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눅 4:16-20)
말씀의 제목을 따라해 보실까요.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할 수 있는 결단과 다짐이 있게 되는 이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제는 폴란드 대통령 내외분을 태운 비행기가 추락해서 탑승한 사람 모두가 사망을 했다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천안함이 침몰 된지 두주가 넘었지만 아직도 인양을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천암함이 침몰되었을 때 함께 수장된 장병들을 안타깝게 여기던 네티즌이 해군본부 홈페이지에 기도시를 올렸던 것이 수천만 번 검색되어 화제가 되었습니다. 시를 올린 사람의 신원이 밝혀졌는데 감사하게도 기독교인 의사였습니다. 동아대 의대 교수인 김덕규 교수인데 군함에 갇혀있는 장병들을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메어지고 눈물이 나서 이런 애절한 기도시를 올렸다고 합니다. 읽는 사람마다 함께 눈물을 지었습니다. 그 일부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천안함) 722함 수병은 즉시 귀환하라 722함 나와라
가스 터어빈실 서승원 하사 대답하라 디젤 엔진실 장진선 하사 응답하라
그대 임무 이미 종료되었으니 이 밤이 다가기 전에 귀대하라
대한민국을 보우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아직도 작전지역에 남아있는 우리 772함 수병을 구원 하소서
우리 마흔 여섯 명의 대한의 아들들을 차가운 해저에 외롭게 두지 마시고
온 국민이 기다리는 따뜻한 집으로 생환시켜 주소서
부디 그렇게 해 주소서
저도 이 시를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기록한 시가 민족을 하나 되게 하며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게 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수장되어 있는 장병들과 유가족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면서 써내려간 이 눈물어린 시처럼 우리도 우리 가운데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의 괴로움을 생각하며 함께 눈물로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피치 못할 어려움으로 고통당하는 분들을 위해서도 눈물의 기도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애통하는 마음으로 눈물로 중보기도를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우리 성도들이 고통당하고 있을 때 내가 이처럼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절망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해서 서로 눈물로 기도하는 관계일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시간에는 먼저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원합니다.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사람들, 너무도 힘들고 외로워서 외로운 섬에 혼자 갇혀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힘을 얻을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천안함 유가족들을 위로해 주시고 이번기회를 통해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합심해서 기도하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김덕규 교수가 눈물로 장병들을 위해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 성도들의 어려움을 보면서, 우리 주변의 고통당하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을 위해서 눈물로 하나님 앞에 기도 할 수 있는 긍휼의 심정들이 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나 하나만 잘되면 된다는 생각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어려움을 당하는 자들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생각하면서 함께 울 수 있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도록 도와주시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천안함의 장병들을 주께서 기억해주시옵소서. 그들을 바다 가운데 수장하고 지금도 고통가운데 있으며 아직도 시신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유가족들의 마음을 주께서 위로해 주시옵시고 주님께서 찾아가 주시어서 만나주시고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우리 복된 교회가 서로를 위해서 눈물의 기도가 있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고 사십일 금식을 마치시고 마귀의 시험에서 승리하신 후에 고향 나사렛에 이르렀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나사렛은 주님께서 자라나신 곳입니다. 이곳에 이른 때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늘 하시던 대로”
성경을 통해서 보면 예수님께서는 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성도되기를 축복합니다. 지난 주간에는 특별새벽기도회가 끝나서 편안하셨나요? 이제 기도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상시에도 늘 새벽을 깨워 기도하는 기도용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늘 하시던 거룩한 생활습관은 바로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은 예배를 받으실 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도 회당에 들어가셔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회당은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다 왕국의 정치적, 종교적 지도자들이 외지에서도 야훼께 기도함으로써 야훼가 예루살렘의 성전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어느 곳에서든지 섬길 수 있는 분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회당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예배하던 곳입니다. 제가 회당에 가 보니까 지금의 교회와 비슷합니다. 가운데 설교 강단이 있고 회중석이 있는 구조입니다. 지금의 교회가 회당을 본 딴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교회에 들어가셨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늘 하셨던 거룩한 습관의 하나는 늘 회당을 가까이 하셨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늘 가까이 하는 신앙습관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일주일에 한번 교회에 나오던 성도는 두 번 나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술집을 자주 출입하면 술주정뱅이가 되는 것입니다. 도박장에 드나들면 도박꾼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교회에 나오느냐에 따라서 인격과 믿음이 자라나게 됩니다. 교회를 가까이하는 것이 믿음이 자라고 영성이 자라는 길입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생활습관은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따라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주님을 따라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주님을 앵무새처럼 따라해 보는 것입니다. 따라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님을 닮아지게 됩니다.
