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깨뜨린 옥합(눅7:36-50)
옥합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던 여인이 어떤 은혜를 받았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여인은 왜 옥합을 깨뜨렸을까요? 체면 때문에 깨뜨렸을까요? 순간의 감정으로 깨뜨렸을까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요?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깨뜨릴 수밖에 없는 은혜를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바리새인으로부터 초대를 받았습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예수님과의 관계가 매우 좋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을 했고 그 초청에 예수님께서 응하셔서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초청해 놓고 합당한 예우를 갖추지 않았습니다. 결례도 보통 결례가 아니었습니다. 당시에는 지나가는 나그네가 온다할지라도 발 씻을 물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 발 씻을 물조차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의도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이 때 그 동네에서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온 동네 사람이 그 여인의 죄를 다 알고 있을 정도로 평판이 좋지 않은 여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신 것을 알고 향유를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발 곁에서 울면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를 풀어 예수님의 발을 닦고 그 발에 입 맞춘 후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여인이 어떻게 잔치자리에 들어왔을까요? 당시에 귀인들이 잔치를 할 때면 거지들의 출입이 자유로웠다고 합니다. 그들은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 위해 잔치자리 주변을 기웃거리기면서 일용할 양식을 채우기도 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도 그런 모습으로 잔치 집에 들어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대하고서 그에 맞는 정중한 예우를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려는 태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인으로 소문난 여인이 예수님 발에 향유를 붓게 되자 바리새인은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더 우습게 생각하며 조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한 선지자라면 지금 예수님께 향유를 붇고 있는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알았을 것이고 더러운 죄인이기에 물리쳤을 것인데 그것도 모르는 것 같다며 속으로 예수님을 무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바리새인의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이름을 부르시며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고 하시며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 둘이 있는데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둘 다 갚을 것이 없어 탕감해주었다면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는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이 장정 하루의 품삯이니까 오백일을 벌어서 하나도 쓰지 않고 모아야만 오백 데나리온이 됩니다. 하루 품삯을 십만 원으로 계산하면 오천만원이고 사만 원으로 계산하면 이천만원입니다. 이렇게 많은 돈을 탕감해 준 것입니다. 그러자 시몬은 지체 없이 많이 탕감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옳다하시며 여인이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을 풀어 닦고 향유를 부은 것은 그가 더 많은 죄를 사함 받았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를 더 사랑했기에 이렇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1. 죄를 깨닫는 은혜
오늘 이 말씀을 보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왜 예수님에 대해서 이 두 사람의 반응이 이토록 극명하게 상반되는 모습일까 하는 것입니다. 핵심이 되는 단어는 ‘탕감’이라는 단어입니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죄가 작다고 느껴 마치 오십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자라고 여겼고, 죄인인 여인은 자신의 죄가 큰 것으로 느껴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문제는 자기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입니다. 그래서 여인은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이고, 시몬은 발 씻을 물조차 주지 않은 것입니다.
자신의 죄에 대해서 어떻게 여기느냐에 따라 탕감 받은 것이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의 죄는 거기서 거깁니다. 오십 보 백보 입니다. 눈에 띄게 죄를 지은 사람은 감정을 조절하지 못했거나 죄를 지을 무모함이 있었을 뿐입니다. 반면 실정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자기의 마음을 잘 통제했을 뿐이지 마음의 근원으로부터 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잘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나는 너무나 큰 죄인입니다.’ 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때로는 문제를 일으키고 걸림돌이 되는 분들은 ‘내가 뭘 잘못했는데. 나는 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잘못한 것이 별로 없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섬기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누구는 죄를 조금 더 지은 것 같고 누구는 죄를 조금 덜 지은 것 같아보여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다 똑같습니다.
