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o

copy
설교방송 > 금주의설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로마서 11:3~4 유우열 목사 2010-04-25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롬11:3-4)

 오늘 말씀을 듣고 여러분의 마음속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중의 한 사람이 되겠다는 결단이 설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신앙에 엄청난 도전을 받는 말세를 살아가고 있어요. 여기저기에서 우리의 신앙을 흔들어 놓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제목과 같은 결단이 있어지기를 축복합니다.

 삼백이란 영화를 보았습니다. 수만의 페르시아 군대와 싸운 삼백 명의 스파르타 영웅들의 이야기를 담은 전쟁영화입니다. 민족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하는 내용입니다. 그들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민족을 위해, 죽기 위해 싸운 자들입니다. 스파르타의 왕은 최후 결전을 앞두고 충신을 한 사람을 의회에 보내어 삼백 용사들이 어떻게 나라를 위해 싸우다가 죽었는지를 알리게 합니다. 결국 스파르타의 1만 군대가 소집되고 페르시아의 3만 군대를 이긴다는 이야깁니다. 삼백 대 수만의 대결에서도 끝까지 무릎 꿇지 않고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에 근거한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이 스파르타 왕에게 무릎만 꿇으면 네 나라의 통치권을 줄 것이고 더 이상 간섭하지도 않고 원하는 대로 해 주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왕은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스파르타 인들의 용맹은 경외감이 들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절대로 승리할 수 없는 중과부적의 상태에서도 무릎 꿇지 않는 이들의 기개는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이 가져야 할 기개라고 느꼈습니다. 이 시간에 참석한 사랑하는 성도님들도 스파르타인의 기개를 가지고 말세의 유혹이 몰려온다 할지라도 믿음의 기개로서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믿음, 환경을 이기는 믿음, 온갖 유혹을 이기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금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라는 세상 현실 속에서 삼백 용사처럼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과 같은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때입니다.

 이에 비교해 본다면 과연 우리의 믿음이란 것이 무엇일까요? 너무도 쉽게 세상의 물결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고 봅니다. 과연 우리의 믿음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믿음과 행동이 이처럼 다를 수 있을까라고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믿음과 행동이 모두 같다면 하나님이지요. 늘 부족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신앙의 기본적인 것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국은 기독교인이 70%가 넘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주일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사람은 3%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세상 앞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입니다. 주일날 축구 경기는 응원하러 가도 성전에는 나오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어디에서 그들의 믿음을 찾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배가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는 시대입니다. 주일성수가 무너지고 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 가장 심각한 상황은 제단이 무너졌다는 사실입니다. 즉 예배가 무너진 것입니다. 예배가 무너졌다는 것은 예배를 드리지 않는 행위와 형식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모두 포함합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 450명, 그리고 아세라 목상을 섬기는 선지자 400명을 합한 850명과 1대 850의 대결할 때 제일 먼저 무너진 제단을 수축했습니다. 이 싸움은 누가 참신인가 하는 싸움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불로 응답하는 신이 참신이라며 850명에게 먼저 부르짖게 했습니다. 그들이 한 낮 동안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사단이 성도들을 유혹하고 넘어뜨리는데 있어서 제일 먼저 넘어뜨리는 것이 예배를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만약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무너지면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거예요. 영국교회가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한번, 두 번 예배를 드리지 않다보니, 한 달 두 달 예배를 드리지 않다보니 예배가 무너진 것입니다. 예배가 무너지니까 마음으로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생각만 있는 것이지 무엇을 믿는지도, 믿음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에 믿음이 그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거예요. 

 또한 이 시대는 하나님의 주권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행동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타락의 극치를 보였던 사사시대 말기에 이런 현상이 생겼습니다. 사사기 21장 25절 말씀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여러분!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행동이 어떤 행동인줄 아십니까? 첩은 취합니다. 또 그 첩을 베냐민지파 사람들이 돌아가면서 성폭행을 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죽자 그 여인을 첩으로 둔 사람은 시신을 열두 도막으로 나누어서 각 지파로 보내버립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입니다. 자기 생각에 옳다고 행동한 것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나에게는 옳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옳지 않을 수 있습니다. 말세는 하나님의 주권이 무너지고 나의 의만 붙잡고 살아가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과연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주님의 탄식대로 말세에 주의 말씀을 순종하고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아니하며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에 사로잡혀 세상을 승리하며 살아갈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되겠는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런 위기의식을 가지고 우리들의 신앙을 다시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은 준비하는 과정에서 마음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세상 삶의 현장에서 일주일 동안 얼마나 힘들었습니까. 성도님들 가운데는 몸이 연약해서 주님의 위로를 받고 싶은 성도도 있을 것이고, 예배를 통해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도와주신다는 격려를 받고 힘을 얻고 하나님의 축복의 메시지를 받고 싶은 성도님들도 있을 것이 아닙니까. 저도 그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데 마음속에 그런 것도 중요하지만 이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는 강력한 동기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여러분에게 이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제 매일경제신문 토요섹션 란에 ‘왕의 귀환’이란 내용이 실렸습니다. 삼성의 이건희 회장, 애플의 스티브 잡스, 스타박스 회장 하워드 슐츠, 델 컴퓨터 회장 마이클 델이 현직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한 사실을 두고 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복귀하면서 외친 공동 화두가 있는데 첫째 긴장하라. 둘째 혁신하라. 마지막으로 성장하라는 것입니다.
 
