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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사랑하는 네가지 방법
누가복음 6:37~38 유우열 목사 2010-08-15
원수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법 네 가지(눅6:37-38)

 지난 주일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설교를 듣다보면 마음에 상당히 부담이 되지요?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원수를 사랑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우리가 지키기 쉬운 말씀이 결코 아닙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하고 원수를 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지 그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는 순종해야 됩니다. 쉽게 노력 없이 지키기 쉬운 것은 별로 가치 없는 일입니다. 나의 삶을 쏟아 부어서 지켜야만 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이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속에 새기시고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원수의 개념을 다시 한 번 정리해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원수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나의 주변에 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부모를 죽인 원수 있습니까? 그런 원수는 중국영화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원수의 범위는 내 부모를 죽인 원수 같은 원수가 아니라 내 주변에 있으면서 나와 어떤 감정과 갈등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원수라는 것입니다.

 대개 싫은 사람, 미운 사람, 섭섭한 사람, 이해관계에 얽매인 사람,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 이념적인 노선이 다른 사람 들이 원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네 집안 식구가 네 원수라고 하셨습니다. 집에는 원수 같은 남편이 있고 원수 같은 아내가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고부간의 관계도 원수 같은 관계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형제간의 관계도 원수 같은 관계가 있습니다. 미국에도 원수가 있지 않고 중국에도 원수가 있지 않습니다. 원수는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주변에 있는 사람이 원수입니다. 멀리  있지 않고 주변에 있으면서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갈등의 골이 깊어져서 얼굴 보기가 싫은 사람들이 원수입니다. 이런 원수들과 좋은 관계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나를 미워하니까 똑같이 미워하고 그들이 나를 욕하니까 똑같이 욕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비록 갈등관계 속에 있지만 어떻게 하면 이런 원수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들을 사랑하면서 섬기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 것인가 하는 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적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미워해야할 원수도 있습니다. 바로 마귀입니다. 그리고 북한의 김정일도 대적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정일이 무너지도록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사람의 아니면 몇몇의 안전과 편안을 위해서 수많은 동족들을 고통의 구렁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정치수용소에는 수십만 명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사람이 할 일입니까? 이들은 우리가 분명히 대적해야할 원수입니다.   

 그러면 나의 주변에 있는 원수들을 어떻게 하면 사랑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는 네 가지 방법을 가르쳐주셨습니다.

1. 비판하지 말라.
 첫 번째는, 따라해 보실까요. “비판하지 말라.” 원수관계는 비판하고 싶은 관계입니다. 뒤에서 흉보고 수군거리고 잘못된 점, 약점을 들추어내고 싶은 것이 원수입니다. 또 비판함으로 말미암아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비판하지 마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아니할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비판을 하면 비판을 받게 되고 비판하지 않으면 비판을 받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나와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을 비판함으로 많은 상처를 받게 됩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 16강을 이룬 축구 감독 허정무씨에게 국가대표 축구 감독을 계속 맡아 줄 것을 부탁했을 때 손사래를 치면서 거절한 이유가 있었는데 다름 아닌 비판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한번만 경기에서 지면 입에도 담을 수 없는 비판이 쏟아져서 무시해 버린다고 생각 하면서도 실은 마음에 큰 상처가 되었답니다. 이런 비판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것이 영광스런 축구감독을 고사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했습니다.

