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함을 받으라 (눅 5:12-16)
필리핀 소록도라고 할 수 있는 나환자촌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필리핀 사람들도 나병을 얼마나 부정하게 생각하는지 필리핀 사람들마저 외면했는데 다행이도 한국인 선교사가 그곳에서 나환자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나병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나환자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서 염려를 했습니다. 특히 나병환자들과 악수를 한다든지 신체적인 접촉을 했을 때 안 보이는 곳에서 손을 씻기도 하였습니다. 제에게 나병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나타난 행동이었습니다.
나병은 문둥병이라고도 하고 한센병이라고도 합니다. 나환자들은 문둥병 혹은 나환자라고 부를 때 모욕감을 느끼기 때문에 한센병이라고 불러주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제가 나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성경에 나병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나병은 포괄적인 의미의 피부 질환을 의미합니다. 또한 성경에서 나병은 전염이 잘 되는 부정한 질병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항생제가 개발되기 수천 년 전의 상황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레위기 13장 45절로 46절에는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나병 환자라 부정하니 제사장이 그를 확실히 부정하다고 할 것은 그 환부가 그 머리에 있음이니라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또 민수기 5장 1절로 4절에는 부정한 사람의 처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모든 나병 환자와 유출증이 있는 자와 주검으로 부정하게 된 자를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되 남녀를 막론하고 다 진영 밖으로 내보내어 그들이 진영을 더럽히게 하지 말라 내가 그 진영 가운데에 거하느니라 하시매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그들을 진영 밖으로 내보냈으니 곧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행하였더라”
오늘날 나병은 발병하더라도 약을 먹으면 다른 사람에게 균을 옮기지 않으며, 성적 접촉이나 임신을 통해서도 감염되지 않습니다. 아직까지 나병은 제3군 법정전염병으로 지정돼 있지만 격리가 필요한 질환이 아니며, 병형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꾸준히 약을 먹으면 완치도 가능합니다. 더더욱 나병은 유전병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나병이 저주의 상징으로 언급되기도 하고 영적으로 죄를 의미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전병으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나병은 단지 균이 체내에 들어와 발생하는 감염성 질환일 뿐입니다.
레위기 13장 12절로 13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그가 진찰한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또 사무엘하 3장 28절로 29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후에 다윗이 듣고 이르되 넬의 아들 아브넬의 피에 대하여 나와 내 나라는 여호와 앞에 영원히 무죄하니 그 죄가 요압의 머리와 그의 아버지의 온 집으로 돌아갈지어다 또 요압의 집에서 백탁병자나 나병 환자나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나 칼에 죽는 자나 양식이 떨어진 자가 끊어지지 아니할지로다 하니라”
보통 나병이 걸리면 환자를 격리수용하는데 이것을 불법이라 하여 일본에서는 국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해서 승소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1931년 모든 나환자를 격리수용하였고, 48년에는 나환자는 아이를 못 낳게 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제하의 격리정책에 따라 1916년에 소록도병원을 개설해 집단 수용하였고, 60년대에 들어 전염성이 없는 음성 환자를 귀가시키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사람은 자립 정착을 시켜왔지만 격리피해는 말할 수 없이 많았습니다.
성경에는 나병은 불치의 병으로 인식되었기에 저주의 상징이 되었고 불결한 병으로 여겼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서운 병이었습니다. 따라서 나환자는 가정과 사회로부터 격리되었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가장 천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일단 나병에 걸리면 사람과 접촉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게 되면 ‘나는 부정하다.’라고 자신이 나병인임을 외쳐야 했습니다. 그렇지 하지 않고 나병이 발견되면 돌로 쳐도 상관이 없습니다. 따라서 나병의 고통은 육체적인 고통보다 정신적 사회적 고통이 더욱 큰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문둥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신 것입니다.
1. 온몸에 나병 들린 사람
오늘 말씀을 보면 부정함의 대명사로 여겨진 나병환자가 그것도 온 몸에 나병이 걸린 사람이 예수님께로 나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엎드려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깨끗하게 하실 것을 요청합니다. 환자도 자기가 부정해서 병에 걸린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깨끗하게 되면 고침을 받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나병은 부정한 자에게 걸리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웃시야왕이 제사장만 드려야하는 있는 제사를 자기가 드리겠다고 교만해질 때 하나님께서는 나병을 발하게 하셨습니다. 또 모세의 누이 미리암도 모세를 비난하는 일을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녀를 나병에 걸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잠시 나병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병이 육체가 부정하였기에 걸렸다면 육체의 부정보다 더 위험한 마음의 부정으로 인한 마음의 나병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혼의 부정으로 인한 영혼의 나병도 있습니다. 현재 나병은 100만 명당 1.2명이 발생되고 있다고 하니 어찌 보면 육체의 나병은 우리 주변에서 거의 자취를 감춘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육체의 나병은 희귀병이 되었지만 정신적인 영적인 나병이 온 세상에 만연한 것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은 육신의 나병에 걸린 사람이지만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가운데 정신과 영혼이 온통 부패하여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나병에 걸리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 사실 육체의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마음의 병입니다. 육체에 나균이 흘러서 부패해졌다면, 정신에 부패한 정신이 흐른다면 이것은 정신적인 나병이 아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4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악한 마음이 문제입니다. 마음이 악으로 오염되어 있으면 이 사람은 영적인 나병환자입니다.
