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와 족보 (눅 3:21-38)
오늘 설교 제목은 세례와 족보입니다. 제목은 딱딱하게 느껴지겠지만 내용은 부드러울 것입니다. 여러분이 함께 은혜를 받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 세례를 다 받으셨나요? 세례를 받지 않으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신 분들은 세례를 받을 때의 감동과 기억이 지금도 있으신가요? 그런 분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도 계실 것입니다.
저는 중학교 때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 받는 것에 대한 기대를 많이 했어요. 세례를 받을 때는 뭔가 신비적이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문답을 받을 때에 그 기대가 깨어졌어요. 예전에는 성탄절 전야에 주일학교 학생들이 발표회를 하고 난 후 새벽 송을 돌기 전까지 그 남는 시간을 이용해서 세례 받을 사람들을 문답했어요. 세례문답을 하신다고 해서 아주 많이 기대를 했는데 목사님께서는 “주기도문 외우냐? 십계명 외우냐? 사도신경 외우냐?” 고 물으셨어요. 이것은 주일학교 때부터 알고 있던 것이라서 문답에 백점을 맞고 나왔어요. 그리고 그 다음날 성탄절에 세례를 받았어요. 세례를 받을 때에 엄청난 뭔가가 있을 줄 알았는데 목사님께서는 자그마한 그릇에 물을 가지고 오셔서 그것을 다 붓는 것도 아니고 손바닥에 물을 찍어서 머리에 발라주셨어요. 그렇게 세례를 받았어요. 기대했던 것만큼 감동적이지는 않았어요. 그렇지만 제가 지금까지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있었던 가장 소중한 일은 바로 세례라고 믿습니다. 세례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대단한 것이었어요.
옛날에는 아주 어린 나이에 결혼을 시켰어요. 그러면 결혼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몰라요. 제가 어렸을 때에 꼬마신랑이라는 영화가 있었어요. 신부는 나이가 많은데 신랑은 꼬마예요. 그러니 당연히 결혼이 무엇인지를 모르지요. 그러나 꼬마신랑 부부는 세월이 좀 지나서 결혼의 의미를 알고 행복하게 살아요. 나이가 들어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감동스럽게 세례를 받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고 너무 어린 나이에 받아서 중요성도 의미도 모르고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러나 세례의 의미를 알고 받았는지 모르고 받았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예를 들어 사랑해서 결혼했으면 사랑하며 살면 될 줄로 믿습니다. 어르신들은 실제로 얼굴도 보지 못하고 사진만 보고 결혼했어도 잘사는 분들이 많으세요. 세례를 받기 전에는 예수님을 잘 몰랐지만 일단 세례를 받았으면 그 주님을 섬기고 잘 사는 것이 마치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는데 행복하게 사는 부부와 같습니다.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상 제일 먼저 세례를 받은 사람은 무명의 그리스도인입니다. 1872년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선교사는 영국에서 파송 받아 만주선교를 시작합니다. 이 무렵 로스는 평양 대동강변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 토머스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한국선교에 대한 꿈을 갖게 됩니다. 로스는 한국선교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서 1874년 10월9일 고려문을 방문하였습니다. 로스는 이곳에서 한국 상인들을 만나서 한문성경을 팔면서 전도했으나 한국 사람들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여관에 있는 로스에게 50대의 남자상인 한 명이 찾아왔고 이 때 로스는 그 상인에게 한문으로 된 신약성경과 번즈목사가 번역한 '훈아진언'이라는 기독교소개서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런 후 로스를 직접 찾아가 성경과 소책자를 받아간 상인은 자기의 고향인 의주로 돌아가서 성경을 읽었고, 1879년 초, 이 두 명의 한국인이 만주에 있던 맥킨타이어 선교사를 찾아와서 기독교로 개종을 표명했습니다. 그러자 맥킨타이어는 한국교회의 첫 개종자는 공개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해야 하며, 또한 고향에 가서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갔다가 얼마 후에 다시 돌아 왔는데 그 중의 무명의 한 사람은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어 한국개신교회 최초의 세례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한 사람이 공개적으로 세례를 받았는데 이처럼 목숨 걸고 세례를 받은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세례는 이처럼 소중한 성례입니다.
이처럼 아름다운 세례가 있는가하면 또 군대에서는 초코파이와 야쿠르트 줄 테니 교회로 모이라고 해서 갔는데 세례를 받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세례는 부정해야 됩니까? 그것도 부정할 필요는 없어요. 왜냐하면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어도 자녀 낳고 잘사는 분들도 계시지 않습니까? 그렇게라도 세례를 받아서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 21절로 22절은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예수님도 세례를 받으셨다는 내용입니다. 누가복음에는 간단하게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있지만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에는 세례요한이 죄 없으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 수 없다며 거절을 하지만 세례를 베푸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이라며 재차 요청하심으로 세례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베풉니다. 그런데 세례를 베풀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서 예수님 위에 임하게 됩니다. 또한 하늘에서 소리가 있어 말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23절로 38절은 예수님의 족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는 아담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입니다. 따라서 이 시간에는 이처럼 소중한 세례와 족보에 대해 은혜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고자 합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
오늘 말씀을 보면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요한에게 나아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세례요한의 말대로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죄인처럼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세례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기에 예수님조차 이처럼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까?
