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받는 믿음 (눅 5:17-26)
이 시간에 예배하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영혼의 치유, 내적인 치유, 육신의 치유가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제가 늘 기도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 영혼의 치유를 간구합니다. 범사가 잘 되는 내적인 치유를 간구합니다. 강건하기를 원하는 육신의 치유를 간구합니다. 이것을 전인격적인 치유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건강에 대해서 참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이 중요하다보니 건강을 잃으면 다 잃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말이 맞는 말인가요? 물론 육신이 보는 세상의 기준에서 보면 건강을 잃어버리면 다 잃어버린 것입니다. 부를 얻었다할지라도 건강을 잃어버리면 그 부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명예를 얻었을지라도 죽음 앞에 놓여있다면 그 명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기준에서 말하면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건강을 잃는다고 해서 다 잃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받으면 영원한 영생천국에 들어가기 때문에 다 잃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건강에 관심을 갖다보니 건강에 관련된 잡지나 책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의 경우에는 교회의 부흥 요소로서 건강프로그램을 다루고 있다고 합니다. 건강세미나를 연다든지 건강관리프로그램을 제공해서 전도의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에는 문제점도 있습니다. 건강문제에 집중하다보니 복음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생겨나기 때문에 교회가 복음 전하는 곳인지 건강관리센터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경우가 생겨난다고 합니다. 주객이 전도되는 이런 현상은 사람들이 건강에 대해 관심이 많아서 생겨난 현상입니다.
아울러 사람들은 치유에 대한 관심도 많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교회에 대해서 이런 소문을 듣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어느 교회에 가니까 난치병자가 고침을 받았다고 하더라. 그 목사님이 능력이 있다고 하더라.’ 그래서 난치병자가 고침을 받게 되면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교회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또는 병원에서 고치지 못하여 포기상태가 되었을 때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이럴 때는 참 안타깝기도 합니다. 병원에도 너무 늦게 가면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처럼 교회에도 너무 늦게 오면, 복음을 들을 만 한 인지의 능력도 상실한 상태에서 교회에 나오면 참 안타깝습니다. 교회에 찾아온다고 해서 병든 자들이 다 고침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실 때에 병든 자를 고치셨고 또 병든 자가 치유 받을 것이라고 성경에 약속하셨기 때문에 교회는 치유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치유의 복음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 가운데서 진정 치유가 일어나는 성도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치유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치유란 병을 고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육체의 질병을 치유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육체의 질병이 치유 받는 것은 극히 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빙산의 일각입니다. 치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영적인 치유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근본치유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내적치유입니다. 육신의 질병보다 더 무서운 것이 감정적인 상처로 말미암아 생기는 문제들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치유가 있습니다. 요한 삼서 1장 2절“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라는 말씀처럼 영, 혼, 육의 치유가 온전하게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이루어지게 될 때 기쁨과 감사와 행복이 넘쳐나는 신앙생활이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치유는 목회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치유가 없는 목회는 목회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목회의 목표를 치유라고 생각합니다. 이 말을 오해해서 ‘목사님이 안수하면 다 고침 받나?’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육체의 질병만을 치유하는 것에 기준을 두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영적인 치유에 중점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죄인이 복음을 깨닫고 예수님을 영접하므로 하나님과 원수관계였던 자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이 이루어지는 것을 뜻합니다. 목회는 영적인 치유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치유는 눈에 드러나지 않는 빙산의 아랫부분과 같은 것이지만 이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영적인 치유는 영원한 치유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이 관계는 영원한 것입니다. 혹 실수를 한다할지라도, 혹 죄를 범한다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는 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치유는 치유를 받았다할지라도 또 다시 병듭니다. 그러나 영적인 치유는 한번 받으면 영원토록 그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 세상을 떠난다 할지라도 영적으로 치유 받은 것은 절대로 해를 받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치유가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육체적인 치유만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영적인 치유가 일어나면 내적인 치유도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영원한 소망이 있지 않습니까? 예수그리스도의 능력, 성령의 도우심을 받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내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상처를 받습니까? 무엇 때문에 미워합니까? 무엇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이러한 것들이 영적으로 치유되지 못했기 때문에 내적으로 상처가 있는 것입니다. 내적으로 상처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를 입혔다할지라도 구원 받아서 허다한 죄를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손해를 입은 그것 때문에 크게 상처가 되지도 않고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우리는 일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 누가 나에게 손해를 끼친 것은 일백 데나리온도 안 되는 지극히 적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치유가 일어나면 내적인 치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내적인 치유가 일어나니까 육체적인 치유도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상한 감정들이 치유되니까 그것으로 말미암아 생긴 병들이 자연적으로 치유되어지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늙기 때문에 생기는 병은 어쩔 수 없지만 일반적인 병 가운데는 상당한 부분들이 내적인 문제 때문에 생기는 병들이 많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분노, 끓어오르는 화가 많은 분들은 질병에 걸리기 쉽습니다. 내과 전문의에게 물어보니까 소화기계통 질환의 70%정도는 마음의 문제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속 끓이고, 상처받고, 미워하고, 분노하고, 잠 못 자서 생긴 병들은 이러한 내적인 원인만 해결되면 병이 낫는 것입니다. 또 내적인 문제로 인해서 심혈관질환도 생긴다고 합니다. 혈압이 올라가기도 하고 혈관이 터지지도 합니다. 맥박이 불규칙하게 뛰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감정의 문제입니다. 내적인 상처가 계속 지속되어질 때 육체의 질병으로 오는 것입니다.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면 육적인 질병도 상당부분 치유될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치유를 받으면 내적인 치유도 이루어지게 되고 내적인 치유가 이루어지게 되면 육체의 질병도 치유되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내가 예수님을 만나서 영적인 치유를 받았고 내적인 치유를 받았으니까 모든 육체의 병은 다 고침 받는다.’ 이 말은 아닙니다. 육체의 병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다 고침 받는다는 것은 아닙니다.