주님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문제로 인해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장 18절로 23절입니다.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그렇습니다. 진실로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더러운 음식도 아니고, 더러운 육체도 아니고 더러운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와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런 정신적인 더러움보다 더 심각한 것은 더러운 행동을 하면서 더러운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병환자가 나는 부정하다고 외치는 것처럼 자신의 행동이 부정한 것을 깨달아야 부정함을 고칠 수 있는데 자신의 부정을 모르기 때문에 부정을 고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병에 걸리면 흔히 보이는 증상이 있는데 첫째는 지각상실이라고 합니다. 나병에 걸리고도 처음에는 나병에 걸린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 채로 몇 년을 지나다가 자신이 나병에 걸린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마치 죄인이면서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말라기 1장 6절로7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서도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하였다고 하느냐고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자 선지자는 눈먼 짐승이나 다리를 저는 짐승이나 온몸이 병들어서 죽게 된 짐승을 가져다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합니다. 이것처럼 멸시하는 행동을 하고도 본인이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나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공통된 증상이 있다면 죄를 지각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죄를 물먹듯 마시면서 죄를 짓고 있다고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모든 것을 합리화시켜버립니다. 변명하면서 죄를 죄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죄를 짓고도 깨닫지 못하면 얼마나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진작 깨달으면 그런 어려움은 오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선지자는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지만 백성들은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부요해졌다고 여기며 듣지 않습니다. 그 결과 예레미야 52장 28절로30절을 보면 유다 백성들이 3차례에 걸쳐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1차로 3,230명이 포로가 되어 잡혀갑니다.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가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왕으로부터 모든 백성이 금식해야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지자에게 주시는 음성을 들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깨닫지 못하자 2차에 830명이 잡혀갑니다. 그런데도 깨닫지 못하자 마침내 바벨론의 대규모 침공으로 인해 예루살렘성은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 파괴되고 성전의 기구들 또한 모두 파괴되거나 탈취되고, 힘 있는 사람과 배운 사람은 다 포로로 잡아가고 가난하고 병들고 문제 있는 자만 남겨둡니다.
그리고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어떻게 됩니까? 시드기야의 아들은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당합니다. 유다의 고관들을 왕이 보는 앞에서 다 죽입니다. 그리고 시드기야의 두 눈을 빼고 놋 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가서 옥에 가두었습니다. 그제야 저들은 ‘우리가 우상숭배 했구나. 하나님 앞에 범죄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지적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심판을 경고하지만 깨닫지 못하고 마침내 멸망당하는 것을 보면 이것이 영적인 문둥병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편 49편20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존귀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적인 나병에 걸려서 지각을 상실하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죄를 짓고도 죄인지를 모르고 불순종하고도 불순종인 것을 모르고 하나님을 아프게 해드리고도 아프게 해 드린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특징은 감각마비증상입니다. 감각기능이 마비되어 손가락 또는 사지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증상입니다. 썩어도 썩는 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 전혀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타락을 향해 나가고 있으면서 타락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나병의 증상입니다. 주님께서도 말세의 현상으로 무감각을 마태복음 11장 17절에서 이렇게 지적하셨습니다.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설교를 들어도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인을 보내도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렇게 되면 처참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됩니다.