순복음교회 목사님들은 조용기 목사님이 설교하는 것을 흉내 내서 따라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흉내 내는 교회마다 부흥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만 흉내 내도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게 되고 주님을 닮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것들은 일부분 따라할 것은 있지만 전부는 아니에요.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모든 것을 따라서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1. 늘 하시던 주일성수
예수님은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는 회당에 들어가 성경을 읽으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주일 성수의 거룩한 습관을 가지신 것입니다. 회당에 들어갔다는 것은 교회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성도는 늘 교회에 나와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전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그래서 늘 성전을 가까이 해야 됩니다.
요즈음은 성전에 대한 중요성이 퇴색되어 가고 있어요.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는데 아무 곳에서나 예배를 드리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하면서 성전에 나오지 않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분들도 있고, 등산가서 산꼭대기에서 성경을 펴놓고 예배를 드리고 예배드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이 편리주의로 빠지다보니까 자기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이에요. 어떤 분은 방송으로 설교를 듣고 예배를 드렸다고도 합니다. 설교를 듣는 것과 예배를 드리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설교는 예배의 다섯 가지 요소 중의 한 부분입니다. 예배는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과 정성을 모두 드리는 종합적인 온전한 헌신입니다. 그러므로 인터넷, 방송 예배는 정확하게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혹자는 예수님 시대에는 인터넷, TV방송이 없었기 때문이며 지금이라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라고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이런 모든 말과 행동은 주님께서 피로 값을 지불하시고 세우신 교회를 약화시키는 태도입니다.
계란 다섯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썩은 것이라면 그것들을 섞어서 요리를 했을 경우 먹을 수 있습니까? 먹을 수 없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의 신앙생활도 한 가지만 잘못되어도 잘못되는 것인데 설교만 듣고 예배를 드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예요. 또 아무 교회나 가서 예배를 드리면 된다는 생각을 하는 성도들도 있어요. 따라해 보실까요. “내 교회” 내 교회가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죽어 뼈를 묻을 곳이 있는 거예요. 우리나라 넓은 땅이 있어도 내가 죽었을 때 아무데나 묻을 수 없어요. 내 호적을 아무데나 가서 올릴 수 없는 거예요. 내 호적을 올릴 집이 있는 거예요. 요즈음은 내 교회라는 개념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이것을 para-church라고 해요. 교회는 없고 하나의 단체로서 끝나버리는 것이에요. 이런 것들은 대단히 위험한 생각들입니다. 내 교회가 분명하고 교회에 나와서 주일 성수하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수술을 했다든지 아니면 어떤 납득할만한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곤 어떤 이유로든 성전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합니다. 주일성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 있지만 동시에 아주 중요한 몇 가지 목적을 수반합니다.
그 중 하나는 교회 공동체의 활력입니다. 즉 성도가 주일에 모여 함께 예배한다는 것 자체가 힘이요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됩니다. 교회에서 모임으로 성도 간에 교제가 이루어지고, 모임을 통해 서로를 도울 수 있고 시너지가 일어납니다. 나 하나쯤 빠지면 어떠랴하고 모임에 참여하지 않으면 힘을 잃게 됩니다. 성도는 어떤 모임이든 그 모임에 활력을 일으키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힘을 빼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초대교회는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가 된 줄로 믿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모여서 기도하고, 말씀 듣고, 배우고, 나가서 섬겼습니다. 모일 때 힘이 하나가 됩니다. 하나가 되다보니 세상을 이기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지난 부활주일 새벽에는 인천 광장에 일만 명 정도가 모여서 새벽예배를 드렸어요. 여러 가지 제목으로 기도를 했는데 특별히 천안함 장병들과 가족들을 위해서 두 손을 높이 들고 주여 삼창을 외치며 통성으로 기도했어요. 그 힘이 대단했어요. 아멘. 교회는 모일 때 힘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목장은 목장대로 모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청년은 청년대로 모여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학생을 학생대로, 성가대는 성대대대로, 예배는 예배로 모여야 됩니다. 모이는 것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됩니다. 모임을 통해서 교육이 되고, 서로를 섬길 수 있게 되고 교회를 사랑하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를 사랑할 수 있는 방법가운데 하나는 모이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말세에는 어떻게 하든지 모이지 않는 악한 습관들이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10장 25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그 날이 가까울수록 모이기에 힘쓸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주일성수는 모임의 중요성 때문만이 아닙니다.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출애굽기 20장8절에서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말씀하셨고, 더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주셨는데 출애굽기 20장 10절로11절에서는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요즈음에는 사회가 다변화되다 보니까 주일에 일을 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경우가 있는 것은 사실이에요. 이런 경우를 제외하고 주일을 범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양계장을 운영하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교회 출석은 열심이었으나 도무지 헌금을 드릴 줄 몰랐습니다. 