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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발견
누가복음 6:39~45 유우열 목사 2010-08-22
자기 발견(눅6: 39-45)

 자기발견이란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 66권 중에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는 중점이 되는 부분이 있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어떤 분은 히브리서가 성경중의 성경이라고 말 합니다. 또 어떤 분은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요한복음 3장 16절이 성경중의 요절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의 산상수훈이 성경중의 성경이 아닐까하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마태복음과 함께 읽는 공관복음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한 부분입니다. 이 산상수훈을 황금률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이러이러하게 살아야 한다고 하는 삶에 관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서 주님을 따라간다면 이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고 애쓰는 성도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산상수훈을 우리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면서 나아가는 복된 성도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가는 자입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성도입니다. 빌립보서 3장 20절에 보면 천국시민권을 가진 자요 베드로전서 2장 9절에 보면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엄청난 신분을 가진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살아갈 때 삶속에서 좋은 열매가 있게 될 줄로 믿습니다.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우리 자신을 발견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잘 알 것 같지만 사실은 내가 나를 잘 모릅니다. 저는 요즈음 목양실에서 하덕규 전도사님의 찬양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이분이 전도사님이 되기 전에는 시인과 촌장이란 그룹의 가수였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전도사님이 되어서 지금은 복음성가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분입니다. 이분이 작사 작곡하고 가수 조성모씨가 노래한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는데요. 제가 참 좋아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를 들어보면 ‘나’ 라는 존재가 이렇게 복잡하고 미묘한 존재로구나! ‘나’ 라는 존재는 어쩔 수 없는 존재로구나! 하는 것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 노래를 들어보겠습니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이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한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네”

 내가 무성한 가시나무숲 같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성한 가시나무숲을 생각해 보세요. 가시나무숲처럼 누군가를 향해 가시를 드러내고, 자신에게도 가시를 들이대는 도대체 알 수 없는 문제 많고 상처 많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서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도 나에게 와서 쉴 수 없고 평안을 얻을 수 없는 자기를 바라보면서 비애 하는 노랫말입니다. 이렇게 되고 싶지 않는 나의 모습이지만 돌아보면 자기의 모습은 가시나무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얼마 전 ‘나를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책을 읽다가 정말로 ‘나’라는 존재가 참으로 복잡하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내가 나를 너무 잘 알 것 같은데 실상은 내가 나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저는 정말로 말이 없는 사람입니다. 특히 남의 말 하는 것 정말로 싫어합니다. 그런데 누구를 보니까 그 사람 정말로 말이 많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람과 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듣는 제가 보기에도 말이 많은데 자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말 없는 사람은 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말이 많은 자기는 모르면서 말 많은 누구를 비난하고 있기까지 합니다. 자기를 의로운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나를 발견하는 것이 지혜 중에 지혜인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바로 알고 이 세상을 살아갈까요? 에리히 프롬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태어나기 전에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을 발견하지도 못한 채 죽거나 자신을 만나 보지도 못한 채 죽는 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을 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지혜이겠습니까? 인생을 살아가면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발견중의 하나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으로서의 나를 발견하고 인간의 한계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신의 무한한 은혜와 능력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그래서 우리의 삶에 역사와 변화가 일어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자기를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잘못된 자아를 가지고 있는 한 부류의 사람들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입니다.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처럼 이중적이고 추악하고 외식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매우 경건한 자들이라고 스스로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은 흠이 없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렇게 자기를 평가하는 것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얻은 스스로의 평가입니다. 

 누가복음 18장 11절에 보면 바리새인들은 기도할 때에도 따로 서서 기도하면서 자신들은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한다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늘 죄 있고 흠 있는 누군가를 보면서 자신은 저들과 같지 않다고 비교하여 평가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것 속에서 자기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심각한 오류가 있는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저 사람 같지 않아. 저 사람은 인간도 아니야. 나는 그 보다 나아. 나는 그 보다 깨끗해. 나는 그 보다 인격적이야. 나는 그 보다 봉사도 많이 해. 나는 그 보다 선한 일도 많이 해.’ 하고 비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을 발견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이 있으면 비난하고 정죄하고 욕하고 수군거립니다. 자기보다 나은 사람이 있어도 그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약점을 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셔도 그 말씀을 아멘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3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가리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맹인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면서 스스로를 의로운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상담가 로저스의 말에 의하면 대개 사람들은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를 통해서 자신에 대한 개념들이 형성되어 진다고 합니다. 이를 사회비교이론이라고 하는데 자기를 타인과 비교하여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자기 개념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기가 자기의 행동을 보면서 스스로 자기 개념을 갖는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자기를 발견하거나 아니면 자신의 행동을 보면서 자기를 발견한 바리새인들은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사람이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려면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기를 알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습니까?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히브리인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자요.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요.” 그래서 그는 남을 정죄하는데 앞장섰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죄인중의 괴수입니다. 나는 만삭되어 나지 못한 자와 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후 이러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을 보면 선지자 이사야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납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사야 6장 5절 말씀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을 만남으로 부정한 입술을 발견하고 망하게 된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5장에는 시몬 베드로가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잡는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주님 발 앞에 꿇어 엎드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소서” 라고 말합니다. 죄인 된 자기를 발견한 것입니다.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가 죄인된 것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반대되는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막달라 마리아와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도 스스로가 자신이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참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두 가지의 자기를 발견해야 합니다. 첫째는 죄인 된 나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죄인 된 나” 둘째는 거룩한 나입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거룩한 나” 죄인 된 나를 발견해서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것이고 거룩한 나, 하나님의 자녀 된 나,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나를 발견하게 됨으로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통해서 죄인 된 나를 발견하고 거기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늘 죄의식에 매여 삽니다. 물론 죄 된 자기를 발견하고 죄에서 승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거룩한 나를 발견할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거룩한 나라는 것은 윤리적으로 내가 완전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분으로서 거룩한 신분을 소유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거룩한 신분의 사람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6절에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전 삼으시고 우리 안에 거하시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놀라운 나의 발견입니다. 즉 거룩한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제사장들이 윤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해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우리를 구별해 주셨기 때문에 거룩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주로 영접하면 죄 용서함을 받고 그 즉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6장 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내가 거지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왕자인 것입니다. 내가 죄인인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내가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성결하게 하신 것입니다. 거룩하게 하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약속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므로 대단한 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가슴을 두드리며 말해 보십시오. “대단한 나야”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나, 하나님의 자녀 된 나를 발견한 것입니다.

