 웬 축복입니까? 하나님께서 이 민족을 들어 써 주신 줄로 믿습니다. 6.25전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이것이 정말 우리나라의 상황인지 의심이 갈 만큼 변화되고 복을 받았습니다. 얼마 안 있으면 전 세계에 선교사를 가장 많이 보내는 선교대국으로 삼아 주실 줄로 믿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고 함께하시는 민족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축복이 넘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뿐만 아니라 올해는 영적으로도 성숙하시고 내용이 알찬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고백하는 내용이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는 나이가 많았으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붙잡고 계신 거예요. 하나님이 생명을 붙잡아 주시면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우리가 산삼, 녹용, 보약을 먹어도 하나님이 생명을 놓아버리시면 이 세상을 떠나는 거예요. 그는 성령의 지시하심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모에게 인도되어 성전에 오실 때 만나게 됨으로 성령의 지시하심이 응답으로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게된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나이가 많아서 세상 적으로는 돈을 벌수도 없고 힘도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지시하심이 자기의 삶에 성취되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서 성취되고, 성령님의 지시하심이 나에게서 성취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 신앙생활인줄로 믿습니다.
0 올해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의 신앙생활이 이런 내용으로 충만해지는 해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성령님의 지시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가운데서 명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열매가 나타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잘 받아야 됩니다.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내게 주시는 말씀이 이 말씀이구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갑니다. 하나님의 음성 듣고 갑니다. 주신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하고 고백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령의 지시하심과 말씀하심을 들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성령님께 귀를 기울여야 돼요. 구체적으로 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서 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될 것입니다.
저의 경우는 경험적으로 보면 성령의 지시하심, 감동하심을 받는 경우들은 기도할 때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할 때입니다. 어떤 분은 기도하다가 감동받고 지시를 받기도 하지만 저의 경우는 말씀을 묵상하다가 인도받고, 지시받고, 감동받습니다. 말씀을 읽으면 항상, 이것이 무슨 뜻인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가?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내게 주시는 말씀을 받을 때 그 말씀대로 순종하게 되면 그 하루하루, 그 사건사건 속에 응답이 있고 열매가 있는 것입니다. 올해는 이런 열매로 풍성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보통 교회를 평가할 때 “그 교회는 몇 명모이냐?” 라는 질문을 흔히 합니다. 숫자에 의해서 교회를 평가하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평가도 어느 정도 신빙성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뭔가 교회가 조직적이고 영향력이 있기에 모여진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많이 모인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더 나은 질문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예컨대 “그 교회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얼마나 민감한 교회입니까? 또는 그 교회는 지역사회에 어떤 좋은 영향력을 주고 있습니까?”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들에게는 이런 질문을 하기도합니다. “그분은 직분이 무엇입니까?” “그분은 신앙생활을 얼마나 하셨나요?” 저는 이런 질문이 바뀌어 졌으면 좋겠어요. “정말 이분을 성령님과 동행하는 분인가요?” “집사님은 올해도 영적으로 성숙한 삶을 살고 계십니까?” 이렇게 수준 있는 질문들이 우리 삶에 있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 집사님이 주님을 닮아 가는데 어떤 교육, 훈련을 받아서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어떤 책을 읽어서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었습니까?” 이런 내용들로 보는 관점이 바뀌어 질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시므온에게 직분, 신분, 부귀, 경력 등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시므온이 성령의 지시하심을 받고 그 지시하심을 따라서 순종했더니 그것이 그대로 그의 삶속에 이루어지는 것에 관한 궁금증과 질문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올 때 ‘저 사람은 돈이 얼마나 많을까? 저 사람의 직업은 무엇일까?’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저 분은 정말 성령님과 동행하시나? 저 분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가운데서 응답받으면서, 인도받으면서 살고 계시는가?’ 하는 질문들이 마음속에서 생겨나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질문의 수준이 실력의 수준이요 영적인 수준이에요. 교회에 나와서 날마다 육신적인 것만 바라보고 ‘사업이 잘 되나? 부자인가?’ 하는 질문으로만 가슴을 채우고 있다면 그 사람의 수준은 그 수준인거예요. 이분이 정말로 주님을 닮아가고 있는지,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지, 성령의 열매를 맺히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나도 그것을 따라가야 되겠다는 것들이 마음속에서 생겨지면 이 사람의 믿음의 수준이 성숙한 믿음의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유대인의 교육의 철학은 ‘질문을 잘하는 아이로 키운다.’