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을 든든히(눅7:24-29)
오늘은 우리 교회 창립 22주년 감사예배로 드리는 날입니다. 복된 교회를 세워주시고 지난 22년 동안 여기까지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모든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그리고 성도님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교회가 세워지기 위해 중요한 것은 성도들의 헌신과 섬김입니다. 성도의 협력과 하나 됨이 없다면 어떻게 교회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교회가 목사 혼자서 원맨쇼 하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여러분들이 곳곳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하게 맡은 자리를 지켜주셨기 때문에 여기까지 오게 된 줄로 믿습니다. 창립22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복된 교회가 주님의 교회로서 주님이 원하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몇 년 동안 변함없는 우리교회의 표어대로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교회로 설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옥한흠 목사님이 소천하신 후 그의 애제자들이 옥목사님 영전에 드린 글을 책으로 엮어서 교회로 보내왔습니다. 그들의 한결같은 고백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더욱 진실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가겠습니다.’라는 다짐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복된 교회도 22주년을 맞이하여 더욱 진실한 주님의 제자로 주님의 이름을 높여 드리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성도들이 많아지는 계기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떠난 후에 자문자답하셨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성도 개개인이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할 것인지, 그리고 교회는 어떤 비전과 목표를 향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지난주의 말씀에서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그의 제자들을 시켜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렇게 한 번 질문해 볼까요? 부부가 10년을 같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 내 남편 맞아?” 또 어느 날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당신 내 아내 맞아?”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아주 좋지 않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을 가리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외쳤던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입니다. 이러한 세례요한마저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에 의구심을 드러내는 질문을 한 것을 보면서 주님의 감정이 어떠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세례요한만큼은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에 대해서 의심 없이 받아들여야 했어야 했던 것 아닐까요? 세례요한마저 이 정도라면 지금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자문자답의 형식으로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주님의 안타까움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예수그리스도만 나의 삶의 목적이요, 예수그리스도만 나의 유일한 소망이요, 예수그리스도만 나의 유일한 구원자시오, 예수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분이십니다.’라고 흔들림 없이 고백할 수 믿음의 복된 성도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이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시면서 메시아를 깨닫지 못한 세례요한의 부족함을 지적하시지만 또 그가 얼마나 위대한 자인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는 자신의 안일과 목적을 위해서는 신앙양심을 팔고, 나라마저도 저버리는 배도자와 매국노들이 수두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가 힘이 있거나 유명해지면 그들을 따라서 자신의 이익과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까하여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 하는 자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혹 누가 유명하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 붙어서 얻을 것이 없는지 기웃거리다가 얻을 것이 없다하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로 갑니다. 마치 광야에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누가 나에게 유익이 될까? 누가 나에게 힘이 될까하여 이리저리 흔들리는 자들이었습니다.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히기 전에는 세례요한을 따르는 자가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세례요한이 헤롯의 잘못을 질책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담대하게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면서 그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감옥에 갇혀있으므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또 다른 누구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쫓아갔지만 예수님께서는 로마를 향해 폭탄적인 발언을 한다든지 혁명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한자를 찾아가시고 복음을 전하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는 일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세례요한도 오실그이가 당신이십니까? 하고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군중과 백성들의 기대에 못 미치는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입니다. 당시에는 자칭 메시아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5장을 보면 드다 사건, 유다 사건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칭 메시아 행세를 하므로 사람들이 따랐었으나 죽음으로 흩어졌다고 합니다. 요즈음 신천지의 이만희목사처럼 자기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도 얼마 안 있으면 죽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됩니다.
이처럼 여기저기에서 자칭 메시아라고 나타나니까 백성들은 누구를 좇아가야할지, 누가 참 우리의 희망인지, 누가 진정한 메시야인지를 알 수 없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원한 생명이시고 구원자 되시며 참 진리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다면 인생의 방황은 끝난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일부지만 아직도 방황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우리의 구주이실까? 예수를 믿으면 정말로 천국에 갈까? 예수님께 영원히 썩지 않는 산 소망이 있는 것일까?’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확신이 없는 분도 있습니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흔들림 없는 소망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방황을 끝내시기 바랍니다. 옆 사람에게 말해 보십시오. “방황 끝내세요.”
1. 불신자의 방황을 끝내주는 교회
창립 22주년을 맞은 우리 교회는 우리 자신부터가 방황이 끝나야 됩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방황하고 있는 인생들에게 방황을 끝내주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우리 복된 교회는 방황을 끝내주는 교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방황합니다. 어디가 길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삶의 목적인지 모릅니다. 어디에 생명이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에 의미가 있는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길과 진리와 생명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은 모두 다 방황하는 인생이며 목적이 없고 진정한 행복이 없는 인생이며 영적 소망이 없는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영적인 소경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나면 영의 눈이 떠집니다. 그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보는 것입니다. 인생의 참 목적과 가치를 보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소경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만나 눈을 뜨게 됩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을 뜨게 하셨지만 영의 눈도 뜨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바디매오는 세상의 사물만 본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원자이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의 눈이 떠져서 예수그리스도만이 내 인생의 소망임을 깨닫고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참 목적을 발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방황하지 않는 인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사람이 사막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습니다. 가진 물이 다 떨어져갑니다. 빨리 오아시스를 찾아야 하는데 불안합니다. 그러다가 사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는 “이젠 살았다”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발자국만 따라가면 분명 오아시스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따라가도 발자국은 끝이 없고, 해는 점점 기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자기 발자국을 되밟아가면서 맴돌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윽고 날이 저물어서 북극성이 나타났습니다. 별을 보고 그는 제대로 방향을 찾아서 원하는 곳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걸은 자기 발자국을 쫓아가며 거기에 길이 있는 것처럼 한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참 목적을 알지 못하고 무엇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인지 어떤 것이 영원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 자리를 뱅뱅 돌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생각을 바꾸어서 하늘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가야할 길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하며 하나 밖에 없는 생명을 무엇을 위해 던져야 할 것인지가 분명해지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복된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모두다 방황이 끝나야 됩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해서 방황하는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그 인생은 방황하는 인생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길에 들어서지 못하면,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누구도 하나님나라에 갈 수가 없기 때문에 방황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복된 교회가 이렇게 방황하는 영혼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그들의 방황을 끝내줄 수 있는 영혼구원에 힘쓰는 교회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교회 존재의 목적은 영혼구원입니다.