 비판은 상대방에 상처를 남기는 무서운 행동입니다. 칼로만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말로도 죽입니다. 칼보다 강한 것이 펜이라고 했는데, 사실 칼보다 더 강력한 무기는 비판의 말입니다. 비판을 하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도 원수가 되기도 합니다. 또 비판은 이미 원수가 된 사람에게 원수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비판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 찾아보면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는 것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마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은 판단해야 합니다. 진리인가 비 진리인가도 판단해야 합니다. 이단인가 정통적인 복음인가도 판단해야 합니다. 그런 비판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나와의 관계 속에서 감정의 골이 깊어져서 그 사람을 향한 자기의 편견을 가지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과 어쩌다가 좋지 않는 관계가 되었습니까? 그를 칭찬하고 비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가 듣지 않는 곳에서라도 그를 비난하고 욕하면 그 관계는 점점 멀어집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그를 축복하고 칭찬하고 기도하고 비판하지 않으면 좋은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대개 비판은 자기 기준이나 편견에서 나옵니다. 자기 기준은 자기가 볼 때는 항상 옳지만 상대방의 기준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자기는 정의이고 상대방은 불의라는 기준을 정해서 그렇습니다. 자기의 생각과  감정과 기준을 가지고 남을 비판하는 것이 일반적인 비판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0 센티 자가 하나 있었습니다. "난 길이와 넓이 등 뭐든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걸" 하며 재고 다녔습니다. "넌 길이가 5.4 센티야" "넌 키가 9.8 센티 밖에 안 돼" "넌 코의 넓이가 6.2야." "10 센티도 안 되는 것들이 까불어" 라며 남을 비판했습니다. 다들 이 10 센티 자가 항상 수치로만 남을 평가하는 점이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10 센티 자는 저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울은 무조건 자를 저울 위에 얹어놓고는 "넌 겨우 5 그램짜리구나……. 짜식! 아주 가벼운 놈이 잘난 척하고 있군, 저리 비켜, 잽도 안되는 게……."하고 비웃더니 가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10 센티 자가 엄청난 상처를 받았답니다. 우리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자와 저울을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합니다. 절대적인 기준이 아닙니다. 성경적인 진리의 옳고 그름도 아닙니다. 내 감정상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내 편견상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남을 평가하는 기준을 내려놓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결코 내 입으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 평가하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와 비 진리를 혼합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편견과 감정을 바탕으로 남을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익명을 이용해서 심각할 정도의 비판을 쏟아내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비열한 일입니다. 우리교회 홈페이지에도 실명을 밝히지 않고는 어떤 평가를 할 수 없도록 되어있습니다. 요즈음 포털사이트에 익명으로 댓글 다는 것을 보십시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비판적인 글들이 많습니다. 

 비판은 상대방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내 뱉는 말입니다.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씨가 세상을 떠났는데요. 이런 댓글이 있더군요.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말투나 의상 등 보여지는 부분으로 비웃기만 했었습니다. 그런데…….당신의 빈자리를 보면서 참 좋은 분이셨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비판이란 이런 것입니다. 상대방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서 자기가 가진 느낌과 편견으로 타인을 나쁘게 판단하는 것입니다.

 비판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근질할 때가 있습니다. 누구에 대해서 누구에게 한 바탕 쏟아 붓고 나면 시원한데.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말고 축복하고 기도하라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치심입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내 감정대로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감정을 맞추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맞추는 것입니다. 내가 편안한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인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 문제점은 신앙생활의 중심이 나라는 것입니다. 내가 편안하고 내가 잘되고 내가 행복하고 내가 형통하면 그만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닙니다.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근본적인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2. 정죄하지 말라.
 두 번째는, 따라해 보실까요. “정죄하지 말라.” 비판한다는 것은 자기의 감정과 편견을 기준으로 남을 평가하는 것이라면 정죄는 정확한 근거를 가지고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선고하는 것입니다. 명백하게 실정법을 어겼지만 정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선악을 구분하지 말라는 말은 아닙니다. 선악은 분명히 구분해야 됩니다. 그러나 내가 누구를 정죄하는 자리에 서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을 철저히 구분해서 악을 행하지 아니하고 죄를 짓지 않는 삶을 살아야하지만 자기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누군가를 정죄하는 것은 금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누구를 죄인으로 정죄하는 순간 자기는 하나님의 자리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정죄를 내가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정죄하지 말고 원수를 축복하고 기도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이외에 우리는 누구도 완벽한 인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정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우리는 누구를 정죄하지만 내가 그런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의 사건을 아시지요. 바리새인들이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을 머리채를 잡아끌고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손에는 돌을 들고 이 간음한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바리새인의 질문은 예수님을 곤란하게 하고자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긴 자가 될 것이고 치라고 하면 자비가 없다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명언 중에 명언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아무도 돌로 치는 자가 없었습니다.

 물론 옳고 그른 것을 구분하지 말고 두루뭉술하게 다 넘어가라는 말을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도 같은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나에게 명백하게 죄를 지은 사람일지라도 원수처럼 대하지 말고, 정죄하지 말고 화목하게 지내야 한다고 교훈하십니다. 우리는 모두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 흉악한 죄인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어떤 죄라도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사실을 어느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들킨 죄인과 안 들킨 죄인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에게 죄가 들킬 수도 있고 들키지 않을 수도 있는 두 가지 경우뿐이지 모두가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십니다.