 삼성 이건희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이 진짜 위기이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삼성이 창사이래로 지금처럼 순이익을 많이 남긴 때가 없는 것 같아요. 그런데 10년 후에는 지금의 대표적인 브랜드가 다 없어질지도 모른다면서 위기론을 펼치고 있습니다. 지금 전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이 되었지만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잘 되는 사람이 위기의식을 깨닫지 못하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넘어질지 모른다는 거예요.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에도 위기의식이 필요합니다. 영국교회처럼 되지 않으려면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혁신해야 합니다.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삶을 지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아합왕 시절처럼 되지 않으려면 지금 위기의식을 가지고 우리들의 신앙을 진단해야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50개국 여행을 하면서 내린 결론을 한 마디로 말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 목사님이 여행을 하면서 보니까 우리가 기독교 국가라고 알고 있는 국가가 기독교 국가가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이름만 기독교 국가입니다. 교회에 태어나서 한번, 결혼할 때 한번, 죽을 때 한번 나오는 기독교인이 거의 대부분인거예요. 그런데 이름도 들어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했던 어떤 나라를 가보니까 그 나라는 90%이상이 기독교인이더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순복음교회가 세계제일의 교회라고 떠들어댔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느 나라에 가 보니까 백만 명이 넘는 교인이 모이는 교회도 있더랍니다. 한국교회는 이미 쇠퇴기를 걸어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은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아메리카든, 어느 곳이든 사도행전 1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이 무엇입니까?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나라는 부흥되더라는 것입니다. 

1. 바알의 정체
 오늘 말씀은 영적 혼돈의 시대였던 북 왕조 이스라엘 아합 왕 시대에 엘리야가 하나님께 믿음을 지켜 선한 싸움을 싸우고 승리했다는 내용입니다. 850명을 죽여서 기손 강에 묻어버렸는데도 아합 왕이 변하지 않았어요. 이세벨이 변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그 말에 엘리야도 낙심한 나머지 하나님께 하소연 합니다.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4절로 5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할렐루야! 그 칠천 명 속에 저와 여러분이 들어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무너져가는 이스라엘을 살린 사람들은 다름 아닌 깨어있는 엘리야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에서 칠천 명이란 매우 적은 수입니다. 그러나 이들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이 회복 될 것이기에 결코 적은 수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법으로 삼고, 하나님 중심으로 성령 충만해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칠천 명이 이 나라는 지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알은 무엇이기에 이스라엘 전부가 넘어가고 칠천 명만 남게 만들었습니까. 바알의 정체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바알은 당시에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서 섬기던 남성 신으로 풍요의 신이었습니다. 또한 여성 신으로 생산의 신 아세라 목상을 섬겼습니다. 세상에서 남자는 돈 잘 벌어오고 여자는 아이 잘 낳고 그러면 더 무엇을 바라겠어요? 세상 사람들은 모두다 풍요를 원하고 다산을 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여기에 빠져버린 거예요. 엘리야 시대에 3년 6개월의 가뭄이 오기 전 아합 왕 시대에 이스라엘은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섬기면서 경제적으로 최고의 번성을 누렸다고 합니다. 이웃나라들과 무역이 이루어지고 이방신을 섬기는 여인들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대표적으로 아합은 이세벨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되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가 폐지되고, 제사장과 선지자들은 종적을 감추게 됩니다. 이시대의 발전한 경제는 계속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심판으로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아서 다 무너져버렸습니다.

 그들은 바알을 섬겼기 때문에 풍요가 왔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 풍요만 가져다준다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 병만 고쳐준다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바알 신앙에 물든 거예요. 나만 잘된다면 어떤 신이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바알 신앙에 물든 거예요. 이런 사상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물들어서 그토록 하나님을 섬기던 사람들이 하나님 믿어봐야 현실적으로 잘 되는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즐거움도 별로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바알을 믿으니까 현실적으로 잘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삶은 쾌락이 넘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쉽게 넘어지는 부분이 이것입니다. 바로 사는 것보다 잘사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질문해 보겠습니다. 바로 사는 것이 우선입니까, 아니면 잘 사는 것이 우선입니까? 바로 살고 잘 살면 좋지요. 그러나 어떤 경우는 바로 사는데 못살 수도 있어요. 그래도 그것이 바로 살지 못하고 잘 사는 것보다 나은 줄로 믿습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사람입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게 되는 매력은 당장 수입이 늘어나고 삶은 즐겁고 자유로워지고 생각은 개방화 되는 것에 있습니다. 마치 억압에서 해방된 느낌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은 너무 속박이 많습니다. 선택의 폭이 좁습니다.