육지에서 산을 보면 어떤 산은 높고 어떤 산은 낮지만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산을 보십시오. 하늘 아래 올망졸망한 모습들이 다 똑같습니다. 교도소에 갔다 온 사람은 큰 죄인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죄가 없나요? 아닙니다. 교도소에 간 사람이나 가지 않은 사람이나 똑 같은 죄인입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며 도저히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없는 완전히 타락한 인간일 뿐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죄의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나의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통렬하게 깨닫고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물론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로 용서받았지만 동시에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용서의 은혜가 큰 사람은 ‘내가 정말 죽을 수밖에 없는데.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데 벌레만도 못한 추악한 죄인인데.’하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이런 죄를 용서해 주셨으니 더욱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머리는 못 들고 겸손함으로 섬기고, 무릎 꿇어 섬기고, 눈물로서 섬기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똑 같은 죄인이라 할지라도 바리새인 같은 사람은 ‘내가 무슨 지었나요? 나는 자라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자기의가 충만합니다. 자기공로가 충만합니다. 이런 사람은 죄 사함 받은 은혜의 감격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두 사람을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과 부자청년입니다. 사도바울은 평생을 복음을 위해서 헌신한 자신을 가리켜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죄의 중의 괴수인 나를 용서해 주시고 하나님의 일꾼 삼아주셨으니 그저 감사함으로 일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무릎 꿇어 일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반면 바리새인이었던 부자청년은 마태복음 19장 2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다면서 예수님께 나의 잘못이 무엇인지 가르쳐 달라는 식으로 질문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이처럼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청년 같은 사람에게 “내가 너의 죄를 용서해주었다.”라고 말한들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나는 죄도 없는데. 용서받을 것도 없는데 뭘 용서해주었다는 거야.”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죄에 대한 인식이 정말로 중요합니다. 죄에 대한 인식의 차이가 죄 사함의 은혜에 대한 차이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많이 탕감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할 것이라는 시몬의 대답처럼 나의 죄를 크게 깨달은 자는 큰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크게 사랑할 것이며 옥합이라도 깨뜨릴 수 있는 것입니다. 여인이 순간의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서 옥합을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죄 사함의 은혜가 너무도 컸기 때문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이거나 죄 많은 여인이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물론 죄 많은 여인처럼 죄를 지으라는 것은 아닙니다. 내면에 있는 죄를 심도 깊게 깨닫고 망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나를 발견하게 될 때 주님의 용서와 죄 사함의 은혜가 더욱 감격스럽게 더욱 은혜스럽게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착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제가 착한가요? 아닙니다. 여러분이 제 속을 안다면 도망갈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는 착하게 보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아닙니다. 표현하지만 않았지, 행동하지만 않았지, 들키지만 않았지, 죄인입니다. 저는 스스로 남을 잘 섬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너무나 이기적인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겉모습은 그럴듯해보여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얼마나 추악한지 모릅니다. 만물보다 부패한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나, 속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죄성으로 생겨나는 모든 결과들을 다 용서해 주시는 용서의 은혜를 생각하면 고맙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여인이 옥합을 깨뜨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용서해주신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해서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깨뜨릴 수밖에 없어서 깨뜨린 것입니다. 이것은 체면 때문에 깨뜨린 것이 아닙니다. 공명심 때문에 깨뜨린 것도 아닙니다. 죄 많은 이 여인이 자기의 죄에 대해서 깨닫고 그 죄를 사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그래서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은 것과 같은 모습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을 이루어갈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떤 공동체가 행복한 공동체일까요? 바로 이런 공동체입니다. ‘부족하고, 죄 많고, 겉으로는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온갖 추악한 것들로 가득차고 음흉한 나를 용서해주시고 사용해주셔서 천국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몸 된 교회를 섬기게 하시고 사역자로 이런 저런 사명 주셔서 감당하게 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성도들이 많은 공동체입니다. 우리 복된 교회가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마음으로 허영과 다툼으로 하지 아니하고 눈물로서 섬기고 무릎 꿇어 섬기고 감사함으로 서로를 돌아보며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명을 감당하는 복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여인의 최고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는 머리를 풀어서 예수님의 발을 닦고 종이라는 증거로서 그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처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러한 은혜 속에서 신앙생활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기관에 소속되어 봉사와 사역을 하는 문제도 그러하지만 개인의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가 놀랍고 크면 클수록 주님을 향한 희생과 사랑은 커져만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옥합도 깨뜨릴 수 있는 것이며 온 맘 다해 주님을 사랑하고 사명을 감당할 것입니다.
