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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누가복음 5:33~39 유우열 목사 2010-07-11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눅6:33-39)

 여러분의 삶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것 같은 삶이되기를 축원합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오늘 설교를 들으면서 그 의미가 마음으로 다가오고 마음의 결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사람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모든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는 새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을 기점으로 역사를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B. C와 예수님이 오신 이후의 A. D로 나눕니다. 그러나 새 시대를 여시고 새 언약을 선포하신 예수님을 반대하고 공격하고 모함하고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을 보시며 본문에서 예수님은 주님을 믿고 따라가는 제자들은 어떤 마음과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말씀해주십니다. 바리새인들처럼 살지 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예수님이 사셨던 방법대로 사는 사람을 가리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교훈을 따라 살아가고자 길을 나선 순례자들입니다. 주님은 이런 우리를 가리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은 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시니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세상의 풍습과 전통과 인습에 매여서 살아가는, 하나님께 전혀 영광을 돌리지 못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삶의 모습을 예수님께서는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모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낡은 가죽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게 되면 가죽부대가 터져버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됩니다. 새 포도주는 가스가 발생하기 때문에 새 부대에 담아야 됩니다. 새 부대는 신축성이 좋아서 가스가 발생하면 부대가 늘어나 그것을 수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게 되면 가스가 팽창할 때 그것을 수용하지 못해서 부대가 터져버립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예수그리스도를 믿노라고 말하면서도 삶의 방식은 낡은 가죽부대 같은 방식을 택하게 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폭발하고 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있고 쉬운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서 세상 방법대로 사는 사람들은 갈등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묵은 포도주와 묵은 가죽부대로서의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이 어려운 사람들은 예수는 믿으면서도 세상풍속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에 늘 갈등이 있습니다. 믿음의 성장이 없습니다. 마음에 늘 ‘내가 부족하다.’하는 죄책감과 후회 만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을 따라서 예수님이 원하시는 대로 새 가죽부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신앙생활이 쉽고 늘 감사하는 삶을 삽니다. 신앙생활에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 복된 교회 사랑하는 성도님들은 예수를 믿는다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교훈을 주시게 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시거나 교훈을 하셨을 때에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에 대해서 어긋나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죄 사함을 받았으니라.” 하고 말씀하시면 그들은 참담하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우리는 거룩한 사람들이라 저들과 음식을 먹지 않는데 어찌하여 너희 선생님은 저들과 음식을 먹느냐며 그것을 걸고넘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능력을 행하시면 저가 귀신들렸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든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공격합니다.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자부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셨을 때는 예수님을 배척하고, 비난하고, 정죄하고, 법정에 고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처럼 살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하게 교훈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시비를 걸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몰려와서 예수님께 당신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금식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금식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 그들만의 전통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들이 금식하는 전통을 만들어낸 연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시기 500여 년 전에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멸망당하는 과정 속에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포위된 날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 탄 날을 기억하며 금식했고, 예루살렘 성 벽이 무너지던 날 금식했고, 이스라엘 백성이 포로가 되어서 바벨론으로 잡혀간 날에 금식했고, 총독 그달랴가 피살된 것을 기억하며 금식했고, 성전 포위 개시 일을 기억해 금식했고, 성전 함락 일에 맞추어 금식을 했습니다. 이 외에도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올라간 목요일과 내려온 월요일을 기념하여 금식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더 많이 금식을 했습니다.

 금식을 정한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이렇게 징계를 받으니 다시는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의미에서 정한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이 형식화 되고 의식화되어서 금식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남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정한 그 날에 금식하는 사람은 경건한 사람이고 금식하지 않는 사람은 경건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금식하는 것을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비판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리새인들의 금식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회개하는 경건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식과 자기의 경건을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 과시하는 위선의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외식주의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주님에게 그들의 금식 기준을 가지고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의 제자나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자기들에 세운 경건의 기준으로 주님의 제자들을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태도를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모습들이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이런 모습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기도를 하긴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과 내가 대면해서 기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야.’ 라는 사람의 평가를 받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기도가 소중한 것이라도 사람들로부터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다.’ 라는 평가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것은 외식의 기도입니다.