2. 자기를 잘못 알고 있는 바리새인
 이러한 나를 발견해야 하는데 바리새인은 자기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를 알고 있다고 말하지만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기준에 의해서 자기를 안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절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고 할 수 있느냐”

 우리는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 안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율법 안에서 자기를 발견한 사람들의 특징이 끊임없이 누구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율법의 기준으로 타인을 보기 때문입니다. 또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용서하지 못합니다. 눈 속에 어떻게 들보가 들어가겠습니까? 들보는 집을 바치는 기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목수이셨기 때문에 모르고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과장된 비유를 하신 것은 자기를 모르는 자들이 이처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정죄의 기능이 있습니다.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해서 자신들의 죄를 보고 그 죄로 말미암아 스스로 위축되고 남의 죄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삶에는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연구해서 613가지 계명을 쪼개 놓았습니다. 그 중에서 365가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해 놓고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판단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치신 일을 가지고 율법을 기준으로 해서 죄인지 아닌지를 따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자유를 알지 못한 자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 몸에 가시를 곤두세우고 누군가가 다가오기만 하면 찌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모습이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만약 이런 모습이 있다면 오늘 주님의 보혈 앞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주님 앞에서 모든 죄를 내려놓고 용서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용서 받은 후에 용서 받은 기쁨과 감격으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율법아래서 죄인 된 나를 발견한 사람에게는 이러한 특징이 나타납니다. 자기의 죄에 대해서는 관대하고 남의 죄에 대해서는 무자비할 만큼 날카로운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에 관한 글이 있어서 적어보았습니다.

그와 나
만일 그가 그의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그는 게으르다 하고, 내가 일을 끝내지 않았다면 나는 너무 바쁘기 때문이라 합니다. 만일 그가 자기 관점을 주장하면 고집쟁이라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개성이 뚜렷해서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가 나에게 말을 걸지 않으면 콧대가 높아서 그렇다 하고, 내가 그렇게 하면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가 친절하게 하면 나로부터 무엇을 얻기 위해 친절하다 하고, 내가 친절하면 그것은 나의 유쾌하고 좋은 성격 때문이라 말합니다.

 이러한 사람에게서 어떻게 좋은 열매가 맺혀지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못된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를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요?

3. 자기 발견
 단 한 가지 방법은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나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나를 발견하게 되면 이 때 부터 우리의 삶에는 놀라운 변화와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억만 가지 죄를 용서 받은 나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을 생각하면 누가 나에게 잘못했을 때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용서 받았으니까 남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거룩하다는 것을 알 때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요한일서 3장 2절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 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내가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장차 주님과 같이 될 존재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일서 3장3절에는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거룩해진 나, 하나님 안에서 자녀 된 내 신분, 정체성이 분명하면 이것 때문에 우리의 삶이 관리가 되는 것입니다. 옛날 양반들은 뛰어다니지도 않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비가와도 뛰지 않았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인 양반인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니까 누가 나를 욕해도 ‘그럴 수 있지’ 하고 넘어가고 누가 나에게 손해를 끼쳐도 ‘손해 날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8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그래야 우리의 삶에서 좋은 열매들이 맺혀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자신을 율법 안에서 발견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발견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끊임없이 남을 비난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받은 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구원 받은 나를, 하나님의 자녀 된 나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 신분 때문에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고 용납할 수 있고 이해 할 수 있고 때로는 남의 명백한 허물이 보일지라도 덮어줄 수 있는 주님께서 주시는 삶을 살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6:39~45
6장
39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할 수 있느냐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지 아니하겠느냐
40 제자가 그 선생보다 높지 못하나 무릇 온전케 된 자는 그 선생과 같으리라
41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42 너는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형제여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할 수 있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네가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리라
43 못된 열매 맺는 좋은 나무가 없고 또 좋은 열매 맺는 못된 나무가 없느니라
44 나무는 각각 그 열매로 아나니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또는 찔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하느니라
45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의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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