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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라
누가복음 6:27~36 유우열 목사 2010-08-08
원수를 사랑하라 (눅 6:27-36)

 말씀의 제목을 따라해 보실까요. “원수를 사랑하라.”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결심이 분명하게 서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수라 할지라도 사랑할 수 있겠다.’ 아니면 ‘앞으로 원수를 사랑하겠다.’ 하는 마음의 결단이 서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림의 떡이란 말이 있습니다. 바라고 원하는 바이지만 바라기만 할 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지요.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림의 떡처럼 보이는 수준의 주님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교훈이십니다. 마치 하늘에서 별을 따오는 것처럼 어렵게만 생각되고 절대로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거 하나님이나 되어야지 지킬 수 있는 일이지 우리 같은 인생들이 지킬 수 있을까?’ 하며 지레 포기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주신 계명인줄로 믿습니다. 결코 쉽지 않지만 지키라고 주신 계명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계명 앞에 더욱더 성령의 능력을 간구하고 더 낮아지고 더 겸손해서 우리의 삶에 원수라도 사랑할 수 있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의 개념, 원수의 범위가 어디까지일까요?  원수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하면 원수에 대한 적용을 잘 못해서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원수처럼 여기고 대적해야할 대상을 대적하지 못하고 사랑하고 품어야할 대상을 원수로 여기는, 즉 아군을 향해서 칼을 들고 적을 향해서는 가슴을 여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적개념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의 주적은 누구입니까? 현재는 북한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개념이 분명하지 않으면 사상의 혼돈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창세기 3장 15절 말씀을 보면 원수의 개념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하와를 유혹해서 선악과를 따먹게 한 뱀에게 하나님께서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지만 사랑의 하나님도 저주하십니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시지만 하나님에게 용서 못할 원수가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한다는 말씀에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성경적인 말씀입니다. 뱀은 사단마귀를 가리키는데 예수그리스도와 원수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는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단마귀가 원수인 것을 알면 대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더나가 특히 복음이 아닌 이단의 교리를 가지고 오는 자들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고 강력하게 대적하고 원수처럼 여길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하나님을 떠나게 하고 망하게 하는 대적은 분명히 있습니다. 이것은 원수마귀, 이단, 사설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의 원수는 어떤 원수를 지칭하는 것입니까? 개인적인 혹은 감정적인 이해관계에 얽히고설킨 관계를 사랑해야 할 원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개인의 감정에 근거해서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원수로 여기지 말고 오히려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의 개념을 잘 이해하셔서 대적할 것을 대적하고 사랑하고 축복하고 선대하고 기도해야할 대상을 바로 알고 기도하기를 축복합니다. 이것을 바로 알지 못해서 사랑해야 할 대상을 사랑하지 못하고 축복해야 할 대상을 축복하지 못하고 품어 주어야할 대상을 품지 못하게 되면 우리의 삶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어떤 청년이 농사를 짓다가 이웃집과 농사일로 크게 싸웠습니다. 화가 난 이 청년은 밤에 이웃 아저씨 밭에 몰래 잡초 씨를 뿌렸습니다. 잡초가 얼마나 잘 자랍니까? 얼마 안 가서 그 밭에 잡초가 무성해졌습니다. 이웃집 아저씨는 해마다 잡초를 뽑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이 청년은 고소해했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이 청년이 이웃집 아저씨의 딸과 연애를 했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장인이 된 이웃집 아저씨는 청년에게 그 밭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청년은 그 밭에서 잡초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 30년이 걸렸답니다.

 자신의 감정에 근거해서 누구든 원수로 삼고 원수 갚는 일을 하면 이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에 근거한 원수 삼는 일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도 죽이고 원수로 여긴 자도 해롭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성도들은 원수가 도대체 누구인지 제대로 구별을 못하는 분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로 목숨을 걸고 원수처럼 싸워야 할 사단마귀에 대해서는 싸우지 않고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이웃을 원수처럼 여기며 싸우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맘에 들지 않는 아무개를 주는 것도 없이 미워하며, 자신에게 서운한 말을 했다고 그를 원수처럼 여기고, 누가 나에게 아픔을 주었다고 해서 그를 원수처럼 여긴다면 원수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사람들과 부딪힘이 있습니다. 감정이 격해지면서 마음이 상하게 되는 경우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부부사이에 한 번도 언쟁을 하지 않은 분도 있습니까? 가족 때문에도 시험들 때가 있는데 사회에서 타인을 만나는데 감정이 어떻게 같을 수 있고 이해관계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만나지 않고 산속에서 혼자 사는 경우는 모르겠지만 사람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서로 얽힌 이런 저런 일들이 있습니다. 원수의 대상을 바로알지 못하면 피해의 대상자는 바로 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지 그 사랑의 방법을 깨닫고 그 방법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모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1.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첫 번째는, 따라해 보실까요.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주님은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누구를 미워하지 마라는 수준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내가 알았을 때에 그를 선대하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미워해도 내가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 나를 미워하는 것을 알면 그것이 보통 힘든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 근처에 가지도 못합니다. 얼굴을 마주치면 외면합니다. 얼마나 마음에 힘든 것입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감정이 좋지 않아서 누구를 미워한다거나 미워하지 않는 수준을 뛰어넘어야 됩니다. 이것은 내 힘과 내 능력으로는 어려운 일인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 주님의 교훈이기 때문에,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이대로 살려고 애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약 누가 나를 미워하는데 내가 그를 선대하지 못한다면 이것이 기도제목이 되어야 될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품지 못하고 내 마음에서 그를 자꾸 멀리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것이 나의 성장해야 될 과제인 것입니다. 32절로 33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만을 사랑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느니라.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만을 선대하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냐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라도, 나를 싫어하는 사람까지라도 축복하고 선하게 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미워하는 이유는 물론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미워할 수도 있지만 내가 그를 선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워하는 것입니다.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나를 미워한다면 선하게 대하는 감정으로 미움을 풀라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미워하는 감정을 푸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나를 미워하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계명입니까?   

