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담과 비난하지 않기 (눅 4:22-30)
저와 여러분은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주 앞에 나아와 예배하는 거룩한 백성들인 줄로 믿습니다. 옆 사람하고 인사해 보실까요. “귀하는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주일성수 하시는군요.” 아멘. 주님이 늘 하시던 대로 이루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자라나셨던 나사렛지방을 방문하셔서 이사야 61장에 기록된 말씀을 전하셨어요.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본문 18절로 19절 말씀, 이사야 61장 1절로 2절 말씀을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렇게 반응합니다.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말입니까? 천하디 천한 신분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목수의 아들이던 예수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 목수로 지냈던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면서 쑥덕공론과 인식공격을 한 것입니다. 그가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면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이런 저런 험담과 비난이 쏟아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험담의 대상이 되셨습니다.
1. 험담
사람은 대상을 가리지 않고 험담하는 것 같아요. 하나님도, 예수님도 험담의 대상이 됩니다. 성도들 간에도 험담하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험담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수군거리고 험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멘으로 받아서 나에게 복이 되고, 은혜가 되고, 기적이 되고, 역사가 되는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험담은 왜 하는 것입니까? 내 안에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찼기에 험담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내 안에 긍정적인 믿음으로 가득 차게 되면 험담하지 않고 아멘으로 받게 되고 그럼으로 복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부정으로 가득차서 험담하는 성도가 아니라 긍정으로 가득차서 아멘이 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사렙다 과부처럼 복을 받고 나아만처럼 치유 받는 역사가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험담과 인신공격은 사람들이 생각 없이 편승하여 저지르기 쉬운 죄입니다. 로마서 1장 29절로 32절에 보면 수군수군 하는 것이 사형에 해당된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특히 한국 사회에서 네티즌의 악성, 공격성 댓글의 폐해는 심각한 주순이어서 대표적으로 몇 몇 연예인들이 자살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는 현실입니다. 험담이라는 것은 부정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이며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험담이 세상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서 상습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의 경우를 보면 험담과 비방이 난무한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교린도 교인들로부터 얼마나 험담을 많이 들었는지 고린도 교회를 갈수도 없다고 했습니다. 고린도 교회를 가면 그들로부터 들었던 험담 때문에 마음이 상해서 격한 말을 할 것 같아서 방문을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을 그런 것에 넘어지지 않고 자기에게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소속된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험담과 비방이 있습니다. 교회마다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전혀 없는 교회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험담과 비난은 비교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이기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부정적인 생각에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우월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험담이 그리스도인에게는 없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떠한 말씀이든지 아멘으로 받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위대한 말씀을 하셨을 때에 당시의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험담하고 비난했을까요? 비교의식, 경쟁의식,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 보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사람들은 왜 험담을 할까?’ 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연구한 결과를 보면 첫째, 험담과 비난은 남의 약점과 결함을 부각시키며 상대적인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험담을 한다는 것은 일단 자신을 상대방 보다 우위에 놓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매우 교만한 태도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남을 험담할 때 험담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의롭고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처럼 보이게 마련이지요.
둘째, 험담하는 동안 주목을 받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험담을 용인하는 분위기가 좋기 때문입니다. 일단 험담은 함께 있는 사람들 중에서 공통분모를 찾아내서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대부분 공감하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험담이 속도를 내고 주제를 넘나들게 되는 것이지요.
셋째, 자기가 가진 성향 중에 싫어하는 것을 남들에게서 찾아내려는 심리 때문이라고도 합니다. 험담은 이기적 태도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궤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험담하는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어떤 말씀도 아멘으로 받을 수가 없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조금도 부정적인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목자에 대해서 험담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속해 있는 목장에서 목원이 목자의 험담을 하면 그 목자가 전하는 말씀에 은혜를 받을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복 받은 두 사람을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은 시돈사람 사렙다 과부입니다. 열왕기에 보면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아합왕의 악한 정치로 인해서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는 흉년을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순간에 엘리야가 과부의 집을 방문합니다. 엘리야가 가난한 과부의 집을 방문하면서 쌀을 지고 간다든지 기름을 몇 말 들고 간다면 얼마나 환영을 받았겠어요. 그런데 엘리야는 우리가 험담할 만한 일을 했어요. 아니, 어떻게 과부의 집을 가는데 빈손으로 갑니까? 그것도 욕먹을 짓이지요. 그런데 그것도 모자라서 자신을 위해서 먹을 것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러자 사렙다 과부는 우리에게는 한줌의 밀가루와 그것을 구울 기름조금 밖에 없어서 아들과 이것을 마지막으로 먹고 죽으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과부에게 음식을 만들어 가져와서 나를 먹게 하라고 합니다.