첫째,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죄를 회개하는 의미에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즉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께서 죄가 있으셔서 그 죄를 씻음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그는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라고 선언하고 있어요. 그런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이유는, 따라해 보실까요.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기 위해서” 그래서 사도요한은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은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겠다는 신고식과도 같은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처럼 회개의 물세례를 받으신 것은 너희를 위해서 내 몸을 아낌없이 내어놓겠다는 희생과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둘째, 의를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함이라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이룬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본문 21절을 보면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라고 기록하고 있어요. 이는 모든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음으로 예수님도 세례를 받아서 세례요한의 정통성을 인정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앞으로 모든 사람이 대대로 세례를 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시기 위해서 친히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였으며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동시에 받으심으로 사람과 하나님으로부터 동시에 메시야로서의 인정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는 행위요 사람으로부터 인정받는 행위인 것입니다. 세상 사람에게는 ‘나는 이제부터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속하겠습니다.’라는 표현이요 하나님께는 ‘너는 이제 나의 자녀로구나. 나의 가족이로구나. 나의 권속이로구나.’ 하고 인정받는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셋째, 공생애의 시작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구원 사역의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2.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에 우리도 예수 믿는 표징으로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는 반드시 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는 마치 부부가 한 가정을 이루려면 결혼식을 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례를 받지 않고도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혼식을 하지 않고 결혼생활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형식이라는 자체가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 세례를 받아야할 이유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세례는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명령이며 그리스도인들이 받을 위대한 축복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세례를 받으셨고 마태복음 28장 19절로 20절에서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분부하신 후 공생애를 마치셨습니다. 따라서 세례 요한으로부터 사도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의 위대한 지도자들은 이 성스러운 예식에 참예했고 제자들에게 가르치며 실천하였습니다.
둘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 신앙의 외적표현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를 향한 내적 신앙의 외적인 고백이며 하나님께서는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자기의 백성 됨을 인 쳐 주시는 것입니다. 세례란 “저는 하나님께 속했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따릅니다.” 라고 고백하는 외적 표현입니다. 세례는 내가 참으로 어디에 충성하고 누구에게 의존하며 어떤 인생의 방향을 취하고 있는지를 모든 사람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을 세상에서 구별시키고 그리스도께 소속시키는 외적인 표지가 세례입니다.
셋째는 주님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결혼 예식이 두 남녀가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처럼 세례는 주님과 하나가 되어서 주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주님의 살아나심이 나의 살아남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3절로 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죽으신 것이 나를 위해 죽으신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영생을 얻으심이 나의 생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의 놀라운 비밀이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세례를 바로 받으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거예요. 초코파이 먹으려고 세례를 받는 것은 문제가 있겠지만 내 마음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받는 거예요. 세례는 예수그리스도와 공동운명이 되는 거예요. 아버지가 빚을 지면 자식이 빚쟁이가 됩니다. 아들이 돈을 벌면 아버지도 호강하는 거예요. 공동운명이에요. 세례는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고 일생에 한번밖에 받을 수 없는 거예요. 간혹 세례를 영광스럽게 받고 싶다며 미루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나 그것만 좋은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남편을 정말로 뜨겁게 사랑하는 전까지는 결혼하지 않겠다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덜 사랑해도 결혼하세요. 결혼하고 사랑하면 됩니다.
청년들에게 물어볼게요. 사랑하고 결혼해야 되나요, 아니면 결혼하고 사랑하면 되나요? 많은 청년들이 사랑하고 결혼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요즈음 젊은이들을 보면 죽고 못 살듯이 사랑하여 결혼했는데 중간에 힘들다고 갈라섭니다. 그런데 옛날 어르신들은 사랑이라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결혼했지만 잘 삽니다. 어떤 분은 예수님을 알고 세례를 받는 분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분도 있어요. 결혼해서 호적등본에 올라가면 무조건 법적인 권리를 얻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해도 세례를 받으면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례를 받아야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3. 세례를 받자.
