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파의 절대성 (눅 4:42-44)
할렐루야!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아로새겨 질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제목을 다 같이 읽어보실까요. “복음전파의 절대성” 복음이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경로를 살펴보면 다른 어떤 나라보다 독특하고 특별한 은혜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에 그리스도인이 생겨나게 된 것은, 물론 나중에는 외국인들이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기도 했지만 최초에는 외국에서 선교사들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이 만주를 갔다가 그곳에서 선교사님을 만나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고 그 분들이 들어와서 이 땅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서 상윤, 서 경주 형제는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만주 땅에 갔다가 장티푸스에 걸렸습니다. 형제는 그 곳에서 멕켄타이어와 존로스를 만나 그들의 도움을 받아 장티푸스를 치료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접하고 훈련받아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해에 13명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복음은 이처럼 처음부터 입술을 통해서 전해져 왔습니다.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질문해 볼까요? 예수 믿는 나의 삶이 아주 성실하고 모범적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입을 열어서 이웃에게 예수 믿으라고 한 마디도 전하지 않는다면 나의 행실만 보고 복음이 전파될까요? 전파되지 않습니다. 전도는 입을 열어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행실은 엉망인데 입으로 전도만 하면 되느냐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은 입을 열어 말로 전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나의 행함이 조금 부족하다 할지라도 말로서 복음이 전파되면 로마서 1장17절에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고 하신 말씀처럼 복음이 전파될 때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믿음이 생겨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의 암흑과도 같은 이 땅에 처음 복음이 전파되었을 때 우리는 누가 그것을 믿었을까 생각하겠지만 복음이 전파되니까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많은 배척과 학대가 있었지만 복음은 누구도 막을 수 없는 강력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이 땅에 전파된 지 120년 만에 1천만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복음을 듣지 못했거나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전도하여야 하며 해외에서는 선교하여야 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는 일을 하셨지만 아울러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여러분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해 볼까요? 이런 상황을 생각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어요. 그러면 병 고침 받은 자체만을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을까요? 구원 받을 수 없어요. 교회에 나와서 병 고침을 받았다할지라도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어요. 병을 고침 받는 것과 복음을 영접하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이 귀신 들렸다가 그것에서 해방을 받았다면 그 자체만을 가지고 구원 받습니까?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야 구원받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1. 말로 하는 전도
그러기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구원을 받게 되는 과정에는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말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축복이요 입을 열어서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한 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서 상윤, 서 경주 형제는 권력가도 부자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전한 것 때문에 역사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명예가 빛나게 되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입술을 벌려서 복음을 전할 때 영혼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이름이 별과 같이 빛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이 형통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육 간에 축복을 누리게 될 줄로 믿습니다.
행함으로 모범을 보여서 전도를 해야지 말만 가지고 전도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 이렇게 묵상해 보았습니다. 창세기 39장을 보면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가 됩니다. 그의 삶이 너무나 훌륭해서 주인 보디발이 그를 총무로 맡기게 됩니다. 곳간의 열쇠마저 요셉에게 맡길 정도였으니 얼마나 대단한 신임을 얻은 것입니까? 요즈음으로 말하면 은행 통장과 도장 그리고 비밀번호까지 다 맡긴 것입니다. 요셉의 삶은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으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이 있습니다. 요셉을 그렇게까지 신뢰했던 보디발은 하나님을 믿었을까요? 요셉의 삶이 뛰어났지만 과연 요셉의 삶 때문에 보디발이 애굽에서 섬겼던 각종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겼을까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황을 보면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고 봅니다. 요셉은 성실한 삶은 살았지만 보디발에게 하나님을 소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바른 삶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입을 열어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전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성실해도 나를 믿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전하는 것은 온전하다는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이 문제 있고 연약한 자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나 같이 성질 더럽고 못난 사람도 예수 믿고 구원받았어. 그러니 너처럼 훌륭한 사람은 더 쉽게 구원받아.” 아멘.