치유 중에서 가장 중요한 치유는 영적인 치유입니다. 이런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해결하지 못했지만 내적치유를 하는 단체에 가서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사랑의 말, 용서의 말, 품어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 순간은 치유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내 또 다른 상처를 받게 되면 다시 원 위치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영적인 치유 없는 내적인 치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것 뿐 입니다. 지속 될 수가 없습니다. 영적인 치유가 일어나고 내적인 치유가 일어나야 내적인 치유가 지속적으로 치유가 되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지 못했는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는데, 진정으로 용서 받은 것이 없는데 누구를 용서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를 경험해야 남을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적치유의 문제는 용서의 문제입니다.
1. 협력하는 믿음
이런 기준에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보면 중풍병자는 영적인 치유가 먼저 일어났습니다. 먼저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동시에 내적인 치유가 일어났습니다. 버림받았다고 생각한 중풍병자가 주변으로부터 사랑받으니까 내적치유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의 질병인 중풍 병에서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완전한 치유가 일어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모든 분들이 영적인 치유, 내적인 치유, 육적인 치유를 온전히 이룰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가 온전한 영적, 내적, 육체적 치유를 받게 되는 과정에서 그가 치유 받게 되는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따라해 보실까요. “협력하는 믿음” 중풍병자기 스스로 예수님 앞에 나가서 고침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그가 예수님께 나아갈 수 있도록 주변에서 협력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중풍병자가 고침 받는 것은 자기 믿음 때문이 아니라 주변에서 협력해주는 협력하는 믿음 때문에 낫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 가운데 ‘나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교회에 나왔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분계십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부모님의 도움을 받든지, 친지의 도움을 받든지, 친구의 도움을 받든지, 누구의 도움이라도 받았으니까 우리가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스스로 교회에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풍병자는 뇌에 출혈이 생긴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마비가 된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전신마비 환자입니다. 혼자서는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께 나왔겠습니까? 누군가가 도와주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교계에서 발표한 바에 의하면 한 사람이 회심해서 진정한 영적인 치유를 받기까지는 일곱 번의 의미 있는 만남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곱 번의 의미 있는 만남이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그에게 와서 복음을 전해 주었다든지, 누군가가 그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었다든지, 누군가가 물질적인 도움을 주었다든지, 아니면 사랑으로 섬겨주었다든지, 인간관계를 좋게 맺었다든지 등의 의미 있는 만남 일곱 번 이상이 있어서 예수를 믿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즉 혼자 스스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을 받아 주님을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도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어 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친구인지 가족인지 알 수는 없으나 중풍병자를 예수님께로 메어오는 협력이 없었다면 이 사람은 예수님께 나아올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없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는 것이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람이 많아서 예수님께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때 병자의 요청인지 아니면 친구들의 판단인지 누구의 제언인지 알 수는 없으나 병자를 침상 채 지붕으로 들고 올라가 지붕을 뚫어 침상 채 중풍병자를 예수님 앞으로 내려놓은 것입니다. 엄청남 헌신과 협력이 있었습니다. 저들의 협력하는 믿음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칭찬하시면서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선언하시며 중풍병자를 치유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한 사람 한 사람이 구원받는 과정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협력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녀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한다고 말하지만 엄청난 수고와 헌신과 노력과 협력이 있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흑인 성악가 마리아 앤더슨은 평소에 ‘나’라는 말보다 ‘우리’라는 즐겨 썼습니다. 그래서 이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혼자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노래 한곡을 부를 때에도 작곡가가 있어야 하고 피아노 연주자가 있어야 합니다. 들어주는 관중도 있어야 합니다. 그저 나는 작은 협력자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영적 혹은 내적 치유이든 육체적인 치유이든 협력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내적치유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집에서 누가 화를 돋우면 다시 폭발합니다. ‘내적치유 받은 사람이 왜 그래?’ 라는 말에 또 상처 받습니다. 치유 받고 왔는데 또 상처를 준다고 화를 냅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은 이런 말에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네 인생은 치유를 받았어도 또 치유를 받아야 됩니다. 계속해서 치유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는 영적인 중풍병자와 같습니다. 