  저는 목사로써 성도에게 세 가지가 없기를 권면합니다. 첫째, 미운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둘째, 서운하고 섭섭한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셋째, 싫은 사람이 없기를 바랍니다. 미운 사람이 많고 서운한 사람이 많고 싫은 사람이 많은 사람을 가리켜 교만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미운 사람이 많고 서운한 사람이 많고 싫은 사람이 많은 사람 주변에는 사람이 없습니다. 결국 친구는 적고 원수는 많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다면 없기를 위해서 기도하기 바랍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려면 이 세 가지가 없어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이웃과 좋은 관계가 맺어지는 역사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또한 감동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주님 품에 안긴 강종순 성도님 장례식이 있었습니다. 장례예식을 진행하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고인께서 생전에 사람들과의 관계를 너무 잘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들렸습니다. 아내 되는 권사님이 조문객이 너무 많이 오시고 많이들 부조를 해주시니까 “이렇게 많이 가지고 오시면 안 되는데요.”라고 말하자, 조문객들은 “아닙니다. 그동안 형님께서 하신 것에 비교하면 적은 것입니다. 그 이상 받으실 자격이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친구 동료들이 찾아왔는지 모른답니다.

 평상시 고인이 사람들과 얼마나 좋은 관계를 이루었으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오셨는지요. 발인예배를 드릴 때 보니 동료직원들이 제복을 입고 발인식장을 가득 메웠고 영구차가 나갈 때 그 분들이 빠져나가간 주차장을 보니 텅 비더군요. 만약 미운사람 많고, 서운한 감정 있는 사람 많고, 싫은 사람 많았다면 이런 관계가 되었겠어요? 그런 중 더욱 감동되는 것은 유가족들이 먼저가신 성도님을 생각해보니 주님 위해서 일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성도님의 이름으로 1030을 한 구좌를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우는 것은 너무도 중요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복된 교회가 이곳에 세워진 후 얼마나 많은 영혼이 교회를 통해서 구원받고 성장하고 믿음의 터전을 삼아 하나님과의 거룩한 교제를 이루고 있습니까?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혹여 성도는 세상을 떠나고, 목회자는 은퇴를 해도 교회는 남아서 영혼을 구원하고 양육하고 선한 일을 감당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줄 믿습니다.

 2.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두 번째로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따라해 보실까요.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저주와 모욕은 말로써 하는 것입니다.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나에게 저주의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말로 그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저주하는 말을 들었다고 생각해 보세요. 속이 끓어서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보통 사람은 한 마디 저주를 들으면 열 마디 저주를 합니다. 되로 받고 말로 주는 것이 아니라 가마니로 줍니다. 내가 누구에게 저주 한 마디를 들으면 그것에 앙갚음을 하고 악한 말로 저주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 우리들의 일반적인 삶이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누가 너를 저주하면 축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또한 이런 의미가 됩니다. ‘네가 그를 위해 축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너에게 저주가 온 것이다.’ 내가 누군가를 축복해서 그 축복이 그에게 임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저주합니까? 왜 그가 나를 저주합니까? 내가 그에게 저주의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숨겨진 말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내가 축복하면 그 축복이 그 사람에게 들어가고 아무리 은밀히 말해도 저주하면 그 말이 그 사람에게 들어갑니다. 누가 나를 저주했다는 것은 내가 이미 그 사람을 저주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그 사람을 안 좋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도 나를 안 좋게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나를 저주하거든 이렇게 생각하십시오. ‘내가 그에게 좋지 않은 말을 했기 때문에 그도 나에게 안 좋은 말을 하는구나! 이제부터 내가 그를 축복해야 되겠구나!’ 처음에는 축복을 해도 저주로 들려오겠지만 나중에 언젠가는 그 사람도 알게 되어 자기 입술이 부끄러워져서 어느 순간에 저주가 축복으로 바뀌게 될 줄로 믿습니다.