는 것이라고 합니다. 질문을 잘하는 아이는 발전합니다. 또 질문한다는 것은 이미 그 분야에서 많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머릿속에 질문이 끊어지지 않을 때 그 사람은 발전하고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부모들은 어떻게 합니까? “학교에 가서 입 다물고 있어. 떠들지 마.” 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서도 신앙생활에서도 끊임없는 질문이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도 건성으로 읽으면 안 됩니다. 말씀에 대한 질문들이 늘 있어져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바로 큐티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큐티는 질문이다.” 큐티는 생명의 샘가 교재를 펴놓고 질문하는 거예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 그것을 깨닫고 나면 그 말씀을 통해서 나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질문해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네가 이렇게 살기를 원한다.’하고 주시는 응답을 내 말씀으로 붙잡고 순종하면서 매일 같이 나아가는 삶이 큐티인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올 한 해 동안 큐티하고 날마다 말씀 속에서 묵상하고 그 안에서 주시는 말씀대로 순종해서 열매가 풍성하게 맺혀지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저도 오늘 본문의 말씀을 어제 읽으면서 질문을 했어요. ‘주님! 이 말씀을 통해서 어떤 설교하기를 원하시나요? 말씀해주세요.’ 이것을 위해서 묵상하는 시간이 참 길어요. 어떤 때는 이런 질문을 하면서 반나절을 고민하기도 합니다. 마치 누에고치에서 실을 풀 때 엉켜있으면 풀기 어렵지만 한번 풀리기 시작하면 술술 풀리는 것처럼 답을 속히 찾지 못하면 고민하다가 한번 풀리기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쉽습니다. 보통 설교준비를 A4로 다섯 장 정도를 준비하는데 지난주에는 실타래는 풀듯이 풀어서 A4로 4장까지 준비했는데 어쩌다가 컴퓨터를 잘못 만져서 그것이 날아가 버렸어요. 어찌나 황당한지요. 그래도 성령님께서 주신 것이라서 다시 복구하는데 한 시간도 안 걸렸어요. 성령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하다보니까 응답을 받는 거예요.
1.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러면 오늘 본문 속에서 시므온은 예수그리스도를 누구로 보았을까요? 여러분에게 이렇게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여러분은 “뭐 그리 유치한 질문을 합니까?”라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치한 질문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상당히 까다롭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서 신앙의 수준이 결정되는 거예요. 성숙한 신앙인지 아닌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이런 시험문제를 받았다고 생각해보세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대로 쓰십시오.’ 아는 대로 기술하면 되니까 매우 쉬운 것 같지만 막상 쓰려고 하면 쉽지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 이렇게 쓰고 나면 더 이상 쓸 것이 없어요.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는 것이 많을 것 같아도 A4용지 한장을 주고 쓰라고 하면 얼마나 쓸 수 있겠습니까? 지식적으로 쓸 만한 내용이 얼마나 있습니까? 또 경험적으로 쓸 만한 내용이 얼마나 있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나의 삶이 이렇게 변화되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문제를 해결 받았습니다.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러이러한 삶의 체험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험적인 지식을 적어 볼 수는 있지만 상당히 어렵습니다. 목회자에게도 예수그리스도는 당신에게 누구십니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한 마디로도 쓸 수는 있겠지만 상당히 복잡한 거예요.
그런데 시므온이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신가에 대한 답을 적어 놓았어요. 오늘 이 자리에 여러분이 계시지만 성도님들 각자가 깨달은 예수그리스도는 다 달라요. 삶에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온 분들은 예수님은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는 분으로 깨달을 것이고, 죄의 문제를 가지고 회개하는 분들은 주님은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으로 깨달을 것이고, 어떤 분은 예수님은 나에게 사명을 주셔서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분으로 깨달을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시냐고 물을 때에 우리의 대답이 오늘 우리 신앙생활의 태도가 되는 것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보게 되는 것이고 그 사람의 신앙 수준을 볼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시므온이 아이를 보면서 하는 고백 속에서 보면 ‘아, 시므온은 예수님을 이렇게 이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어요. 28절로 29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무슨 말입니까? 시므온이 나이가 많아서 일반적으로는 세상을 떠날 나이이지만 하나님께서 계속 생명을 붙들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을 만났으니 “나를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하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고 세상을 떠나야 떠나는 것도 평안한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 보세요. 그러면 떠나는 것이 평안이 아니에요. 그때부터 고행길이요 지옥 가는 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고 떠나는 길은 행복한 길이요 천군 천사와 동행하는 길이요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길 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평안히 놓아주시는 거예요. 예수 믿고 세상을 떠난 분은 평안한 거예요.