중풍병자가 뇌일혈로 인해서 반신이 마비되거나 전신이 마비된 것처럼 불신자는 생각의 기능이나 영적인 기능이 마비되었기 때문에 스스로 예수님께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주님 앞에 나오고 싶지만 나올 수 없는 영적인 중풍병자 같은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신자가 믿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해도 마음뿐이지 스스로 교회에 나오기가 어렵습니다. 사단이 훼방하고 주변 환경이 힘듭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스스로 나아올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성도님 중에는 이런 분이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고 싶어서 교회 앞까지 왔는데 아무도 인도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 도로 집으로 돌아갔다는것입니다. 이렇게 하기를 몇 번 거듭하다가 교회에 나오게 되었답니다. 여러분! 모르는 분이 교회 앞을 서성이면 얼른 교회로 인도를 하십시오. 스스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도와주고 섬겨주고 끌어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완강하게 끌어 교회로 나오게 하는 것도 그에게는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몸이 아픈 사람은 힘들다고 그대로 내 버려두면 안 됩니다. 아프건 말건 데리고 나와야 됩니다. 그래야 고침 받는 것입니다.
협력을 통해서 중풍병자가 고침 받은 것처럼 오늘 우리도 한 영혼 한 영혼을 이런 협력을 통해서 영적으로 중풍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낼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군가의 협력을 통해서 내가 고침 받은 것처럼 나도 누군가를 치유되게 하기 위해서 협력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목장에서 소그룹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목장 소그룹전도 운동을 하면서 목장에서 서로 ‘그래요. 우리가 한 영혼을 위해서 서로 협력합시다. 아무개 성도를 섬겨봅시다. 아무개 성도를 찾아가 봅시다. 같이 기도합시다.’하고 협력하는 마음을 갖게 되면 영적인 중풍병자 같은 사람을 구원 받게 도울 수 있으리라고 생각됩니다. 협력하는 믿음이 영혼을 구원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행동하는 믿음
중풍병자가 치유를 받은 것은 행동하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행한다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한 두 번은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장애가 생기면 중단해 버립니다. 중풍병자를 침상에 메고 온 자들이 사람들이 많아서 예수님 앞에 갈수 없다고 포기했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중풍병자를 메고 온 것과 지붕을 뚫고 예수님 앞으로 내린 행동을 믿음으로 보신 것입니다. 지붕을 뜯으면 먼지 날 것을 생각하고, 주인에게 욕먹을 것을 생각하고, 변상할 생각을 하면 그렇게 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생각이 그들의 행동을 중지시킬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한 영혼을 살려야 되겠다는 믿음 때문에 행동하게 된 것입니다.
복음이 처음 신의주를 통해 국내로 들어올 때 쪽 복음을 가지고 오다가 세관 수색원들에게 붙들려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런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창호지에 말씀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호지로 끈을 꼬아서 여러 겹으로 줄을 만들어 물건을 묶어서 들여왔다고 합니다. 수색원이 아무리 뒤져봐도 줄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자기고향에 내려가 줄을 풀고 창호지 끈을 풀어서 인두로 잘 다려서 복음을 이웃에게 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안 된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장애를 극복하고 믿음으로 나아가는 행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풍병자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치유를 받는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육체의 치유가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참 중요한 일이지만 이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선적으로 일어나야 되는 것은 영적으로 치유를 받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치유를 받아야 됩니다. 그리고 육체도 치유 받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영적으로나 내적으로 치유를 받지 않으면 육적인 치유를 받았다할지라도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영혼이 잘되어야 범사가 잘되는 순서를 벗어나면 치유의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풍병자는 여러 사람의 협력으로 치유 받게 되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산 증인입니다. 그렇다면 아직 이 자리에 있지 않은 구원받지 못한 영적인 중풍병자들을 우리의 힘과 협력과 행함을 통해서 주님께로 이끌고 나와야 될 것입니다. 주님 앞으로 그들을 이끌 때에 어떤 인적인 물리적인 장애가 있다할지라도 모든 것들을 극복하고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면 주님 만나는 날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입니다. 치유 받는 믿음은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예수님 만나서 온전한 치유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협력하고 행하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5:17~26 5장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 각 촌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나온 바리새인과 교법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 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채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저희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의논하여 가로되 이 참람한 말을 하는 자가 누구뇨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의논을 아시고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 마음에 무슨 의논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저희 앞에서 곧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오늘날 우리가 기이한 일을 보았다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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