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이 무엇입니까? (눅 6:20-23)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복이 무엇입니까?’ 인데 의문 부호를 달았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의 개념과 무엇인가가 다를 것이라는 짐작이 가시지요? 중국에 가보면 느끼는 것이 있는데요. 어마어마하게 큰 간판들이 많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큰 나라, 대국이라는 인상을 심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간판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복’이란 단어가 참으로 많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식당을 가보면 ‘복’이란 글자가 많습니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복’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또 많이 사용합니다. 아무튼 복은 모두가 좋아합니다. 밥그릇에도 복자를 넣고, 가마솥 뚜껑에도 복, 뚝배기 그릇에도 복, 한복에는 말할 것도 없고, 이불 겉감에도 복자가 인쇄되어있습니다. 창문에도 넣고, 심지어는 요강에도 복자를 넣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복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다면 복이라는 뜻은 무엇일까요? 한글학회에서 엮어낸 우리말 큰 사전에서는 ‘복(福)’이란 ‘삶에서 누리는 좋고 만족한 현상과 거기서 얻는 기쁨과 즐거움’이라고 풀이하고 있습니다. 즉 행복한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요. 그러니까 ‘복’이란 어떤 상황이 기준이 아니라 어떻게 느끼느냐 하는 것이 기준입니다. 재산이 어느 정도 있으면 복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소유하고도 행복하지 못할 수 있고, 적게 소유하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행복이란 상황이 아니라 느낌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통적으로 몇 가지 기준을 정하여 복이라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복 하면 5복을 말합니다. 첫째는 수, 오래 사는 것이요. 둘째는 부, 부유하게 사는 것이요. 셋째는 강녕, 건강하게 사는 것이요. 넷째는 유호덕, 덕을 좋아하고 베푸는 것이요. 다섯째는 고종명, 깨끗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 세상이 좋다는 관념에서 나온 복에 관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세상사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점입니다.
물론 이러한 복의 개념을 우리가 전면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오래 살고 부자 되고 건강하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죽을 때 편안하게 죽으면 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복의 극히 일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복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복에 대한 개념정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뭐든지 개념정리가 잘 되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오고 이해가 잘 됩니다. 그러나 개념정리가 안 되면 복잡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복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 주셨습니다.
1.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므로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퍼져나가 구름떼처럼 많은 무리가 주님에게로 나왔을 때 주님께서 그들을 보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들이 주님께로 왜 나아왔을까요? 복 받기 위해서입니다. 무리들이 추구하는 복이란 주로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복락과 번영이었습니다. 그래서 재정적인 넉넉함으로 생계유지의 걱정이 없고 많은 자녀를 낳아 화목한 가족을 이루며 질병이 없어 건강을 유지하고 장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고 재앙과 질병에서 안위를 보장받아 걱정과 염려 없이 살아가기를 원하는 지극히 현세적이고 육체적인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생각지도 못할 충격적인 복의 개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러한 복의 개념을 가지고 살아야 이 세상을 복되게 살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첫 번째 복의 개념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던져진 충격적인 메시지였습니다. 풍요를 복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자들에게 가난함이 복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함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가난함이란 영적인 가난함이 근간이 되지만 물질적인 가난함도 포함되는 가난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세계적으로 복음이 전파되는 국가들의 경우를 보면 가난한 나라에 복음이 많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 찾게 되는 현상이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가난함도 복이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로 말씀하시는 것은 영적인 가난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프토코이’라는 말인데요. 이 말은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구걸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상태에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 바라보는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나의 건강도 책임져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나의 가정도 주님께서 책임져주셔야 됩니다.’ 하는 마음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걸하는 가난함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예수님께서는 복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유를 누리고 사는 것도 참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 때문에 ‘나는 하나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아도 살 수 있습니다.’라고 생각한다면 많은 물질을 가진 것이 축복이 아니라 오히려 불행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얼마를 가졌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이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불어 버리시면 다 날아갑니다. 몇 번 부도 맞으면 다 끝납니다. 또 아무리 재물이 많으면 무엇 합니까? 몸이 아프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셔야만 됩니다. 가정도 하나님께서 지켜주셔야만 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께서 주실 은혜에 가난합니다. 그 은혜를 사모합니다. 그 은혜를 구걸합니다.’ 하는 상태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사람 앞에 구걸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구걸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사람 앞에 구걸하면 비참하게 되지만 하나님 앞에 구걸하면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123편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여러분이 생선 한 토막을 가지고 있고 그 앞에 개들이 몇 마리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주려고 시늉만 해도 오로지 손끝만 쳐다봅니다. 