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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안식과 평안
누가복음 6:1~11 유우열 목사 2010-07-18
참된 안식과 평안 (눅6:1-11)

 세상을 살면서 가장 소중한 것은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삶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합니다. 재물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건강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타인에게 인정을 받으려고도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모두 가졌다할지라도 마음에 평안과 안식이 없다면 그것은 순간의 즐거움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안에는 진정한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마음의 참된 안식과 평안은 세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런 찬양이 있습니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오네” 할렐루야! 평화와 안식과 행복이 위에서부터 내려와서 우리를 덮어야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덮고, 우리의 마음을 덮을 때 진정한 안식과 평안이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마음의 참된 안식과 평안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는 참된 안식과 평안이 없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우리나라 최고 재벌의 딸이 자살을 했습니다. 안식과 평안이 없었다는 단적인 증거가 되겠지요. 재벌의 집에 돈은 많았겠지만 불행하게도 평안과 안식은 없었습니다. 또 몇 일전에는 겨울연가에 출연했던 탤런트 박용하씨가 자살을 해서 국민들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일로 일본열도가 애도에 잠겼다는 기사가 있었는데 유명한 탤런트가 되면 무엇 합니까? 그 정도의 유명세를 얻으려면 보통 노력으로 되겠습니까? 또 많은 행운도 따라야 되겠지요. 마음에 참된 안식과 평안이 없으니까 이처럼 불행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바쁘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세대를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주님 주시는 안식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지프스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는 큰 돌을 산 위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돌을 정상 근처까지 겨우 밀어 올리면 다시 돌은 굴러 떨어지고, 다시 밀어 올려놓으면 다시 굴러 떨어져 끊임없이 돌을 밀어 올려야 되는 무서운 형벌입니다. 인간은 평안이 없는 고통의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날마다 무거운 돌을 정상에 올려놓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부귀를 올려놓으려 하고, 명예를 올려 놓으려하고, 더 나은 즐거움의 자리로 올라가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올려놓은 것 같은데 다시 굴러 떨러집니다. 참으로 평안이 없고 안식이 없는 존재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위로부터 주시는 안식과 평안이 여러분에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안식일을 정하신 하나님의 의도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함께 밀밭 사이를 지나가실 때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시장한 사람이 보리이삭을 잘라 먹는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손으로 이삭을 비비는 것은 노동행위로 보았기 때문에 왜 안식일에 노동하느냐고 시비를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 16절 말씀을 인용해서 다윗이 제사장이 아니지만 제사장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었다고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안식일 문제를 문자적으로 해석해서 문제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로 인해서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또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고발할 증거를 찾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음을 보시고 병을 고쳐 주심으로 안식일 문제로 인해 심각한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노동으로 보았기에 예수님께서 안식일을 범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고 물으시면서 병을 고치시니 이런 모습을 보던 바리새인들은 노기가 가득하여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하며 서로 의논하기까지 했다는 내용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일어난 갈등의 문제는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형식적인 내용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며, 반면 예수님은 안식일을 정하신 진정한 목적은 안식을 누리게 하기 위함인데 안식일에 대한 외식과 형식적인 태도가 잘못되었음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의견 대립이 일어난 것입니다. 누구의 의견이 옳은 것입니까? 예수님의 의견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앞서 먼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이 있습니다. 안식일은 누가 제정한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제정한 절기입니다. 안식이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 일곱째 날에 안식 하신 것이 기원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일곱째 날을 구별하여 지킴으로 복을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자 하시는 창조의 섭리이므로 어느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의도대로 이 날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첫째, 안식일은 창조주이신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는 날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날은 하나님은 천지창조의 주인이시며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에 피조물 된 인간이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경배하는 날입니다. 이날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나에게 생명을 주신 분이시고 내 생명을 가져가실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고 인정하는 행위가 바로 이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결혼해서 한 남편의 아내가 되었다면 남편을 인정하기 위해서 집에 들어가야 됩니다. 남편이 있는데 집에 안 들어간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의 창조주시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은 나의 창조주시며 주관자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행동으로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날에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내 날은 내 날이고, 내 생명은 내 생명이고, 세상은 내가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구별하여 부르셨다는 표징으로 삼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이 성전에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나와서 예배를 드리나요? 드릴 수 없습니다.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사람은 구원받은 백성이라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배드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표시가 되는 것입니다. 천국백성으로서의 특권임과 동시에 이날을 거룩하게 지켜야 할 사명이 주어진 것입니다.