 21세기 최대의 영성학자 유진 피터슨은 이렇게 바알의 정체를 밝힙니다.  “바알은 우리의 기분을 좋게 해 줍니다. 바알은 우리가 그것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들에 전적으로 몰입하게 합니다. 그리고 물론, 그것은 놀랄 만큼 성공적입니다. 바알 제사장들은 야훼를 따른 무리들보다 20:1로 더 많은 수의 대중을 모을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성(性)이 있었고, 흥분이 있었고, 음악이 있었고, 황홀경이 있었고, 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훼 신앙은 피비린내 나는 대속의 죽음의 현장과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인간의 본성과 욕구를 만족시키는 것이 바알입니다. 그래서 너무도 쉽게 무릎을 꿇게 됩니다. 지금 이 땅에도 바알 신앙이 있습니다. 크리스천의 마음속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바알 사상이 침투해 오고 있습니다. 위기의식을 느껴야 됩니다.

 바알 사상은 가마솥에 빠진 개구리처럼 온도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전혀 우리에게 거부감은 주지 않고 우리 속에 찾아와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즐기라고 부추깁니다. 본성에 충실하고 감성에 충실하라고 부추깁니다. ‘네 생각이 정답이야. 네 의지대로 해.’ 라고 말합니다. 그러다 보면 가마솥의 개구리처럼 언제 죽는지도 모르게 죽게 됩니다. 

2.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
 이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으로 남아 있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4절로 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아멘. 깨어 정신을 차리는 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이 될 것입니다. 자기를 돌아보고 정신을 차리는 것입니다. 미지근한 믿음에서 돌아서야 됩니다.
 
 1)은혜를 회복해야 합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은혜를 회복하자.”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이 되려면 은혜를 회복해야 돼요. 주일 예배가 기다려지는 사람은 은혜 받은 사람이에요. 수요예배도 기다려집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으로는 부족해서 TV로 설교 말씀 들어요. 은혜가 회복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리야 시대 최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제단이 무너진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는 은혜는 예배를 통해서 은혜가 임하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가 회복될 때 은혜가 회복됩니다. 예배가 회복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배를 드리는 것이에요. 예배를 바르게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횟수를 늘리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는 거예요.

 은혜가 충만했던 초대교회는 날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날마다 모여서 말씀 나누고 큐티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도 큐티집이 500권정도 왔어요. 매일 매일 큐티 하는 삶을 사기시를 바랍니다. 은혜를 사모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영국은 국민의 70%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지만 예배가 없다고 합니다.  결국 힘을 잃은 영국은 선교하던 나라에서 이제는 선교대상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슬렘은 300%나 증가하고 있는데 몇 년 사이 영국교회는 8000개가 문을 닫았답니다.

 내일부터 우리교회 부흥회입니다. 부흥회가 되면 목회자는 기도가 간절해집니다. 왜 시대가 이렇게 변했을까요? 정말로 좋은 강사를 모셔놓고도 성도들이 모이질 않아서 기도합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이 진실로 은혜를 회복하기를 원합니다. 세상의 즐거움, 세상일의 바쁨에서 한 발 나오세요. 운동 때문에, 모임 때문에, 학원 때문에,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집회에 불참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부흥회 기간에 마음을 열고 은혜 받을 준비를 할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듣는 길이 은혜 받는 길이요, 그 말씀대로 사는 길이 세상을 이기는 길인 줄로 믿습니다.

 말세가 되다보니까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자들의 습관과 같이 모이기를 폐하는 거예요. 은혜의 회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서 부터 이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TV를 통해서 명강사를 통해서도 은혜를 받지만 전화가 오면 전화도 받아야 되고, 누가 오면 나가봐야 되고, 집중하지 못합니다. 오늘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까지 한 두 시간 전부터 준비한 줄로 믿습니다. 그것이 모두 예배인줄로 믿습니다. 준비를 하고 이 시간에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과 아무런 준비 없이 소파에 누워서 TV를 통해서 은혜를 받는 것은 다릅니다. 예배 횟수를 늘려 가십시오. 매일 예배가 될 수 있도록 늘려 가셔야 됩니다.

 2)우리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따라해 보실까요. “나를 창조하신 목적대로 살겠습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목적대로 살아가겠다는 결심이 설 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칠천 명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내 목적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멘.

 공부하는 사람도 자기 자신을 위해 공부하는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남을 위해서 공부해야 돼요. 사업을 하는 사람도 남을 위해서 사업을 해야 돼요. 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아니라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날 맥없이 힘없이 바알에게 무릎 꿇는 크리스천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 같은 자들을 찾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을 하나님께 보여 드리십시오. 내 믿음은 세상을 이긴 믿음이라고 하나님 앞에 증명해 보이십시오.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로마서 11:3~4
11장
3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4 저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뇨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교회홈페이지제작
대용량동영상서비스
무료SMS솔루션
QT나눔
신앙도서
온라인성경
크리스찬
연합신문
성경타자
설교방송
CCM 방송
성경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