절대로 딴 짓하지 않습니다. 이것처럼 ‘하나님! 하나님의 은혜가 나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나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용서가 필요합니다.’하고 구걸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물질이 필요할 때 하나님께 물질을 구걸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신령한 좋은 것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저께는 원자력 병원에 갔습니다. 간암 말기에 있는 분인데 우리 교회 성도님과 관계되는 분이었습니다. 그 분에게 간단하게 복음을 전하고 기도해 주고 돌아왔습니다. 원자력 병원에 가보면 한 가지 감동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병원의 원장님이 이진수박사님이신데 폐암부분에서 우리나라의 권위자입니다. 그럼에도 그 분은 자신의 기술과 실력을 의지하지 않고 환자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의학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세요. 진정 병은 하나님께서 고쳐주시는 것입니다. 약을 쓰고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는다고 해서 치료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셔야만 됩니다.” 물론 모든 환자들이 기도했다고해서 다 낫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함으로 기적 같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폐암의 권위자라는 실력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지식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이진수박사처럼 주님께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 가난한 마음을 소유하고 사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세상에는 물질도 가난하면서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 구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아주 복된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입니까? 배울 만큼 배웠습니다. 가질 만큼 가졌습니다. 그래도 늘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야만 됩니다. 나의 자녀들도 지켜주세요.’하며 늘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구걸한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별로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통장에서 꺼내 쓰면 되고 건강도 이만하면 만족스럽고 배운 것도 이 정도면 살아갈만하고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불행한 사람입니다.
물질의 상태가 어떠하든, 배운 것이 많든 적든, 명예가 있든 없든, 건강이 좋던 나쁘던 관계없이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이 가난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걸할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어갈 수 있기에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함의 개념인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상태는 늘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우리 복된 성도님들이 마음의 가난함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2.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두 번째 복의 개념은 주린 자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쉽게 이해되지 않는 개념입니다. 21절 말씀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요” 마태복음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린 자라는 말은 ‘페이논테스’라는 말로 항상 굶주린 상태로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시적 주림이 아니라 항상 주리고 있는 지속적인 주림의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항상 배고픈 것이 행복입니까? 한 끼 만 굶어도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습니까. 먹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육신의 배고픔이 지속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주림을 의미합니다. 영혼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대해서 주린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굶주려 있고 하나님의 은혜에 굶주려 있는 상태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주림의 상태가 복된 이유는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입니다.
배부른 사람은 아무리 진수성찬을 차려 놓아도 수저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배고픈 사람은 시래기나물을 갖다 주어도 달고 맛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늘 굶주림이 있는 사람입니다. 삼일 동안 밥을 안 먹었는데도 배가 안 고픈 사람은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아침을 먹고 돌아서면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굶주림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또 먹어도 계속 굶주린 상태로 있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더 들어야 돼. 말씀을 더 배워야 돼.’ 이러한 것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에 있어서 굶주린 상태인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영적인 굶주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설교를 들으면 ‘벌써 설교가 끝났네.’ 하고 설교시간이 짧다고 생각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굶주리지 않은 사람은 ‘아이, 오늘은 목사님 설교가 왜 이리 길어.’ 하며 몇 번씩 시계를 봅니다. 예배시간에 시계를 몇 번씩 보는 성도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영적인 목마름과 갈급함이 있는 것이 복 있는 사람의 증표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때에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육신적으로 굶주리셨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육신의 굶주림을 채워드리려고 음식준비를 합니다. 음식 준비하는 것 또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동생 마리아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발아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의 말씀에 눈을 떼지 않고 듣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언니 마르다가 조금 속이 상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께 마리아로 하여금 나를 도와주게 말씀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4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마리아는 영적인 굶주림의 복을 받은 자였던 것입니다.