예수님을 전하는 것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에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 다 다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컵 속에 좋은 물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을 때 아멘하고 순수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믿을 수 없는데 성분이 뭐야? 어떻게 제조했지? 누가 가져다 놓았어? 약을 넣은 것을 아닐까?” 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단순한 사람에게는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고 말하면 아멘하고 받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도대체 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질적으로 의심이 많은 사람도 있습니다. 복음은 어떤 사람에게는 단순하게 전해도 전파되지만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에 대해서 충분하게 이해하고 잘 설명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복음의 내용이 성경입니다. 복음을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여러 모양으로 소개한 것이 성경입니다. 성경을 간략하게 줄인다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의 지옥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해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고 저가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으므로 누구든지 이 사실을 믿는 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어 영원한 천국영생을 회복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한 구절로 요약한 것이 요한복음 3장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렇게 복음을 간단하게 설명해도 아멘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되는 사람도 있기 때문에 더 구체적이며 자세한 설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이웃에게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려면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아야 됩니다. 여러분이 처음 교회에 나와서 예수님에 대해서 들은 것이 매우 단편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자꾸 말씀을 듣고 훈련을 받음으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이 점점 많아지면서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여러분의 마음속에 생기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은 예수님을 모르기 때문에 못 믿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에 못 믿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해주면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충분한 정보를 제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10년, 20년, 30년 예수를 믿었음에도 예수님에 대해서 충분히 소개할 수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믿는 성도들의 약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내가 훈련 받아서 잘 전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훈련을 받아도 안 되고 힘든 사람은 잘 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불신자를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훈련 받아서 잘 전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훈련 받고 충분하게 예수님을 설명해서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시키는 역사적인 일들이 여러분의 삶에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성도들은 복음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문학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에서 출발합니다. 이것을 부정하면 복음은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 사람은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사야 43장 7절 말씀입니다.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어쩌다가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의 후손들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줄로 믿습니다.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실 때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보내주신 줄로 믿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며 죄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순종의 법을 제정하셨습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과일을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과만은 먹지 말도록 하셨습니다. 왜 선악과를 만드셨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지만 피조물인 우리는 순종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불순종하여 에덴에서 추방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죽음의 형벌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이렇게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어떤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도를 닦아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리 하면 되겠는데, 또 인격을 수양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다면 인격수양을 하면 되겠는데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절망적인 존재입니다.
네 번째로,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것입니다. 그 독생자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십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왜 이리 예수 믿는 것이 복잡합니까? 하나님이면 하나님이고 사람이면 사람이지 어떻게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십니까?”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야만 했을까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십니다. 죄가 없으신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대신할 수 있습니다.
또 왜 예수님은 사람이셔야만 합니까? 하나님은 죽으실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기 위해서 육신을 입으신 것입니다. 이런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은 아들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줄로 믿습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보배롭고 산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휘장가운데로 열려진 시온의 대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의 길, 영생의 길, 축복의 길, 생명의 길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열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다섯째, 문제는 우리의 선택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내가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일어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우리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아니하든 상관없이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구원의 길을 아멘하고 가면 구원받는 것입니다. 저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을 것이며 저를 믿지 않는 자는 믿지 않았으므로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혹자는 자기가 몰랐던 일이기 때문에 동의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역사는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경부고속도로가 뚫린 것에 대해서 무조건 동의해야 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열어놓으신 십자가의 길은 인정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있는 것입니다. 인정하면 믿고 그 길을 가는 것이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 선택을 가리켜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나의 주인으로 영접한다고 말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선택이 우리가 구원받는 결정적인 증거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종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종은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주인이 보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죄 값을 돈으로 다 치루고 그 종을 샀습니다. 주인은 종에게 말합니다. “너는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었지만 내가 너는 샀으니까 이제 너는 나를 따라야 된다.” 그러자 종은 “예, 감사합니다. 내 죄로 인해서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돈을 주고 사셨으니 이제부터 당신은 나의 주인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이와 같은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죄로 인해서 죽을 죄 값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주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것입니다.
영접이라는 것은 어찌 보면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대단히 어려운 일 일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종이 주인을 영접한 후에 불과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힘들어서 종노릇을 못하겠다고 한다면 정말 그 종이 주인을 주인으로 모셔 들인 것입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영접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셨고 내 생명을 대신해주셨으니까 이젠 나도 내 생명을 예수님을 대신해서 드릴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이미 죽었던 목숨입니다. 나를 살려주신 주를 위해서 나는 어떤 고난도 피하지 않겠습니다.’라는 고백 인줄로 믿습니다.