 혹 누가 구제를 하는데 그 영혼이 불쌍해서, 그 삶의 어려운 처지를 돕기 위해서 구제 한다면 그 구제가 아름다운 것이지만 ‘저 사람은 구제하는 훌륭한 사람이야.’ 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서 구제한다면 이것은 외식적인 구제인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든, 구제를 하든, 무엇을 하든 간에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사람들의 평가를 기다리면서 행했던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과 같이 행하지 않으면 그런 부분을 공격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이 낡은 부대에 넣은 묵은 포도주와 같은 것이라고 하십니다.

 왜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느냐고 바리새인들이 따지고 들자 주님은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데 손님으로 금식하게 하겠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것을 혼인으로 비유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금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게 될 때에는 금식하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실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 아니하리라” 즉 새 옷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낡은 옷은 유대교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이는 형식주의의 낡은 폐단인 유대주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새 교훈과 합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새 포도주와 새 부대도 같은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가죽부대가 터져서 부대도 포도주도 모두 버리게 되는 것처럼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주의와 합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1.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예수님의 교훈대로 새 포도주를 새 가죽 부대에 넣은 삶을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는 삶이 될까요? 따라해 보실까요. “정죄가 아니라 사랑으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율법을 지키면 지키지 않은 사람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정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공통적인 삶의 태도는 남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자기들이 정해놓은 선을 그어놓고 배타하고 공격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정한 전통과 규례의 기준에 맞추어서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이러한 잣대로 이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있는 것을 보십시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배가고파서 밀을 조금 비벼서 먹었다고 안식일 논쟁을 하는 것입니다. 어찌하든지 이들에게 걸려들기만 하면 살아남을 자가 없습니다.
 바리새인이 옛날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우리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정해 놓은 틀에 어떤 사람이 걸려들면 끊임없이 그 사람을 정죄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뒤에서 공격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성공했습니까, 못 했습니까? 성공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고 가고 군중들을 선동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데 성공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누구의 약점이 보이면 끝까지 파고들어가서, 누구의 허물이 보이면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결국은 걸어 넘어뜨립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행태를 보면 너무나 비열하고 사람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것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가서 그 사람을 완전히 정치적으로 매장시켜버립니다.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이런 모습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재판장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자신들이 정해놓은 잣대로 잘 잘못을 가려냅니다. 혹시 여러분이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빨리 내려오시기를 바랍니다.

 가정에서도 재판 자는 싫어합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의 잘못을 지적하고 아이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끊임없이 잘못했다고만 이야기하면 아무리 남편이고 아빠가 될지라도 가족들이 싫어합니다. 직장에서도 동료의 잘못만을 지적한다면 그 사람은 모두가 싫어합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뒤에서 수군거리고, 험담하고, 비난하고, 완벽하지도 않은 자기 기준을 가지고 남을 판단한다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있는 티만 보고 끊임없이 그것을 지적한다면 아무도 그를 좋아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세상 어느 누가 비판과 판단과 정죄를 받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다 비판 받아야 되고, 판단 받아야 되고, 정죄 받아야 되고, 죽임당해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어떤 죄인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경우를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간음한 여인을 잡아 정죄하여 끌고 와서 돌로 쳐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용서하고 사랑하셨습니다. 주님의 방법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내가 말씀대로 살면 살수록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눈에 보일 것입니다. 기도하면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보입니다. 봉사하면 봉사하지 않는 사람이 보입니다. 땀을 흘리면 놀고 있는 사람이 보입니다. 내가 의롭게 살면 의롭지 못한 자가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을 공격하고 비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죄인이라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를 품고 그를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사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들도 바리새인들처럼 자기 생각에 맞추어 남을 정죄하거나 판단하는 구습을 쫓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도 남을 비판하고 욕하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누군가를 정죄거나 비판하고 있다면 내가 곧 바리새인이요 낡은 가죽부대와 같은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율법을 다 지킨 자들인 것처럼, 자신들은 의인인 것처럼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고 비판합니다. 이런 태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죄를 알지도 못하신 분이셨으나 죄인을 보시고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까지도 사랑하신 분이셨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 중에 최고의 사랑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요 친구를 위하여 목숨이라도 버리는 사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교훈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라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눈에 좋아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감각적이거나 감상적이거나 로맨틱한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예수님의 삶의 방식입니다.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며, 수고가 따르는 것이며 아픔을 감내하는 것이며, 비판하지 않는 것이며, 교만하지 않는 것이며 무례하지 행치 않는 것이며, 뒤에서 수군거리지 않는 것이며, 험담하지 않는 것이며, 왕따 시키지 않은 것이며, 남을 정죄하지 않는 것이며, 남을 비난하지 않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으라는 것은 예수님처럼 살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부족하지만 이렇게 살려고 애써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태도에서 비난과 정죄가 가능한 한 사라져야 됩니다. 보지 않는 곳에서 욕하고 험담하는 것이 사라져야 됩니다. 