이를 위해 전도폭발 훈련, 제자훈련, 팀 전도, 나눔 전도, 태일천 전도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어찌하든지 한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비전입니다. 요즈음은 전도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경제의 성장, 지식의 풍요, 시대의 악함으로 말미암아 복음 전파가 힘든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물질이 풍요하고 지식이 발전해도 사람 안에는 여전히 문제가 있고 방황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생명의 복음을 전해서 주 앞에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일에 힘쓸 수 있는 복된 교회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2. 더 큰 은혜를 사모하는 교회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의 질문을 받고 안타까워 하시면서도 그의 훌륭한 점을 말씀하십니다. 26절로 28절 말씀입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느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준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비록 예수님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라고 그의 위대성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뒤에 하시는 말씀이 더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이렇습니다. 사실 세례요한은 구약의 어떤 선지자보다 큰 선지자였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메시아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알린 것이 전부였지만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오실 길을 직접 준비한 선지자였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선지자와는 분명한 차별이 있었습니다. 이런 면에서는 누구와 비교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와 성령 충만의 은혜를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약시대의 성도에 비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신약시대의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세례요한보다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율법이 주는 은혜는 십자가의 은혜에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시는 구원의 은혜는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세례요한이 받은 은혜보다 더 큰 은혜를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의 은혜를 받았으므로 이 세상 믿지 않는 어떤 자보다도 크다는 것입니다. 대 그룹의 회장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그들보다 큰 자입니다. 이런 분명한 확신이 있어야 방황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돈 많다고 행복한 것이 아닙니다. 명예가 있다고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만나서 부활의 은혜 영생의 은혜를 얻은 자만이 죽어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방황이 끝난 줄로 믿습니다. 요한이 받지 못했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복된 교회 성도 모두가 이 은혜로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는 세례요한보다 큰 자다.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재벌보다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지식인보다도 큰 자다.’라는 자부심을 갖기를 바랍니다. 교만하게 살라는 말은 아닙니다. 은혜가운데서 은혜를 누리면서 당당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를 받고 새로운 삶을 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나 같은 죄인 살리진 그 은혜 놀라와’를 작사했던 존 뉴튼은 잔악한 노예 매매상을 하다 이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 목사가 되었으며, 희대의 살인강도 김대두도 이 은혜를 받고 장기를 기증하고 겸손하게 처형대에 섰으며, 그를 변론하던 변호사는 그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사형폐지론자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제레미 테일러라는 분이 죽음에 관한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죽은 죽음의 자리위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올 때 걸어서 오셨습니까? 그러면 그 밑에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썩은 것들이 널려있는 그 자리를 걸어오신 것입니다. 차를 타고 오셨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미 죽은 사람들의 위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죽음이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안 있으면 우리는 죽어야할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잠깐의 쾌락은 있어도 영원한 소망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로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게 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이 땅에는 너무도 많습니다. 2부 예배를 마치고 인도에서 온 이메일을 보았습니다. 인도 첸나이에서 비행기로 1시간을 가면 코엔바투라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인구 30만이 살고 있는데 그곳에 교회가 하나밖에 없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힌두교 인들이 와서 칼로 목사님 몸을 긋고 한답니다. 교인 70명 정도가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는데 힌두강성문제가 많은 지역이라서 교회가 쫓겨 날 지경이 되었답니다. 기도를 부탁하는 메일이었습니다.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는 주님의 질문은 창립 22주년을 맞이한 우리 교회의 비전을 다시 다듬게 하는 말씀입니다. 무엇을 위해서 수고해야 할 것이냐는 질문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세상의 풍조를 따라서 살지 않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교회로 거듭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고 주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교회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뉴욕에서 프라미스교회를 담임하는 김남수 목사님은 교회를 두 종류로 구분했는데 유람선 같은 교회와 항공모함 같은 교회입니다. 유람선 같은 교회의 역할은 친교하고 축제하는 유람선과 같은 기능을 가진 교회를 의미합니다. 먹고 마시고 놀고 교제하고 누가 옆에서 죽는지 사는지 신경 쓰지 않고 자기의 즐거움과 만족을 위한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는 시시때때로 단합대회, 야유회, 친목행사, 등산, 온천 등을 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만듭니다. 문제는 유람선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고 영적전쟁을 선포하며 세상을 변화시킬 아무런 힘도 없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자기들끼리 만 좋은 교회입니다.
반면 항공모함 같은 교회는 늘 깨어 있는 교회입니다. 영적전투준비를 완벽하게 갖추어 죄악과 싸워나가며 흑암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을 위해 수고합니다. 이를 위해 훈련하고 교육하며 조직하는 하나님의 군대와 같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있을 때 사단의 나라는 무너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처처에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22주년을 맞은 우리교회가 항공모함 같은 교회, 목적을 분명히 하고 불신자의 방황을 끝내주는 교회, 더 큰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를 전파하는 교회로 거듭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7:24~29 7장 24 요한의 보낸 자가 떠난 후에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27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앞에서 네 길을 예비하리라 한 것이 이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이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저보다 크니라 하시니 29 모든 백성과 세리들은 이미 요한의 세례를 받은지라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의롭다 하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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