이 정도라면 엄청난 험담을 들어야 했을 것입니다. 만약에 목사가 이렇게 했다면 집에 가서 밤이 새도록 험담했을지도 몰라요. ‘목사가 인간도 아니다. 저만 알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사렙다 과부도 험담하는 사람이었다면 아들과 입을 맞추어 ‘너하고 나하고 마지막으로 먹고 죽을 최후의 만찬인데 이것을 가지고 오라고 한다. 어떻게 하면 좋겠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 찬 사람은 엘리야에게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을 것입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렙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에 순종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이스라엘 여인도 아니었어요. 남편을 일찍 잃은 이방여인이었어요. 힘도 없고 별 볼일 없는 존재였어요. 그런데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수많은 어려운 사람들을 다 내버려두고 사렙다 과부를 찾아갔어요. 왜 그랬을까요? 순종할 사람이기에 찾아간 줄로 믿습니다. 엘리야는 마지막 양식으로 지은 음식을 먹은 후, 과부에게 가루 통을 보라고 합니다. 가루 통에는 분명 마지막까지 다 먹었는데 또 가루가 있었어요. 기름병에는 분명 기름을 다 쏟아서 빵을 구웠는데 또 기름이 있는 거예요. 가뭄이 끝날 때까지 가루통의 가루가 마르지 아니하고 기름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한 줄로 믿습니다.
만약 그때에 사렙다 과부가 험담을 했더라면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이런 기적을 경험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교회마다 공통점이 있는데 전부는 아니지만 부모가 교회에서 중직자의 역할을 하는 자녀들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경우들이 있다는 거예요. 부모는 믿음이 훌륭한데 자녀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예요. 어떤 경우는 교회에 나오지도 않고 나온다할지라도 골칫거리인 경우가 있어요. 이렇게 되는 이유는 그 부모가 가정에서 교회에 대해서 험담을 많이 하고, 목회자에 대해서 험담을 많이 하고, 성도들에 대해서 험담을 많이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 험담을 들으면 설교에 은혜를 못 받아요. 성도님들과도 관계가 좋을 수 없어요. 그러니까 교회에 적응을 못하는 것이지요.
아무튼 어떤 이유에서 험담을 하든지 험담은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옵니다. 험담은 세 사람을 죽인다고 윌 로저스는 말합니다. 첫째는 험담하는 당사자입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험담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지한 얘기를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험담은 다른 사람에게 하는 것이지만 결과는 자기에게 돌아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험담의 대상자’입니다. 그는 그 사실조차 까마득히 모른 채 피해를 당하는 것입니다. 변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매도당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귀가 간지러울 겁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은 험담을 ‘듣는 사람’입니다. 험담을 들으므로 그에 대한 편견이 생겨나서 관계를 깨뜨릴 수 있고 자칫 잘못하면 험담하는 자와 동조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지혜로운 두 신하에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을 구해오도록 명령했습니다. 며칠 후, 두 신하가 잘 포장된 상자를 가져왔습니다. 첫 번째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는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두 번째 상자를 열어보니 거기에도 사람의 혀가 들어 있었습니다. 사람의 말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보약이 될 수도 있고 상처를 주는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잔인한 말 한마디가 지울 수 없는 상처와 싸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시 돋친 말은 상대방의 가슴에 비수를 꽂고 무책임한 유언비어는 한 사람을 무고하게 매장시킵니다. 부드러운 말은 얼어붙은 사람의 마음을 녹이며 따뜻한 격려의 말은 절망한 사람에게 희망과 행복을 줍니다. 말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소중한 보화입니다. 살인은 한 사람을 죽이지만 험담은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대상이 되는 사람, 세 사람 모두를 죽입니다. 세 사람이 모두 피해자입니다.
교회에 나와서도 교회에 대해서 자꾸만 험담을 하면 마음이 닫혀져서 은혜를 못 받아요. 그러나 사렙다 과부처럼 험담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아멘, 주의 말씀이오니 말씀대로 될 줄로 믿습니다. 주의 말씀은 옳습니다. 내가 이해가 안 될 뿐이지 주님의 말씀을 맞습니다.’ 하고 순종하니까 기적과 축복이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하는 마음은 긍정으로 가득한 마음입니다. 어떤 말씀이든지 아멘하고 순종하는 마음은 권위에 복종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축복된 마음인줄로 믿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존비비어의 순종이라는 책을 권장도서로 추천 했습니다. 저도 읽고 있는데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아주 좋은 책입니다. 이해되는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것도 순종해야 돼요. 사람들은 이해되지 않으면 불평하고 험담하고 수군수군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것까지도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합력해서 선을 이루어주실 줄로 믿습니다.