 셋째, 이 날에 하나님께서 참된 안식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마련하신 것입니다. 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있는 것이 안식이 아닙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누워있어 보세요. 그것이 안식인가요? 고통이에요. 진정한 영적인 안식은 하나님께 나와서 하나님께 경배할 때 주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아!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는 하나님의 자녀구나. 내가 이 세상을 살다가 죽어도 영원한 아버지의 나라에 가겠구나. 이 세상을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하는 믿음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면서 생기니까 영적인 안식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날 예배드리고 집에 가서는 편히 쉬면서 육적인 쉼을 얻기도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은 주5일 근무제가 되어서 아주 좋아졌습니다. 토요일은 육체의 안식을 위해서 산에도 가시고, 운동도 하시고 주일날은 영적인 안식을 위해서 온전히 예배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먹기만 하고 쉬기만 해서 안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교제해야 진정한 안식이 있어지는 것입니다.   

 넷째, 안식일은 애굽의 종살이로부터 구원하신 은혜에 감사하기 위해 이날을 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날은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입니다. 오늘의 구원받은 성도 역시 이 날 하나님께 감사하며 나를 구원하시고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날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감사한 마음이 있으시지요? 나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하시지요? 이 세상에서 나를 지켜주신 것 감사하시지요? 죄를 이길 수 있게 하신 것 감사하시지요?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는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안식일과 주일은 어떻게 다른 것인지를 궁금해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기독교에서는 안식일을 계승 발전하여 주일로 지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온 인류의 구원을 이루셨기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된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이날 예배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율법은 오실 예수그리스도를 나타내는 그림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그 그림자를 완성하신 것입니다. 구원을 완성하신 것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 날, 안식일을 더 발전 계승하여서 주일로 지키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2. 주일을 성수하는 신앙
 예수님과 안식일 문제로 갈등을 일으킨 바리새인들의 태도에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이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찾아본다면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려는 그들의 태도입니다. 주일을 바리새인들처럼 성수하려고 하는 열심이 우리에게 그들의 반이라도 있을까요? 아마 반의반도 없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기회가 되면 주일을 지키고 안 되면 할 수 없다는 식의 느슨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얼마나 철저했는지 그것이 오히려 짐이 될 정도로 아주 무겁게 지켰습니다. 열심히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켜보려고 했던 그 태도는 우리가 오늘 본받아야 될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바리새인들의 이중적인 행동은 본받지 말아야 되지만 가르치는 것은 그대로 본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일성수에 대한 개념이 점점 약화되어져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일을 지킬 수 있는 형편이 되면 지키는 것이고 안 되면 할 수 없지. 이 교회만 교회인가. 아무데나 가서 주일을 지키면 되지.’ 이 같은 생각을 가지고 주일성수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고 너무 느슨하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너무 시대가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의 섭리를 위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지, 무엇을 성취하려고 하는지 주일 성수의 개념도 없이 시간이 남으면 예배를 드린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옷깃을 고쳐 여미듯이 이것은 지금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고 고쳐야할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늘 급한 일로 쫒기는 삶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늘 급한 일을 쫒아 다니다보니까 정작 중요한 일은 다 놓쳐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일 성수를 최우선 순위에 두고 주일 성수에 힘쓰는 복된 성도님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왜 주일 성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될까요? 첫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에 대한 예배를 드리지 못하니까 이것이 문제가 되고 둘째는 주님께서 피로 값 주고 세우신 교회 공동체가 약화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약화되면 주님의 지상명령인 세계복음화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한 가족이라면 어떠한 일이 있을 때 다 모여야 되는 것이 아닙니까?

 천안함 사건처럼 우리나라에 어떠한 일이 있으면 전 국민이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름대로 자기입장에서 할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온 국민이 한 나라라는 테두리 안에서 똘똘 뭉쳐져야만 하는 것처럼 교회공동체는 예수그리스도의 피 아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아래 똘똘 뭉쳐진 공동체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공동체가 힘을 잃게 되면 세상에서 어떠한 영향력도 발휘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힘을 잃으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질 수 없습니다. 주일성수는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지만 또한 교회가 힘을 얻는 것입니다.
   