 누가 나를 모욕하는 말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요즈음엔 인격적인 침해가 얼마나 무섭습니까? 이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이미 모욕적인 말을 했기 때문에 나에게 모욕적인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님의 교훈은 그를 위해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남에게 듣기 싫은 말, 모욕적인 말, 상처 되는 말들을 들었을 때 이렇게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말을 줄이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나를 저주하는 말을 들었다할지라도 아니면 어떤 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들었다할지라도 그 말이 나에게 와서 멈춰지게 되기를 바랍니다. 좋지 않은 소문의 종착역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복된 사람입니다. 터미널이 되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인천에서 출발한 버스가 서울도 가고 부산도 가고 대전도 가고 전국으로 가는 것처럼 터미널이 되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팔 부는 사명을 가진 사람은 복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누가 나를 욕하면 ‘아! 내가 저를 축복하지 않았구나. 저를 축복하라고 주신 메시지이구나.’ 누구를 비난하는 소리를 들으면 ‘아! 내가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주신 메시지이구나.’ 라고 생각해야합니다.   
 
 늑대에게 원수 같은 여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밀림의 왕 사자가 병이 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동물들이 사자에게 병문안을 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여우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늑대는 바로 이때라고 생각하고 사자에게 여우의 잘못을 미주알고주알 모두 고해바쳤습니다. 늑대가 “분명 여우는 폐하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오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말하는 바로 그때 여우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늑대의 마지막 말을 들었습니다. 늑대의 말을 들은 사자는 여우를 보자 노여움을 터뜨렸습니다. “여우 네 놈은 내가 아픈데도 병문안을 오지 않느냐?” 그러자 여우는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습니다. “폐하! 이 많은 동물들 가운데  폐하를 중심으로 존경하는 자가 누가 있습니까? 제가 늦은 것은 폐하께서 병이 드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름난 의사를 모두 찾아다니면서 폐하의 병을 고치는 방법을 배워 오느라 이렇게 늦었습니다.” 그러자 노기를 발했던 사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면서 배워온 그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여우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였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늑대의 생가죽을 벗겨서 식기 전에 아픈 곳에 붙이면 나을 줄로 사료됩니다.” 그 날 늑대는 가죽이 벗겨진 송장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답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한 나쁜 말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말해줍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지 마십시오. 남에 대해서 왜 그리 관심이 많은지 모르겠어요. 어떤 남자 집사님이 술집에서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을 내가 목격했으면 그것을 놓고 기도해야 됩니다. 그런데 소문내고 싶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문내는 사명을 띤 것처럼 소문내기 시작합니다. 소문은 점차 살이 붙어서 여자하고 술집에서 나왔다고 소문이 납니다. 그러다가 술집에서 같이 나온 여자하고 딴 살림을 차렸다고 소문이 납니다.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십시오. 누군가의 약점과 문제를 보았다 할지라도 내 입을 통해서 그 문제가 확산되도록 하지 마십시오. 이런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나를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축복을 할 정도의 사람이라면 누군가의 약점이 보였을 때 덮어주거나 위해서 기도해주는 정도는 쉽게 이루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고 저주하고 모욕하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축복하고 용서의 기도를 하셨습니다.

3.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세 번째로 원수를 사랑하는 방법은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원어적으로 보면 뺨이 아니라 턱이라고 합니다. 뺨을 때리는 것은 모욕적인 것이지만 턱을 때리는 것은 폭력입니다. 턱을 잘못 맞으면 죽습니다. 이는 누가 나에게 폭력을 가할 때 같이 폭력으로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폭력은 폭력을 부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폭력은 행위로서의 폭력도 포함되지만 언어폭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처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가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프고 평생 지워지지 않는 언어폭력의 악순환을 끊으라는 것입니다. 혹 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했다할지라도 되돌려 갚지 말라는 것입니다.

 36절을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사랑은 바다와 같습니다. 어떤 흙탕물 어떤 더러운 물도 바다는 거부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여서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여러분! 원수를 사랑하는 작은 것부터 실천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감정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그를 위해서 칭찬하고 축복하시기를 바랍니다. 누군가를 정죄하고 싶으면 그를 위해서 축복하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누군가가 나를 욕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습니까? 주님을 교훈을 기억하면서 주님의 제자답게 그를 위해서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오는 것처럼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우리가 실천할 수 있는 일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6:27~36
6장
27 그러나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28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29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30 무릇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지 말며
31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32 너희가 만일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느니라
33 너희가 만일 선대하는 자를 선대하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34 너희가 받기를 바라고 사람들에게 빌리면 칭찬받을 것이 무엇이뇨 죄인들도 의수히 받고자 하여 죄인에게 빌리느니라
35 오직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며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빌리라 그리하면 너희 상이 클 것이요 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리니 그는 은헤를 모르는 자와 악한 자에게도 인자로우시니라
36 너희 아버지의 자비하심같이 너희도 자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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