3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예수님을 보면서 구원을 보았다는 거예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자이십니다. 또 3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즉 시므온이 깨달은 예수님은 나만을 위한 예수그리스도가 아니라 만민의 구원자이시라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지만 만민을 위한 구주시라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모든 사람들이 다 믿고 구원 받아야할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거예요. 3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방은 불신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영혼들을 말하는 거예요. 이들을 비추어주는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시므온은 어린 예수님을 만나면서 만민을 위해서 예비하신 것이고 이방인을 비추는 빛으로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을 이해한 거예요.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혹자는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조차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예수님을 아직 만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의 모든 죄와 저주에서 나를 해방시켜주시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그 진정한 구원자로서의 예수님을 만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지만 교회 안에도 구원 받을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는 나오지만 예수님을 나의 삶의 구주로 모시지 않은 사람도 있어요. 그렇다면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예수님!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십니다. 내 안에 오셔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그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가도록 노력하여서 예수님을 믿는 지혜와 지식의 폭이 점점 커지고 넓어져서 성경 말씀대로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장성한 분량이 커져 갈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목사라고 해서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에요. 저도 끊임없이 예수님을 알아가고 또 알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님들도 계속해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나의 예수, 나를 구원하시는 분, 나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 나를 축복하시는 분으로만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시므온처럼 나를 위한 예수님 정도가 아니라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타인을 위한 예수님, 만민을 위한 예수님, 이방 사람들을 위한 예수님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만약 사도바울이 나를 구원하는 예수로만 알았다면 그가 고향을 떠나서 아시아와 유럽을 다니면서, 돌에 맞고 채찍에 맞으면서, 강을 건너면서, 배가 파선하는 위험을 당하면서, 온갖 조롱을 받으면서 세계복음화를 위해서 수고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나만의 예수라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깨달은 예수는 만민을 위한 예수,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한 자들의 예수인줄로 믿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의 좋은 형편을 버려두고 이방을 향해서,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서 나간 거예요. 오늘 본문 34절 말씀에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복음 전하면서 칭찬을 받습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환영을 받습니까? 아닙니다. 비방을 받고 욕을 당하고 내어쫓김을 당합니다. 그러나 깨달았기에 이웃을 향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삶이 된 줄로 믿습니다.
103세를 살다 소천하신 유화례 선교사 이야기를 잠깐 하려고 합니다. 1927년 전남 광주로 온 플로렌스 엘리사벹 룻(Florence E. Root), 유화례 선교사는 매사추세스 스미스 칼리지를 졸업했습니다. 당시 하버드와 비교되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그녀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나라에서도 평탄하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콜레라가 창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마저 보장할 수 없는 조선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처녀사역을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51년 동안 복음을 전하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103세를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살아있는 날 동안에 오직 조선 땅, 대한민국이 복음화 되고 부흥되기를 위해서 기도하셨다고 합니다. 그녀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민의 예수, 이방인의 예수로 이해하지 않았다면 조선 땅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요? 그녀가 깨달은 예수그리스도는 만민의 예수, 아직도 복음을 깨닫지 못해서 죄로 인해서 신음하고 죽으면서도 왜 죽는지를 모르는 불쌍한 영혼들을 위한, 이방을 향한 빛으로서 예수님을 깨달았기 때문에 이 복음을 전한 줄로 믿습니다.