혹시라도 이 자리에 세례를 받지 못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세례가 이렇게 중요하구나. 내 이름을 생명책에 기록하는 것과 같고 주님과 하나 되는 공동운명체가 되는 것이구나.’하는 깨달음을 가지시고 세례를 교육받고 세례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또 자녀들이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분들은 그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훈계하고 잘 인도해서 세례 받게 해야 됩니다. 그리고 목자님들은 목원 가운데서 믿음이 연약해서 아직 세례 받지 않은 분들이 있다면 이들이 세례를 받을 수 있도록 잘 인도해 주어야 합니다. 이 세상 다 지나가고 나면 내가 세례 받게 한 사람만 남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세상도 떠나가고 명예도 떠나가고 다 떠나가지만 내가 세례 받게 한 그 사람은 영원히 남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례는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의 문이 열렸습니다. 하늘에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서 소리가 있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예수 그리스도가 닦아 놓으신 새롭고 산길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하늘의 문이 열려서 하늘이 우리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또 세례는 위대한 대관식과도 같습니다. 옛날 헷 족속은 왕의 대관식을 성대하게 가졌습니다. 부왕이 아들에게 왕관을 물려줄 때 찬란한 금관을 손수 아들에게 씌워주고 주위에 모여 있는 문무백관들과 백성들이 다 듣도록 큰 소리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을 한다고 합니다. 세례는 부왕 되신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하늘의 상속자로 선언을 해주시는 행위인 것입니다. 자녀의 권세를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세례를 나도 받고, 가족도 받고, 믿음이 연약한 사람도 받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전도하여 불러내어서 받게 하는 것이 예수님의 지상 명령이요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4. 예수님의 족보
본문 23절에는 예수님의 족보를 말하면서 예수님께서 삼십 세쯤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나이가 언급된 유일한 구절입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삼십 세가 되어야 대제사장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다윗도 삼십 세에 왕이 되었고, 요셉은 삼십 세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산헤드린의 회원자격도 삼십 세였다고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나이가 삼십 세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할 때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성경엔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가 있습니다. 마태의 족보는 아브라함부터 예수님까지 42대가 이르렀음을 소개하고 누가는 예수님으로부터 아담에게 이르기까지 소개합니다. 그런데 족보를 살펴보면 마태의 족보와 누가의 족보가 다릅니다. 이유는 마태는 요셉을 중심으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요셉이 다윗의 후손으로 예수님께서는 왕권을 가지고 오신 만왕의 왕이심을 강조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마리아를 중심으로 한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은 모든 인간의 구주이심을 전하기 위해 이렇게 족보를 다르게 만든 것입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위한 복음서라면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위한 복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족보도 유대인의 왕족으로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이 마태의 족보라고 한다면 누가의 족보는 구속자로서 예수님은 모든 족속, 모든 민족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알리기 위한 선교적인 족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두 족보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하든 인성을 강조한 것이든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구원 사역에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개입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의 한 가운데 오셔서 모든 민족 모든 인생의 구주가 되심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어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이시며 전해야 할 이름도 오직 예수이십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누구든지, 어느 민족이든지 구분하지 아니하고 예수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의 표징이 세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례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까? 이 세례의 축복을 여러분도 누리시고 아직 이 세례의 축복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 분들을 이 세례의 축복 안으로 이끌어가는 사명을 감당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3:21~38 3장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22 성령이 형체로 비둘기같이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23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할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 사람들의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요셉의 이상은 헬리요 24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얀나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25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아모스요 그 이상은 나훔이요 그 이상은 에슬리요 그 이상은 낙개요 26 그 이상은 마앗이요 그 이상은 맛다디아요 그 이상은 서머인이요 그 이상은 요섹이요 그 이상은 요다요 27 그 이상은 요아난이요 그 이상은 레사요 그 이상은 스룹바벨이요 그 이상은 스알디엘이요 그 이상은 네리요 28 그 이상은 멜기요 그 이상은 앗디요 그 이상은 고삼이요 그 이상은 엘마담이요 그 이상은 에르요 29 그 이상은 예수요 그 이상은 엘리에서요 그 이상은 요림이요 그 이상은 맛닷이요 그 이상은 레위요 30 그 이상은 시므온이요 그 이상은 유다요 그 이상은 요셉이요 그 이상은 요남이요 그 이상은 엘리아김이요 31 그 이상은 멜레아요 그 이상은 멘나요 그 이상은 맛다다요 그 이상은 나단이요 그 이상은 다윗이요 32 그 이상은 이새요 그 이상은 오벳이요 그 이상은 보아스요 그 이상은 살몬이요 그 이상은 나손이요 33 그 이상은 아미나답이요 그 이상은 아니요 그 이상은 헤스론이요 그 이상은 베레스요 그 이상은 유다요 34 그 이상은 야곱이요 그 이상은 이삭이요 그 이상은 아브라함이요 그 이상은 데라요 그 이상은 나홀이요 35 그 이상은 스룩이요 그 이상은 르우요 그 이상은 벨렉이요 그 이상은 헤버요 그 이상은 살라요 36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그 이상은 아박삿이요 그 이상은 셈이요 그 이상은 노아요 그 이상은 레멕이요 37 그 이상은 므두셀라요 그 이상은 에녹이요 그 이상은 야렛이요 그 이상은 마할랄렐이요 그 이상은 가이난이요 38 그 이상은 에노스요 그 이상은 셋이요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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