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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누구신가?
누가복음 7:18~23 유우열 목사 2010-09-26
예수님은 누구신가?(눅7:18-28)

 오늘의 말씀은 백부장의 종의 죽을병을 고치시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신 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세례요한이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서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하고 질문합니다. 세례요한이 왜 이런 질문을 했을까요? 혹시 여러분 마음속에는 ‘내가 예수 잘못 믿고 있는 거 아니야?’하는 질문 없습니까?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라는 질문 속에 담겨있는 의미를 찾아보면 예수님의 오실 길을 준비했던 세례요한조차 잠시나마 예수님께서 진정한 메시아 이신지에 대한 혼돈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세례요한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모습이 아니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해서 확신이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자신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이런 능력을 행하고 이런 모습을 가졌을 것이라고 나름대로 메시야 상을 그려보며 생각하고 있었는데 제자들에게서 보고 받은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면 메시아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인데 이런 의문을 가졌을까요?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을 때 세례를 집례한 자입니다. 이 때 세례요한은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의 머리 위로 내리는 놀라운 환상을 본 사람입니다. 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응성을 들었습니다. 이 증거만으로도 세례요한은 예수님께서 구약에 약속했던 메시아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이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은 자기의 제자들이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면서도 어떤 경쟁심도 일으키지 않았고, 오히려 ‘그는 흥해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하면서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또 자신은 메시아의 오실 길을 예비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였을 뿐이며 그의 신발 끈을 풀기에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자기의 겸손을 표현했습니다. 그런 그가 왜 지금 이 시점에서 예수님께 “당신이 오실 그분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누구를 기다려야 됩니까?” 하고 묻고 있는 것입니까?
 세례요한이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일반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환상과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3장 18절로 20절 말씀에서 볼 수 있는 대로 세례요한은 정의감에 불타서 동생의 아내 헤로디아를 자기의 아내로 가로챈 분봉 왕 헤롯의 죄악을 정죄했고, 그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이러한 세례요한은 뒤에 오실 메시아는 더욱 강력하게 정의를 이루고 악의 세력을 심판할 것으로 기대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헤롯의 죄악이나 로마의 악함을 정면으로 공격하지도 않고 대항하지도 않고 심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병든 자가 예수님께 고침을 받았을 때 고침 받는 사람에게는 대단한 일이지만 세례요한이 볼 때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눈먼 자가 눈을 떴다고 해서 헤롯정권이 무너지나요? 귀가 들리지 않던 사람이 귀가 들린다고 해서 로마 정부가 무너지나요? 과부의 죽은 아들이 살아났다고 해서 새 세상이 오나요? 감옥에 갇혀있는 요한에게는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례요한에게 질문이 생긴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누구신가?
 18절을 보면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있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행적에 대해서 빠짐없이 보고를 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수감 되어있던 세례요한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소식 이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식을 듣고 또 들어봐도 예수님께서 어떠한 혁명적인 일을 하신다거나 현실을 뒤엎는 일을 하신다는 소식은 없었습니다. 자기가 기대한 메시야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뒤에 오시는 예수님을 위해서 회개를 외치다가 헤롯의 미움을 받아 수감되었지만 정작 뒤에 오신 예수님은 자신이 수감된 사실에 대해서 어떠한 일도 행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메시아다운 어떠한 능력으로 헤롯에게 기적과 능력을 보이면서 세례요한을 지지하고 헤롯의 잘못을 책망하면서 매우 영광스럽게 자신을 구출할 것으로 기대했었는데 그렇지 않게 되자 제자들을 보내어서 이런 질문을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바로 알지 못하면 세례요한 같은 믿음의 거장도 시대의 사명자도 잠시 혼돈에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에 대해 아는 것은 믿는 성도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바로 알지 못하면 바로 믿을 수 없고 바로 믿지 못하는 믿음의 실패는 모든 것의 실패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22절을 다 같이 일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이 말씀은 정의로운 세상으로의 전복을 기대했던 세례요한과 그 시대의 모든 사람들에게는 전혀 다른 응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이사야는 장차 메시아가 임하시면 그 증거를 보일 것인데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치유되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이사야가 예언했던 그 일을 하고 있다고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전언하신 것입니다. 즉 현실에 뛰어들어 세상을 정의롭게 하시는 메시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로마 정권을 타도하고 그 앞잡이 헤롯을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 것이라는 기대를 이루어내는 그들이 바라는 어떤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당시에 세례요한이나 유대 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아에 대한 환상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달랐습니다. 백성들은 표면적인 현실의 문제를 즉 민족의 해방, 이스라엘의 영광회복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이신 예수님은 근본적이고 영적이며 내적인 문제를 해결하시고자 하셨습니다. 더 이상 이스라엘의 문제가 아닌 인류 근본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구세주만이 아니라 온 인류의 구세주가 되기 위해 오심을 선언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해결하시고자 하셨던 인간 근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우리는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도 행복할 수가 없고 아무리 많은 권력을 가져도 그것으로 진정한 생명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려고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대속의 재물이 되심으로 원수 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이 일을 위해서 오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는 인간의 모든 죄와 저주와 불행의 근거가 되는 원수 사단마귀를 십자가에 못 박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사단 마귀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입니다. 십자가로 승리하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로 정복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례요한도 잠시 오해를 했던 것입니다. 또 오해를 풀지 못했던 무지한 백성들은 주님을 배반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아는 것이 믿음의 출발입니다. 바로 알고 믿는 것이 믿음의 힘입니다.