또 한 사람, 수피아 여고에서 사역했던 유진벨 선교사는 조선에 온 후 첫 부인을 전염병으로 잃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결혼했지만 제암리 교회 순교사건에 대해 조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병점에서 자신이 몰던 자동차가 기차와 충돌하면서 두 번째 부인마저 잃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도 그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사역하다가 자신의 몸은 선교사 묘원인 양림촌의 언덕 양지 바른 곳에 뉘었다고 합니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나라가 복을 받은 나라가 되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만 알았다면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이들은 예수님은 만민의 구원자요, 이방의 빛으로 알았기에 이처럼 선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이 땅의 수많은 선교사들도 예수님을 이처럼 알았기에 가난 가운데서도, 비난을 받는 가운데서도 외국에 나가서 일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고 있는 1.1.1 전도 운동은 나 아닌 타인에 대한 구원에 관심을 갖는 전도운동입니다. 내가 구원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1.1.1 전도운동은 단순하게 교회의 숫자를 늘리기 위한 팽창운동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구원자로 알지 못하는 영혼에 대한 관심이요 헌신이자 사랑입니다. 내가 구원 받은 것이 소중한 것처럼 나 아닌 타인의 구원에 관심 갖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변에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세상에 취해서, 쾌락에 취해서, 육신의 것에 만족해서 썩어질 육신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너희가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하셨습니다. 썩을 것을 위해 심은 자는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심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성도들이 시므온이 깨달은 것처럼 만민의 예수, 이방인을 위해 빛으로 오신 예수그리스도로 깨닫게 된다면 전도와 선교를 나의 사명으로 삼지 않을 수 없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해 봅니다. “ 예수님은 누구십니까?”시므온이 깨달은 것처럼 ‘만민의 예수이십니다. 나에게서 끝날 예수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전파되어야할 예수인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깨달아야 예수를 전해야할 이유가 있는 것이고 핍박을 당하고 욕을 먹어도 예수그리스도를 전해야할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9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 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가겠다. 너희는 할례자 즉, 유대인에게로 가라.’ 내 민족만을 말하는 너희는 유대인에게로 가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사람들은 우리나라도 전도가 안 되는데 왜 세계를 향해 전도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여러분! 미국이 지금 다 전도 되었나요? 그들이 다 전도되지 않았어도 선교사를 보냈어요. 제가 장담하건데 우리나라도 100년이 가도 다 전도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항상 불신의 세력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 아닌 타인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되고 내 민족이 아닌 타 민족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선교요 전도인줄로 믿습니다.
선교와 전도는 교회 존재의 이유입니다. 이방인과 만민은 우리의 목적이자 사명이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인에게로 갔던 것처럼 우리도 복음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에게로 가야 합니다. 이방인에게로 갔던 바울과 유대인에게 갔던 베드로를 비교해 볼 때에 결과는 어떻습니까? 내 민족 중심이었던 베드로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모든 리더십이 그에게 있었지만 나중에는 리더십이 점점 없어져서 변방으로 가게 됩니다. 그러나 변방에 있던 사도바울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방인을 위해서 관심을 갖다보니까 리더십이 점점 세워져서 성경의 리더십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나 하나 예수 잘 믿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아무리 그 사람이 뛰어나도 얼마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사람은 아웃사이더가 되는 거예요. 그러나 조금 부족해도 아직도 구원 받지 못한 영혼을 생각하고 그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끊임없이 전도와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나가는 사람은 어느 순간에 하나님께서 리더의 중심으로 만들어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2. 예수님으로 인해 일어날 일
또 시므온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해 세움을 받았다.” 또 칼이 마음을 찌르듯이 사람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분입니다. 빌립보서 1장 2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증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는 자에게는 멸망의 증거요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예수는 전해도 되고 전하지 않아도 되는 분이 아닙니다. 전하지 않으면 멸망과 사망에 이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으로 예수를 알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전하지 않으면 화가 됩니다. 내게도 화가 되고 남에게도 화가 됩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것처럼 우리도 알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수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요? 이 질문이 중요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만민의 예수, 나만의 예수가 아니라 이방을 비추는 빛이다.’라고 고백 할 수 있게 될 때에 우리의 삶은 변화되고, 전도할 수밖에 없게 되고, 영혼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는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올해 우리 교회가 ‘한 사람이 한 사람 전도해서 일만 성도됩시다.’ 하고 구호를 외치고 있습니다. 서구 관내에 40만 되는 사람들에게 우리교회가 곳곳마다 다니면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들은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면전에서 비방하고 반대할지 몰라도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거룩한 열정이 여러분 속에 있어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교회는 몇 명모이지요?’ 라는 유치한 질문보다는 ‘이 교회는 이 지역을 구원해 내는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교회인가요? 이 교회는 지역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거룩한 빛과 소금된 향기를 나타내는 영향력 있는 교회인가요?’ 라는 질문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만큼 헌신하실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깨닫는 만큼 전도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시므온이 깨달은 것처럼, 사도 바울이 깨달은 것처럼, 유진벨 선교사가, 유화례선교사가 깨달은 것처럼 우리도 예수그리스도를 그렇게 깨닫고 그분을 전하는 우리들의 복된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2:27~35 2장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