2.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자세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두 번째 삶의 방식은, 따라해 보실까요.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대접하는 자세로” 남에게 대접을 받으려고 하고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문제가 생깁니다. 여러분은 칭찬을 받아야만 일하는 편입니까, 아니면 아무 칭찬을 받지 않아도 내게 맡겨진 일을 하시는 편입니까? 요즈음은 어린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칭찬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칭찬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을 할 때 칭찬을 받기 위해 일한다면 변질된 것입니다. 봉사를 할 때도 봉사를 위한 봉사가 되어야지 칭찬을 받기 위한 봉사가 되면 안 됩니다. 누군가를 섬기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어야지 누구를 섬겼다는 이유로 칭찬을 받는다는 것을 바라보고 섬긴다면 그것은 변질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장 5절로 7절 말씀입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지난주에 어떤 목사님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칭찬 받는 것이 너무 부담스러워요. 차라리 칭찬 받지 않을 때가 편해요.” 우리는 이렇게 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이 성전을 두 시간 동안 쓸고 닦았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며 칭찬하면 “저는 그런 말을 해주지 않은 것이 편합니다. 하나님 앞에 기쁨을 드린 것이지 누구에게 칭찬 받고자 한 일이 아닙니다.” 이러한 자세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칭찬하면 “고맙습니다.” 하며 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 근본 중심은 칭찬이 부담스러울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사람에게 대접받고 인정받으려는 태도로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만 인정하시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가르치심입니다.     

 바리새인들의 특징은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대접 받는 것을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삶의 방식이 아닙니다. 이것은 낡은 가죽 부대의 삶의 형식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세상에서 리더로서의 삶을 버리고 언제나 낮고 천한 자리에서 일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대통령이라는 높은 자리라도 섬기려는 자세로 일 할 수도 있지만 말단 공무원이라도 대접받으려는 자세로 일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육신을 위하기보다 영을 위하는 삶으로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새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으라고 교훈하신 삶은, 따라해 보실까요. “육신을 위하기보다 영을 위하는 삶을 살라”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 육신으로 사실 때 육신을 위하지 않고 영을 위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한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보이는 썩을 것을 위해서 살면 허무합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살아야 소망이 넘칩니다.

 어떤 분이 말단 직원에서 한 단계 한 단계 올라가서 마침내 최고의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그러다 2,3년 만에 퇴직을 했습니다. 얼마나 허무할까요. 여러분! 세상에서 우리가 육신을 바라보고 살면 이루어도 허무하고 이루지 못해도 허무한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육신을 바라보고 사셨다면 왜 33세에 죽으셨겠습니까? 죄도 없으시고 전지전능하신 예수님이신데 천년만년 사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중심이 아니고 육신이 중심이 아닌 하나님 나라가 중심이며 영혼이 중심인 삶을 사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얻을 영광, 영혼의 때에 얻게 될 축복을 바라보고 사신 줄로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바리새인 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낡은 가죽부대가 터지는 것처럼 터져버린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된다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살아가려고 늘 애쓰고 힘쓰는 믿음의 성도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은 의를 위해 핍박을 받으셨고 죄인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으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위해 종으로까지 낮아지는 것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 6절로 11절에서 예수님의 삶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예수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그리스도의 이 마음을 품고 살아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바리새인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를 믿노라하면서 세상 사람처럼 살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살도록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남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용서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대접받고 높은 자리에 앉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태도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하고 높이려하고 복 받게 하려는 태도로 살기를 바랍니다. 육신을 위해 살지 말고 영을 위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주님처럼 하나님 나라에서 잘 되는 삶을 살아가는, 새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은 것과 같은 삶을 이루어가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5:33~39
5장
33 저희가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34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너희가 그 손님으로 금식하게 할 수 있느뇨
35 그러나 그 날에 이르러 저희가 신랑을 빼앗기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36 또 비유하여 이르시되 새 옷에서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을 뿐이요 또 새 옷에서 찢은 조각이 낡은 것에 합하지 아니하리라
3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되리라
38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39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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