3. 용서하라.
 세 번째는, 따라해 보실까요. “용서하라.” 주님께서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용서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은 용서도 아닙니다. 용서가 안 되는 것을 용서해야 되기 때문에 용서가 어려운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용서를 하라는 것입니다.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분들의 논리 가운데 중요한 것이 사형엔 용서가 없기에 반대 한다고 합니다. 개개인에 따라서 의견이 다르지만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쪽에 서는 분들이 많습니다. 기독교에만 있는 최고의 축복이 용서입니다. 어떤 죄라도 회개하기만 하면 다 용서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는데 사람이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는데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주 잔인하고 파렴치한 범죄자는 사형을 시켜서 다시는 그런 죄가 생기지 않도록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한다는 취지도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용서가 없다는 부분에 있어서 사형 제도를 반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해주신 것을 생각해볼 때 용서가 아무리 힘든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만약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면 내가 사형집행자의 자리에 앉아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입니다.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원수를 용서하지 않는 것은 마음으로 사형하는 것입니다. 어떤 물질적, 신체적, 정신적인 손해와 상처를 입혔다 할지라도 용서하여야 합니다. 용서가 잘 안 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주님! 아무개만 생각하면 용서가 안돼요. 손이 떨려요.’ 그래서 우리가 기도하면서 성력의 능력을 구하는 것입니다.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원수를 사랑하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내가 누군가를 용서 못할 일이 있다면 나는 또 남에게 어떻습니까? 내가 남에게 어떤 피해를 준 것이 없다고 해서 남에게 용서받을 만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까? 용서는 자신을 사랑하는 행위입니다. 혹시라도 내 가족 안에 교회 안에 이웃 중에서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이런 글을 읽으면서 감동이 되었습니다. 이 분은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남편이 용서되지 않는 분이 있나요? 결혼을 했는데 남편은 거의 매일 집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도박하고 술 먹고 그러다 어쩌다 집에 들어오면 폭력을 행하였습니다. 이혼을 마음먹었으나 이미 아이가 생겼습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좀 나아지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첫째 아이를 낳아도 둘째 아이를 낳아도 남편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밥을 먹다가 남편이 숟가락을 자꾸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병원에 가보니 ‘소뇌 위축증’이었습니다. 근육이 마비되어 죽는 병입니다. 이때부터 아내는 남편 병간호를 하며 5년을 지냅니다. 결국 남편은 빚만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세상을 떠나던 해, 아들이 대학에 입학을 했으나 돈이 없어 군에 입대합니다. 그리고 둘째도 자라서 대학에 합격했으나 등록금을 낼 돈이 없습니다. 궁리 끝에 집을 줄여 이사를 합니다. 누가 원수 같습니까? 남편이 원수 같습니다. 평생 짐만 주고 간 남편 죽어서라도 ‘이혼’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삿짐을 싸다가 우연히 남편의 편지 발견했습니다.
 
 애들 엄마에게……
 당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남편이오! 그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를 보살펴줘서 고맙소! 날마다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지만, 행여나 당신이 날 용서할까봐 말 못했소. 난 당신에게 미움 받고 원망 받아야 마땅하니까. 이런 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것 같지만… 여보, 사랑하오! 그리고 날 끝까지 용서하지 마오! 하나님께서 이놈을 용서해 천국에서 당신을 다시 만나면, 그때는 좋은 남편, 좋은 아빠가 되어주겠소!

 남편을 증오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편지를 읽으면서 마음으로부터 죽은 남편을 용서했다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 아내의 마음에 평안이 오고 마음에 진정한 기쁨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용서는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상이 되는 사람을 위해서도 하는 것입니다. 

4. 주라.
 네 번째는, 따라해 보실까요. “주라” 여기서 주라는 것은 선물을 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원수에게 선물을 주라는 것입니다. 잠언 19장 6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그러운 사람에게는 은혜를 구하는 자가 많고 선물 주기를 좋아하는 자에게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느니라” 원수가 변해서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아이, 저 인간 같지도 않은 것에게 내가 주어야 되나?’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그런 이에게 오히려 더 선물을 주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원수가 없는 것 같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원수가 많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게 갈등과 골이 깊어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싫은 사람이 많아졌고 마주치기 싫은 사람도 생겼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도 아니고 가족 안에서, 교회 안에서, 직장 안에서, 이웃 안에서 이러한 일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그들을 비난하고, 정죄하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가르침대로 그들을 축복하고, 칭찬하고, 기도하고, 용서의 마음을 가지고 선물을 줄 수 있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러한 실천을 통해서 원수가 없어지고 오히려 그들이 우리의 사랑을 통해서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6:37~38
6장
37 비판치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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