출애굽 과정에 고집을 부리다가 10가지 재앙을 만나는 바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사람이 어디까지 무감각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9번째까지 내린 재앙이 얼마나 참혹한 재앙입니까? 얼마나 많은 가죽이 죽었으며 고통이 심했습니까? 백성들은 재앙으로 인해 무수한 손실을 입었습니다. 그럼에도 바로는 끝까지 무감각합니다. 감각이 둔한 사람이 고집부립니다. 영적으로 감각이 둔하면 매를 맞으면서도 고개를 빳빳하게 듭니다. 무감각한 사람은 남을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무감각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에 불순종합니다. 결국 바로는 장자를 죽이자 손을 들고 말았지만 감각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처참한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감각을 상실해가고 있습니다. 죄에 대한 감각이 없어져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일을 성수하지 않는 것에 대해 죄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주일 성수를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거나 여기지 않는 것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주일 성수를 하지 않는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 것은 영적인 감각이 둔해진 것입니다. 십계명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하나님 앞에 두렵고 부끄러워져야 하는데 전혀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마음에 아무런 감각이 없습니다. 이런 현상들이 영적인 무감각증, 영적인 나병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죄의 개념이 분명합니다. 죄를 신속하게 깨닫습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죄에 대해서 예민한 사람은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것까지도 죄로 느끼고 그것 때문에 애통해 하고 무릎 꿇고 주님 앞에 나아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영적인 나병의 증상인 지각없음과 감각 없음에서 깨끗함을 받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각이 살아나야 됩니다. 감각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깨끗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까? 따라해 보실까요. “예수님께로 나와야 합니다.”
2. 깨끗함을 받으라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나와 무릎을 꿇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게 하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면서 말씀하시자 깨끗함을 받았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나병이 떠나니라.” 영적으로 어두운 이 시대에는 어떤 죄도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자기 아내를 두고 다른 여자와 연애를 하면서도 그것을 죄로 여기지 않고 자기감정에 충실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혼탁해서 죄를 죄로 깨닫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미사어구를 동원해 미화시켜버립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깨끗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면 지각이 살아납니다. 감각이 살아납니다. 그래서 회복됩니다. 죄를 발견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게 됩니다. 또한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됩니다. 이것이 나병에서 깨끗함을 받는 모습입니다. 주님을 만나면 내가 보입니다. 나의 죄성이 드러납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면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예배도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기도도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큐티를 통해서 날마다 새롭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을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서면 나의 더러운 것들이 추한 모습들이 자꾸만 비추어져서 씻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생명의 샘가 호세아서 묵상이 끝나고 스가랴서 묵상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말씀가운데 네 뿔 달린 짐승의 뿔을 하나님께서 대장장이를 통해서 없애버리겠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저는 문학적으로 역사적으로 깊게 생각하지 않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인간이란 다 뿔이 달린 존재이구나. 나도 뿔이 있구나. 그 뿔이 뭘까? 나에게 주신 건강, 지혜, 능력, 물질, 내가 할 수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들이 뿔이구나. 이 뿔을 조심해야겠구나.’
시골에 가면 소나 염소를 봅니다. 이 동물들은 평상시에는 온순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면 뿔을 들이댑니다. 제가 어렸을 때에 집에 소가 있었습니다. 뿔이 있어도 순한 소는 뿔을 그냥 내버려두지만 뿔을 가지고 힘들게 하는 소는 뿔을 자르고 지져버립니다. 뿔이 잘려진 소는 힘을 못 씁니다. 이 모습을 연상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래 내가 문제만 생기면 나에게 있는 뿔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구나.’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서는 대장장이를 통해서 이 뿔을 잘라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저도 하나님 말씀 앞에 섰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말씀 앞에 서야 됩니다. 그것이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나병 환자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처럼 우리도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여 말씀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오늘 저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를 원하십니까?’하며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의 말씀 속에서 위로하시는 음성을 듣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책망을 받기고 하고 경고를 받기도하고 훈계를 받기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나를 교훈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책망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바르게 합니다. 그 말씀이 나를 의로 교육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를 온전하게 이끌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치유가 일어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면 남의 결점이 안 보이고 내가 보입니다.
묵상을 하면 할수록 심령이 예민해집니다.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심연에 감추어진 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령님께서 지적하시는 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 주님께로 나가야 합니다. 온 몸에 나병 들린 자가 예수님께로 나가 무릎을 꿇은 것처럼 말씀을 가지고 묵상의 자리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복잡하고 시끄러운 자리를 피하십시오. 잠깐 TV를 끄십시오. 그리고 생명의 샘가를 펴고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말씀을 묵상해야 됩니다. 그리고 세밀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럴 때 우리는 깨끗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나병 들린 사람을 나와 상관없는 자로 여기지 마십시오. 따라해 보실까요. “그가 나입니다.” 어찌 보면 그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병 걸린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는 내가 영적인 나병이 걸렸음에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 달에 한번이나 몇 달에 한번 목욕을 한다면 얼마나 힘들고 더럽겠습니까. 그러나 매일 아침저녁으로 씻으면 얼마나 깨끗합니까. 이것처럼 매일 주님 앞으로 나아가서 내게 주신 말씀으로 우리의 영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씻고 내 안에 정결한 마음을 주시고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고침 받은 나병환자처럼 날마다 주님 앞에 설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5:12~16 5장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문둥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문둥병이 곧 떠나니라 14 예수께서 저를 경계하시되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또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대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셨더니 15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 오되 16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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