 과거에 이런 말을 듣고 믿음을 시작한 분도 있답니다. “예수 믿으면 집 없는 사람은 3년 안에 집을 사게 됩니다. 자녀가 없는 사람은 자녀를 얻게 됩니다. 병든 사람은 고침을 받게 됩니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잘못 생각하면 기독교를 매우 곡해시키는 위험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현실 문제를 도와주시고 해결하시는 분이기에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만 하면 그대로 이루시는 마법사가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도우시지만 영혼구원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영혼구원을 위해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현실에서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도와주시기도 하시지만 문제  없는 사람을 어려움 속으로 넣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문제없는 사람을 문제에 빠뜨립니다. 그래야 문제 가운데서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문제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시며 내가 너의 구원자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눈 먼 자를 보게 하시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고 하심은 예수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영원히 행복할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고침 받아도 죽습니다. 문제를 해결 받아도 또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고쳐주시고 문제가운데서 해결해 주셨습니까? 그것은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다시는 죽음이나 질병이나 고통이 없게 될 것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나아가길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만나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 장님 코끼리 만지기 식으로 자기의 주관을 따라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예수님을 바로 알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보기를 원하는 것을 보아야하는데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얻으라고 하시는 것을 얻어야 하는데 내가 얻고 싶은 것만 얻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얻으라고 하시는데 우리는 물질과 육체의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2.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그래서 주님은 23절에서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이런 모습을 많이 보아왔습니다. 10여년을 교회 다니고 나서 “믿어봐야 아무 소용없네.”라고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교회에 3년만 다니면 집산다고 해서 그 말을 믿었는데 전세 살던 사람이 월세로 내려앉았답니다. 그래서 믿어봐야 소용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잘못 본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안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가 믿어야할 예수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세상적인 기대에 부풀었던 사람들과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은 병 고침, 떡을 주는 것, 정치적인 해방, 현실문제 해결에만 오로지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그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는 예수님을 향해 등을 돌렸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서 행여 정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것을 바라보지 못하고 곁가지만 붙잡는 것은 아닌지, 본말이 전도되는 신앙은 아닌지 되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게 하시기 위해서 병을 고치시거나 기적을 행하셨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보지 못하고 기적만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눈먼 자들을 고치셨나요? 예수님께서 세상의 모든 귀머거리를 듣게 하셨나요? 그것은 아닙니다. 이들을 고치신 이유는 “너의 영의 눈이 열려져라. 영의 귀가 떠져라. 그래서 볼 것을 보고 들을 것을 듣고 세상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라.”는 소망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양식임을 알게 하시려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와서 나를 먹고 마시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아이심을 사람들이 알고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매일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것이 아닙니다. 두 번 행하셨습니다. 한번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또 한 번은 보리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사람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이시면서 자신을 나타내셨지만 아무도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보면서 사람들은 앉아만 있으면 다 나누어 주실 것이라는 환상에 잡힌 것입니다. 예수님이 임금만 되면 농사짓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가난이 떠나갈 것이며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주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향해 엉뚱한 기대만 가졌던 사람들은 실망하고 돌아섰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종려주일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이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웃옷과  종려나무가지를 꺾어서 바닥에 깔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습니다. 물론 바리새인들이 사람들을 매수해서 충동하기도 하였지만 이 사건 속에는 예수님에 대한 군중들의 실망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힘없이 로마법정에 서서 아무런 저항 없이 심판을 받으시자 예수님께 실망한 군중들은 예수보다 바라바를 택하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다고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한 모습으로 고난을 받으신 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한 몸에 지신 속죄의 어린양이 되시기 위함입니다. 그 죄를 한 몸에 안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위해 심판받으신 것을 군중들이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시 여러분 가운데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세상 적이고 이기적인 목적을 해결받기 위해 예수님을 찾는 분들은 없으신가요? 물론 믿음의 시작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적으로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만 주님을 찾게 된다면 결국은 실망만 않고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믿어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을 하고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의 모든 죄를 해결해주시고 잠시 사는 세상에서도 나와 동행하셔서 이 세상에서 승리하게 하시고 이 세상 떠나는 날 영원히 하나님 나라에서 영광중에 영생의 축복된 삶을 살게 하실 분이시라는 것을 깨닫는 성도는, 또 그러한 목표를 하나님 나라에 두고 나아가는 성도는 그 믿고 나아가는 길에 환란과 핍박이 아무리 올지라도 예수를 부인하지 아니하고 주님만 믿고 따라가는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런 노래가 있습니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바로 알아야 부인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두 가지 태도가 나타납니다. 한 가지는 그 발 앞에 무릎 꿇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시며 나의 전부, 나의 왕, 나의 생명, 나의 목적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며 다른 한 가지는 시대의 사기꾼, 거짓말쟁이라고 하면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례요한이 질문했던 “당신은 누구십니까? 다른 것을 믿어야 됩니까?”라는 질문을 내면에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찾는 예수는 어떤 예수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예수입니까? 그렇다면 진정한 예수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이 한 부분만 붙잡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현실의 문제도 해결하시지만 현실에 매몰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은 궁극적으로 영혼의 문제를 해결하시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성도는 환란 속에서도 주님만이 위로가 될 것이며 문제 가운데서도 주님만이 희망이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나로 인해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 나를 따라올 수밖에 없는 사람, 나를 전부라고 믿고 내 앞에 무릎 꿇을 수 있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오래 다녔다할지라도 주님만이 나의 전부라고 고백할 수 없다면 결국은 실족하는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예수님을 바로 알아서 예수님을 나의 영원한 소망으로 모시고 그 분 때문에 행복하고 그 분 때문에 하루하루가 활기찬 축복된 삶을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7:18~23
7장
18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고하니
19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가로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20 저희가 예수께 나아가 가로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말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21 마침 그 시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소경을 보게 하신지라
2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23 누구든지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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