하루는 담임 목사가 조용히 여인을 불러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가진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수입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여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목사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이제부터 주일에 낳은 달걀을 모두 십일조로 드리겠습니다." 여인은 그때부터 매주 수백 개의 달걀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점점 달걀의 수가 줄어들더니 나중에는 단 하나의 달걀도 가져오지 않았습니다. 담임목사는 다시 여인에게 성실한 십일조를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우리 닭들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기 때문에 주일은 알을 낳지 않습니다." 이런 말을 하면서까지 주일성수를 강조한다는 것이 비애를 느끼게 합니다. 사람 만나고 놀러가는 것은 잘하여도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늘 그러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할 수 있어야 되겠습니다. 주일 성수를 마음에 결단하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2. 늘 하시던 어려운자에 관심
주님은 늘 하시던 대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셨고, 또한 늘 하시던 대로 성경을 읽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성경 읽기는 단순한 읽기가 아닙니다. 그냥 느끼는 수준이 아니라 그 말씀을 실천하는 읽기입니다. 주님이 회당에 들어가시자 누군가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예수님께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펴서 읽으신 내용은 이렇습니다. 18절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주의 성령이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우연히 펴서 읽은 곳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늘 읽으셨던 곳입니다. 이사야 61장 1절로 2절 말씀인 이 구절은 메시아가 오셔서 하실 일이 이러하다는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즉 메시아이신 주님은 이런 자들을 사랑하시고 이런 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세상에 많은 영혼이 있지만 가난한 자, 병든 자, 눌린 자, 포로 된 자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들을 사랑하십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수님 자신에 대한 말씀인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말씀을 백성들 앞에서 펴 보이시면서 내가 앞으로 이 일을 할 것이라고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또 늘 하시던 것은 우리 중에 가난하고, 병들고, 눈멀고, 눌리고, 힘들고, 어렵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위로하고 힘주고 격려하는 일을 하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늘 하시던 일을 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실패당한 사람은 친구도 없어요. 만날 사람도 없어요. 외로워요. 육체에 병이 든 사람도 마찬가지예요. 육신의 질병으로 인해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고 생각해보세요. 갈 곳도 없어요. 먹어도 먹는 것이 아니고 웃어도 웃는 것이 아니고 잠을 자도 자는 것이 아니에요. 그 고통은 누구도 모릅니다. 당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우리 주님은 우리보다 먼저 고통과 시험을 받으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사정을 아시고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인 줄로 믿습니다.
지금도 힘들고 어려운 가운데 지쳐있는 분들 계십니까? 주님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내가 너희들의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만나면 너희가 힘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 낙심되고, 힘들고, 문제 속에 있다가 주님 앞에 나오신 분이 계시다면 이런 주님 만나시고 주님 손을 붙잡고 세상을 이기며 승리하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는데 이런 찬송이 떠올랐어요.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는 자의 위로와 없는 자의 풍성이며 천한 자의 높음과
잡힌 자의 놓임 되고 우리 기쁨 되시네
예수님은 누구신가 약한 자의 강함과 눈먼 자의 빛이시며 병든 자의 고침과
죽은 자의 부활 되고 우리 생명 되시네
찬송가 가사와 같이 하시기 위해 주님께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선 늘 이렇게 하셨어요.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저 자신도 그런 것 같아요. 정말로 가난하고 어렵고 힘든 자들은 찾아가려고 하지만 잘 못해요. 오히려 나보다 더 힘 있는 사람, 나보다 더 많이 배운 사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찾아가서 힘을 얻고 위로 받고 싶어지는 것이 우리들의 마음인 것 같아요. 주님께서 늘 하셨던 대로 나보다 더 힘든 사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실패해서 외로운 사람, 병들어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 좌절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찾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천안함 722함대에 있는 사병들은 나와라.’ 라는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죄와 저주에 사로잡혀 있는 아무개는 나와라. 사단의 사슬에 매여 있는 아무개는 나와라. 우리 주님이 너를 위해 죽으셨다. 그를 믿고 나와라 그러면 생명을 줄 것이다. 하나님이여 부디 그 영혼을 사랑하사 그를 죄악 속에서 건져 주시옵소서.’
여러분! 부자가 예수 믿기 쉬운가요, 가난한 자가 예수 믿기 쉬운가요? 가난한 사람이 예수 믿기 쉬워요. 교회는 사업에 실패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많아요. 주님은 이런 자들을 만나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실패하고 마음이 가난해져서 누군가를 찾고자 할 때 주님께서 그들의 주님이 되어주는 줄로 믿습니다.
주님이 주일성수하셨기에 우리도 주일성수해야 합니다. 주님이 새벽기도 하셨기에 우리도 새벽을 깨워야 됩니다. 주님이 가난한 자들을 찾아다니셨기에 우리도 그리 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늘 하시던 대로 우리도 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4:16~20 4장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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