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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믿음
누가복음 7:11~17 유우열 목사 2010-09-19
부활 믿음(눅7:11-1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과연 얼마나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믿음이라는 것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믿음에는 차이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언약입니다. 나이 칠십오세였지만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이 언약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으로 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 땅으로 갔지만 하나님은 가나안에 도착하자마자 즉시 자녀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자그마치 25년을 기다리게 한 후에 주십니다.

 기다리는 것이 믿음입니다. 요한복음 5장에 보면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가 고침을 받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른 말로 말하면 38년 동안 고침을 받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쳐주실 것을 38년 동안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38년이 지나도록 낙심하지도 않고 인내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병자에게 예수님께서는 찾아가 주시고 치료하신 줄로 믿습니다. 

 아브라함이 자녀를 기다리는 25년은 어떤 기간일까요? 믿음 훈련 기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손을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어질 정도로 나이가 들었지만 그래도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믿음의 조상이었던 아브라함도 순간 의심하여 하갈을 첩으로 얻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믿음으로 승리하고 100세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낳게 됩니다.

 아브라함에게 25년을 기다려서 아들을 낳게 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나는 하나님이다. 내가 네가 약속한 언약 잊지 않았다. 네가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면 내가 이렇게 역사한다.”라는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즉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알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셨던 대로 백세에 아들을 낳고 아브라함은 진정한 하나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은 정말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머릿속에 생각만으로 가지고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응답의 하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수요일 저녁에 출애굽기를 강해하고 있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보면 이 사건 역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과 애굽과 주변 민족에게 알리시는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넓고 편한 길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지 않으시고 일부러 광야 끝 해변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애굽의 군대가 추격을 해오는 상황이 이루어집니다. 이 때 백성들이 원망하며 소동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출애굽기 14장 13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따라해 보실까요. “문제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다.”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하나님, 문제 가운데 나를 도와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 인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이심을 온 백성이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즉 홍해가 갈라지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만천하에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성도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고, 신뢰하고, 순종할 때 기뻐하시고 능력을 베푸시고 축복하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게 되면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이루어집니다. 백세에 아들을 주셔서 아들을 얻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을때에 생산할 수 없는 태를 여시어 새 생명 이삭을 주신 하나님께서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지 못하시겠느냐는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았기 때문에 이런 순종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게 되기를 바랍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믿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부활 신앙을 선포하신 주님
 오늘의 말씀은 나인 성에 과부의 외아들이 있었는데 이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장사를 치르려고 장지로 가는 도중 예수님을 만나 죽은 외아들이 살아나는 내용의 말씀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말씀이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은 이해되는 말씀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죽은 외아들을 살려주는 것을 통해서 예수님은 백성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요? 자기 선언을 하고 싶으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기적을 보고 사람들이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약속하신 메시야이십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분이십니다.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하고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으면 되는데 이런 기적을 보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16절 말씀을 보면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고 말합니다. 엘리야나 엘리사 같은 선지자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모습을 보시고 얼마나 안타까우셨겠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내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요. 내 죄를 대신 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천국을 믿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심으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 것이며 또 장차 내가 너희를 위해 죽지만 죽은 가운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라는 부활믿음을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면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예수님과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외아들입니다. 과부의 아들 역시 외아들입니다. 외아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죽었다가 살아나는 역사입니다. 부활입니다.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속에 부활신앙이 든든히 세워지고 주님이 원하시는 부활신앙이 우리의 삶을 지탱해가고 희망차게 만들어 가기를 원합니다. 부활신앙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부활신앙은 인간의 최대의 두려움인 죽음이라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여러분! 죽는 것 무섭지 않습니까? 사람에게는 죽는 것만큼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죽음에 종노릇하는 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무서움도 주지만 절망과 한없는 슬픔을 가져다줍니다. 나인성 과부는 이미 오래 전에 죽은 남편을 메고 성읍을 빠져나가 장사를 지낸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도 절망스러웠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남아있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외아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외아들마저 죽어 장사를 지내러 성문을 빠져나가는 나인 성 과부에게 이 세상에 더 이상의 희망이란 없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남겨진 희망을 앗아가버리는 것입니다. 절망가운데 있는 나인성 과부에게 부활신앙은 희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장차 이 세상을 떠날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부활신앙은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노래할 수 있고 죽음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절망하지 아니하고 나아갈 수 있는 우리의 삶에 활력소가 되는 줄로 믿습니다. 

 금요일 저녁 7시 남성 제자반에서 예수님의 재림 신앙이 나의 생각과 삶을 변화시킨 것은 무엇인지 적어오라는 과제를 내 주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사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어려서부터 계속되었답니다. 군에 입대하는 것조차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있어서 힘들었답니다. 그리고 문득 죽는다는 생각을 하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답니다. 그런데 재림신앙, 부활신앙을 확신하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죽음 너머에 있는 영생을 바라보면서 희망을 갖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재림신앙, 부활신앙은 장례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장례식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돌아가시기 전에 자녀들에게 이렇게 유언하십시오. “내가 죽거든 장례식이라고 말하지 말고 천국환송예배라고 말해라.”