 교회가 힘을 잃은 그 비근한 예가 영국교회입니다. 100년 전 영국교회는 세계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선교하는 교회였습니다. 전 국민의 50%이상이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사를 파송 받아야 할 교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전 국민의 2~3%밖에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대로 가면 2020년에는 전 국민의 1%밖에 예배를 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주일성수가 무너져서 그렇습니다. 산업화 물결이 일어나면서 가장 먼저 경제발전을 이룬 나라가 영국입니다. 문제는 발전을 거듭하며 물질이 풍성해지면서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주일을 인간을 위한 쾌락의 날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스포츠에 몰입하거나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멀리하고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람에게 인정받는 일을 위해 주일을 저버렸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금씩, 조금씩 무너지는 것입니다. 작은 것을 하나 양보하면 조금 더 큰 것을 양보하게 되고 결국에는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국민은 축구를 얼마나 좋아합니까? 영국에는 기독교는 없어지고 축구교가 생기는 것 같아요. 축구경기장마다 사람들로 꽉 들어찼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급속도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시작되면서 주말만 되면 가족들과 야외로 나갑니다. 주일날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한국교회도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주일 성수를 마음에 두고 지킬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태도에서 부정적인 면을 찾는다면 안식일을 지나치게 제도화 하여서 그것으로 사람들을 정죄하는 수단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밀을 손으로 비벼먹는 것은 안 되고 따먹는 것은 괜찮다며 사람을 걸고넘어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지키면서 안식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이 없는 것입니다. 누가 안식하고 있나 안 하고 있나 감시하다보니 정작 안식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누가 기도하나 안 하나 감시하다보니 기도 못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하지 못하는 단적인 증거가 예수님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비난하는 것입니다. 배타적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안식이 있는 사람은 마음에 온유가 있고 겸손이 있습니다. 누가 좀 부족해도 용납해주고 누가 실수를 해도 받아줍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죽이겠다고 사람들은 돌을 들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하시며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로 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예수님을 만나면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게 되니까 남의 부족한 면을 받아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참된 안식과 평안
 여러분! 그렇다면 바리새인들만 예수님을 향해서 그런 태도를 취했을까요?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린다고 하면서도 이웃과 다투고, 누구를 미워하고, 험담하고, 모함하고, 욕하고, 시기하고, 비방한다면 우리가 바리새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안식이 없는 증거예요. 예수를 믿는 성도는 참된 안식과 평안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 만나서 구원의 감격이 있고, 주님 만나서 은혜가 충만하고, 주님 만나서 온유해지고 겸손해지면 미움이 사라지게 되고 비방이 사라지게 되고 험담이 사라지게 되고 시기가 사라지게 되고 모함이 사라지게 되고 마음으로부터 끓는 것들이 모두 다 사라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 가사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평화가 나를 덮어서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면 참된 안식과 평안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얻으려고 해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면 평안이 있나요? 운동을 많이 하면 평안이 있나요? 무엇을 해도 평안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나와서 배워야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찬송가 479장 1절에 이런 찬송이 있습니다.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이 평안이 쉬일 곳 아주 없네 걱정과 근심이 어디는 없으리 돌아갈 내 고향 하늘나라’ 세상 어디에나 걱정과 근심이 있습니다. 돈을 가진 사람도 걱정근심이 있습니다. 명예를 가진 사람도 걱정근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나와서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 예배해 보십시오. 이 모든 걱정근심들이 사라져가게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구나. 내 생사화복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죽음 앞에서도 진정으로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통해서 온유와 겸손을 배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 죽으셔서 나의 모든 죄와 허물과 율법의 저주에서 완전하게 깨끗이 해 주신 것을 깨닫게 됩니다. 죄에서 용서받은 사람만큼 마음이 평안한 사람은 없습니다. 평화가 물밀듯이 몰려오는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고인 되신 강종순성도님을 찾아갔습니다. 코에 산소 호흡기를 끼고 아주 힘든 숨을 몰아쉬고 있었습니다. 물로 저도 그 성도님이 기적같이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냉정하게 말씀드렸습니다. “천국 문이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성도님은 주님 품에 안길 것입니다. 지난날의 모든 죄 용서받으셨지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셨지요?”라며 구원의 확신에 관한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러자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멘 이란 의사 표시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저는 “성도님! 구원받으셨습니다.”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 얼굴 속에서 평안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육체는 고통스럽지만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평안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평안은 없습니다. 오늘 주님 만나서 이 평안을 누리시고 성령 충만 받아서 성령님이 위로부터 주시는 진정한 평안, 압도되어지는 참된 안식과 평안을 누려갈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6:1~11
6장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2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뇨
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4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다만 제사장 외에는 먹지 못하는 진설병을 집어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5 또 가라사대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송사할 빙거를 찾으려 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가 엿보니
8 예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한가운데 서라 하시니 저가 일어나 서거늘
9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묻노니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멸하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며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저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11 저희는 분기가 가득하여 예수를 어떻게 처치할 것을 서로 의논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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