영적인 굶주림에 있는 사람은 찬양이 은혜스럽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점검할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은 찬양이 지겹게 느껴지면 영적으로 문제 있는 것입니다. 찬양이 끝나면 예배에 들어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문제 있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제대로 전달도 안 되는 경우에는 지루하고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저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근본적인 마음의 상태가 말씀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설교든지 지겹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적인 굶주림이 있으신가요? ‘하나님 저에게 영적인 굶주림을 주시옵소서.’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은 “그가 배부를 것임이요.”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만족인 것입니다. 육신이 배부른 것은 시간이 지나면 또 배가 고파지지만 영적인 배부름은 끊임없이 배부른 것입니다.
3.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세 번째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21절 후반을 읽어보겠습니다.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운다는 말은 ‘클라이오’라는 말입니다. 통곡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지속적으로 통곡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지속적으로 통곡하는 것입니까? 우리 생활 속에 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어서 늘 울 수밖에 없는 비참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것이 복입니까?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의 거울 앞에 나를 자꾸만 세워 보니 너무 부족하고, 너무 이기적이고, 너무 욕심 많고, 너무 세상 적이고, 진리에 대해서 너무 모르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 제가 너무 부족합니다.’ 하고 마음에 통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로마서 7장 24절로 25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사도 바울이 무슨 엄청난 죄를 지었겠습니까? 그 위대한 사람이 살인죄를 지었겠습니까, 음란죄를 지었겠습니까, 도둑질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서 보니 한없이 부족하고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하나님 제 인격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제가 생각하는 윤리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저는 부족합니다.’ 하는 의미에서 운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 때문에 울어 보셨습니까?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 때문에 울어보셨습니까? 누가 나를 미워해서 우는 것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미워하는 그 마음 때문에 통곡하는 것은 ‘하나님 내 마음이 왜 이렇습니까?’하는 울음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진정한 웃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쁨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4. 인자로 인하여 고난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2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칭찬받고 인정받고 존경받고높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르게 믿다보면 ‘NO'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제사를 지내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으니까 “못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가족에게 미움을 당하기도하고 주변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도 합니다.
또 한 예를 들면 직장에서 아무도 모르는 공금이 있을 때 한 눈 질끈 감으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NO'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변에서 저만 혼자 세상에서 깨끗한 척 한다고 욕을 합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당하는 고난입니다. 주님께선 이런 것을 당해야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세상에서 한 번도 비난을 받아 본 적이 없다면 이것도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은 윤리적으로 잘못해서 받는 비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다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아보지 않았다면 바른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본문은 아니지만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강도가 나를 칭찬하면 나도 강도라는 것입니다. “이야! 저 친구하고 나하고 손잡고 한건 올렸어.” 모든 사람이 칭찬하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 생명의 말씀을 지켜나가다 보니까 미움도 받고 때로는 따돌림도 당할 수 있고 핍박을 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어떠했습니까? “네가 예수를 믿지 않으면 너를 살려주겠다. 이 바닥에 예수님 사진을 놓을 테니 사진에 침을 뱉고 발로 밟고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살려주겠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이 침을 뱉고 갔지만 그는 침을 닦고 예수님을 가슴에 끌어안은 것입니다. 이러한 태도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으로 인해, 주님을 따르는 것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때문에 고난을 받는다면 그 날에 기뻐하고 뛰 놀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복의 개념은 보통 사람들의 통념적인 복의 개념과 전혀 다릅니다. 단순히 오래 살고, 부요하며, 건강하고, 사람에게 인정받다가, 편안하게 죽으면 복이라는 개념을 뛰어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하는 것이 복이라고 하신 것처럼 가난한 마음이 되어 늘 하나님의 주실 은혜를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에 늘 굶주려 있고 예배에 대해서 늘 굶주려 있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죄에 대해서 민감해서 늘 마음으로 애통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것 때문에 이렇게 저렇게 고통을 당하고 욕도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삶이 복 있는 삶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면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이런 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면 영원히 복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복된 성도님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6:20~23 6장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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