 또 이런 대답도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시고, 죽은 자가 부활하는 믿음을 가지니 현재의 삶을 아무렇게나 살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안타까운 마음이 들고, 해야지 하면서 하지 못하는 일들 즉 선교와 나눔을 위해서 더 실천적인 태도로 살아가야 하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을 살고 끝이 난다면 먹고 즐기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왜 우리가 그렇게 못합니까? 부활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신앙은 내세를 바라보는 재림신앙이지않습니까? 이 신앙이 있기 때문에 그 나라에서 주님을 만나 뵙고 거기에서 얻게 될 상급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활신앙이 있는 사람은 삶을 아무렇게나 살수 없을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의 죽은 가운데서 살아났던 부활신앙은 이천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이 아니라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사건을 모델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승리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2. 슬픔 당한 자 찾아오시는 주님
 본문 말씀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자신의 부활을 알리기 위해서만 과부의 아들을 살리신 것은 아닙니다. 다 같이 따라해 보실까요. “주님은 슬픔당하고 고통당한 자들을 찾아오신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숨어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나오신 것이 내가 주님을 찾아서 나온 것입니까, 주님께서 나를 찾아주신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찾아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고통당할 때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성도의 눈물을 기억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통 가운데 문제 가운데 있을 때 주님을 부르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찾아와 주시고 우리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문제를 만나거든 그 문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지 말고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을 찾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서 믿음의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요? 그들은 믿음이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 더 많은 문제에 둘러 싸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위대한 점은 그런 문제를 세상의 방법으로 풀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으로 나가면 당장에 해결되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동원하면 되거나 힘을 쓰든지 아니면 돈을 풀면 문제가 해결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좀 더디더라도 문제를 주님께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보면 과부의 아들의 죽음이 어느 순간에 다가온 것입니까? 멀쩡하다가 순간에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란 과정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는 나인성과부가 기도했다는 말은 없지만 성경 여러 곳을 살펴보면 나인성과부는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했을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남편도 죽고 자기 생명보다 소중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어가고 있는데 어떻게 부르짖지 않겠습니까? 밤을 새워가며 눈물로 통곡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여인의 눈물의 기도를 들으신 것입니다. 어쩌다 길을 가다 그 여인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계획하신 일인 것입니다. 그때 그 시간에 죽은 사람이 과부의 외아들뿐이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었겠습니까? 

 요한복음에 보면 수가 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다섯 남편을 두었는데 지금 있는 남편도 자기 남편이 아닙니다. 그 인생이 얼마나 참담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마을에 들어가지 않는 관례를 깨뜨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이것은 수가 성 여인을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우연이 그 여인을 만난 것처럼 만나지만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대화하다가 그 여인이 예수님을 메시야인줄 알고 물동이를 내버리고 마을로 들어가서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전하는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우연히 나인 성에 들른 것은 아닙니다. 어디에든지 죽음이 있고, 슬픔과 눈물이 있지만 과부가 하나님을 간절히 찾고 찾았기에 만나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주님께로 가지고 나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가지고 눈물로 기도하십시오. 성경은 신명기 4장 29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그를 찾으면 만나리라” 지금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예수님을 만나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마른 나무에도 새순이 솟아나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예수님이 해답입니다.
 
 도모다까 시모지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사형수였습니다. 탄광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절망적으로 보낼 때 하루는 어머니가 면회를 왔습니다. 어머니를 보고 짜증을 내자 어머니는 “이 보따리 하나는 받아라.”하고 보따리를 놓고 갔습니다. 그 보따리를 열어 보니 성경이 들어 있습니다. 재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보따리를 구석에 던져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다 보니 한 방을 쓰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서 담배를 말아 피웁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시모지의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어머니가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서 주고 간 성경책인데 담배를 말아 피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재수 없다고 던졌던 성경책을 빼앗았습니다. 어머니는 뭐가 좋기에 성경을 주셨을까 싶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합니다. 자석에 붙은 듯이 눈을 떼지 못합니다. 계속 읽어 나가면서 성경에 빨려 들어갑니다.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성경만 읽었습니다. 그 날도 성경을 가지고 탄광 갱도 속에 들어가 일을 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다른 친구들은 모여서 떠들고 있을 때 시모지는 귀찮아서 다른 갱도로 옮겨가서 성경을 읽습니다. 그 순간 벼락 치는 소리가 납니다. 바로 자기가 일하고 있던 갱도가 무너져 함께 일하던 37명이 몰살을 당했습니다. 살아난 시모지는 ‘하나님이 날 살려 주셨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예수님을 만나고 영접하고 모범수가 되었습니다. 감형이 되고 또 감형이 되어서 결국은 살아서 출옥했습니다. 출소해 보니 어머니는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돈을 열심히 벌어서 그 동안 어머니를 모시지 못하고 속 태웠던 것을 후회하면서 양로원을 세웁니다. 양로원만 세운 것이 아니라 또 돈을 벌어서 중학교, 고등학교를 6개를 세웁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주는 교육자 대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사업가에게 주는 사회사업가대상도 받았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인생이 부활합니다.

 관속에 시체가 되어 매장지로 가던 과부의 외아들이 무슨 희망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됩니다. 사형수가 되어 광부로 보내는 인생에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살았으나 죽은 것 같은 인생이지면 예수님을 만나서 그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에 부활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목적 없이 방황하는 삶이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매일 우물가에서 물을 떠가도 날마다 목마른 인생이 예수님으로 인해서 오늘 죽어도 만족하고 내일 죽어도 만족한 목마르지 않는 인생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절망 중에 있고 어떤 문제 가운데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을 만나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부활의 믿음이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부활신앙으로 우리의 삶의 모든 문제들을 극복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인생의 새 역사를 쓰는, 승리하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7:11~17
7장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12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16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7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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