복음은 결코 싸구려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어 놓으신 생명의 길은 대가를 지불하시고 열어놓으신 복음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으셨습니까? 얼마나 많은 채찍을 맞으셨습니까? 온갖 고난을 받으시면서 열어놓으신 길이 구원의 길이요 복음의 길 아닙니까? 오늘 우리가 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서 조금 힘들다고 예수님을 놓아버리고, 조금 바쁘다고 예수님을 멀리한다면 이것이 정말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셔 들인 것인가요? 여기에는 의문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복음에 감동해서 어떤 고난이 와도 고난을 피하지 않고, 심지어는 죽음조차도 피하지 않고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나아가는 믿음을 보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에 목숨을 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삼년쯤 다니면 땅도 사고 부자 된다고 생각하고 교회에 나왔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면 예수 믿는 것에 목숨 걸 일이 있겠어요? 당연히 없지요. 예수 믿는 것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당장에 치워버립니다. 이런 사람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에요.
저는 어제 이런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어찌 저 북한을 이대로 내버려두십니까? 언제까지 북한에 있는 사랑하는 동포들을 고통가운데 남겨두시려 하십니까? 불쌍한 저들도 자유롭게 예수를 믿어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 동족을 구원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악한 정권에 의해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왜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런 마음의 감동을 주셨습니다. ‘거기에서 정해진 순교자를 얻기 위함이다.’ 꼭 그러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북한에서 얻으실 만한 숫자의 순교자를 얻으시려고 이렇게 내버려두시는가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복음은 놀라운 것입니다. 복음을 깨닫게 되면 순교를 당하면서 까지도 지킬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이해하고 전할 수 있는 실력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전도폭발훈련을 합니다. 전도폭발은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이웃에게 그것을 전할 수 있을 것인가를 훈련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입술을 통해서 이 복음이 다른 믿지 않는 이에게 끊임없이 전파되어 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2. 삶으로 전도
여러분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선한 삶을 산다할지라도 우리의 삶을 통해서 복음이 전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렇게나 사는 삶의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선한 삶을 사는 모습을 보이면 더 쉽게 전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착한 행실이 복음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혹 내가 인격적으로 부족하다할지라도 복음은 복음자체로서 능력이 있기 때문에 그 복음을 듣고 깨닫는 자가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주변에 너무나도 신실하고 모범적인 삶을 사는 크리스천이 있어서 그 사람 때문에 교회에 나오게 되었다 할지라도 정작 그가 구원 받을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은 복음을 들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이 엉망이면서 무슨 전도를 하냐고 말하는 것은 사단이 숨겨놓은 올무입니다.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입을 벌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내 남편도 전도 못했는데 내가 누구에게 전도를 해.’라고 말하지만 이것도 사단이 숨겨 놓은 함정입니다. 물론 그 남편도 언젠가는 구원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혹 내 남편을 구원하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혹 내 자녀가 구원받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올무에 매이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7장 19절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며 실상입니다. 따라서 선을 행함으로 복음이 용이하게 전파되도록 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내가 선을 행치 않았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복음의 능력을 무시하는 태도가 되는 것입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복음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성숙하면 성숙한대로 복음전하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우리의 인격과 상관없이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되면 성령님께서 일하십니다. 복음은 복음 자체로 생명력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전하는 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혼을 구원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복음은 말로서 전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복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때문에 복음 훈련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복음이 복음 되게 하기 위해서는 착한행실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복음에 대한 신뢰도를 높일 수 있습니다. 요셉처럼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복음의 통로가 될 줄로 믿습니다. 오직 복음만이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한 동네에 머무르신 것이 아니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신 것처럼 우리도 한 사람이 아니라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니까 이런 반응이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또 어떤 이들은 ‘맞는 말은 같은데 다음에 보자.’ 라고 말하지만 어떤 극소수의 사람들은 ‘예, 영접하겠습니다.’ 하고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해서 모든 사람이 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중에 몇 사람이라도 이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전도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습니다. 직장에서, 이웃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해서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게 되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4:42~44 4장 42 날이 밝으매 예수께서 나오사 한적한 곳에 가시니 무리가 찾다가 만나서 자기들에게서 떠나시지 못하게 만류하려 하매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로 보내심을 입었노라 하시고 44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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