또 한 사람은 나아만 장군입니다. 장관인 그가 문둥병에 걸려서 엘리사를 찾아왔어요. 당시의 아람군대는 이스라엘보다 강한군대였어요. 이스라엘은 아람의 눈치를 보는 입장이었어요. 나아만은 아람의 제2의 실력자였어요. 그런 그가 엘리사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문도 안 열어 봅니다. 직접 말하지도 않습니다. 엘리사는 게하시라는 종을 통해서 나아만에게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나아만은 그 즉시 아멘하고 순종한 것이 아니었어요. 험담과 불평이 나오기 시작했어요. ‘내가 왔으면 문을 열고 나와서 아픈 부분에 안수하면서 간절하게 기도해야지 이럴 수가 있나? 우리나라에 있는 강이 요단강만 못하냐?’하고 나아만은 마음에 분함이 가득 차서 돌아가자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주변에서 험담을 말리는 사람이 있었어요. 나아만의 종이었어요. 종은 ‘아버지여 이것보다 더 한일을 하라고 해도 할 것인데 이것이 뭐가 어려운 일입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말에 험담이 들어가고, 불평이 들어가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감으로 순종하여 요단강에서 일곱 번 씻었더니 그 몸이 여전하게 나은 줄로 믿습니다. 불평할 때 옆에서 고개 끄덕이는 사람은 동조자예요. 이름도 없는 나아만의 종처럼 분기를 누그러뜨리고 험담과 원망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멈추게 하는 지혜가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이런 사람이 옆에 있었기에 나아만이 복인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말씀하셨던 장차 오실 메시야, 선지자로서 하셔야할 일을 회당에서 전하셨는데 그 말씀을 아멘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당시에 나사렛에 있었던 유대인들은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차서 험담하고 수군수군 했습니다. 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속담을 인용하여 주님을 비난하는 것을 주님께선 아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남을 돕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즉 나사렛에서부터 기적을 행하여 인정을 받아야지 엉뚱한 동네에 가서 기적을 행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가버나움에서 기적을 행했으면 그대로 믿으면 될 것인데 가버나움과 다른 지역에서는 기적을 행했으면서 왜 이곳에서는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비방할 거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비방합니다. 험담을 하려들면 그 재료는 한이 없는 거예요. 그러나 험담하고 비방하는 사람은 축복의 자리에 동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서 험담과 비난을 쏟아 부었던 당시의 나사렛에 있었던 유대인들과 같이 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복된 교회 성도님들이 어떠한 이유로든지 이와 같은 험담의 자리에 빠져들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복을 받는 것입니다.
2. 가난한 마음
사렙다 과부가 불평하고 원망할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었어요. 나아만이 엘리사에 대해서 조목조목 따지자면 열 가지도 넘는 것을 지적할 수 있었어요. 그럼에도 멈추었어요. 그리고 아멘하고 순종하였더니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가난한 마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산상수훈을 전하시면서 제일 먼저 팔복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팔복 중에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 입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그 누구도 험담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부정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사렙다 과부처럼, 나아만 장군처럼 아멘하고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고 복이 되는 것입니다. 험담하는 성도가 아니라 아멘 하는 성도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고린도교회처럼 험담하는 사람으로 모여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처럼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 올려드릴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성경은 잠언 20장 19절에서 험담하는 사람에 대해서 조심할 것을 말씀하고 있어요.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이런 사람과 가까이 하지 않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험담을 잘하고 입이 거칠기로 소문난 여성의 별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BMW입니다. Big Mouse Women의 첫 글자입니다. 이런 여자를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나 어디서든지 늘 습관적으로 불평하고, 습관적으로 원망하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 은혜의 통로가 단절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베푸셨어도 부정적인 태도를 가졌던 사람들은 구원의 은혜를 받지 못했어요. 그러나 심령이 가난했던 자들은 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런 축복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4:22~30 4장 22 저희가 다 그를 증거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기이히 여겨 가로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2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원아 너를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증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의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24 또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25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세 해 여섯 달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으되 26 엘리야가 그 중 한 사람에게도 보내심을 받지 않고 오직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의 한 과부에게 뿐이었으며 27 또 선지자 엘리사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문둥이가 있었으되 그 중에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니라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분이 가득하여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내리치고자 하되 30 예수께서 저희 가운데로 지나서 가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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