우리 복된 교회 성도 모두가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처럼 그 은혜에 감격하여 삶을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서로 받은 은혜가 커서 더 섬기려고 하고 더 봉사하려고 하는 이런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허다한 죄를 용서받은 여인처럼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 신앙생활에는 눈물이 있고 섬김이 있고 봉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별로 잘못한 것이 없고, 오히려 내가 잘한 것만 생각나고 남의 잘못한 것만 눈에 보였던 바리새인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조차 죄인을 멀리하지 않는다고 조롱하며 주님조차 섬기지도 않고 비난을 일삼고 있지 않습니까? 주님도 섬기지 않는 그들이 과연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오늘 이 시대 한국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바로 오백 데나리온 탕감 받은 자처럼 은혜에 감사하며 자신을 낮추고 옥합을 깨뜨릴 수 있는 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2. 받아주시는 은혜
또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된 은혜는 죄 많은 여인이라도 받아주시는 주님의 크신 은혜입니다. 옥합을 깨뜨리는 여인을 향하여 바리새인들은 온갖 비난을 일삼았지만 주님은 그녀가 누구인지 잘 아셨지만 기쁨으로 그 여인의 마음을 받아주셨습니다. 이 여인은 주님께서 자기를 받아주신 은혜가 너무나도 컸던 것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받아주시는 은혜” 만약 예수님께서 “너희들은 죄인이라서 받을 수 없어”라고 말씀하신다면 “그래도 저는 자격이 됩니다.”라고 말하며 당당히 나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받아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기도로 예배로 주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에는 여인을 소개할 때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합니다. 이 말은 아주 부드럽게 표현한 말입니다. 학자들의 견해로는 이 여인은 창녀였다는 것입니다. 온 동네 사람이 다 알 정도로 타락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주님께서 어찌 이 여인에 대해서 모르셨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은 죄인 중의 죄인처럼 여기는 이런 여인도 받아주셨습니다. 세상 누구도 이 여인을 받아주지 않고 돌을 던지고 비난하고 욕했지만 주님은 받아주셨습니다.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축복하고 칭찬하셨습니다. 이 은혜에 너무 감격해서 옥합을 깨뜨린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가 어떤 잘못을 했다할지라도 우리를 거절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우리를 받아주시는 은혜가 너무도 놀라운 것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라는 잡지에 실린 기사입니다. 뉴욕에서 그레이하운드라는 버스를 타고 플로리다 쪽으로 가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미국은 워낙 나라가 커서 버스를 타면 일주일도 가고, 4일, 5일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플로리다로 가는 분들이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며칠을 같이 가니까 함께 대화도 하고 음식도 나누며 갑니다. 그래야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떤 한 사람이 한 마디 말도 안하고 앉아만 있는 것입니다. 이야기도 안하고, 식사하러 가자해도 안 내리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가씨가 옆에서 왜 그러시냐고, 뭣 때문에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입니다. 그는 4년 전에 죄를 지어 감옥에 들어갔는데, 너무 식구들한테 미안하고 그동안도 너무 괴롭혔기에 감옥에 들어가서 생각해보니까 자기 부인과 아이들이 더 이상 자기를 기다려 줄 것 같지 않더랍니다. 그래서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해 잘 사시고, 나는 이제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까 잊어버리세요.’ 이렇게 편지를 하고 자기는 감옥 생활했답니다. 그런데 아무런 답장이 안 오더랍니다. 그는 감옥에서 변화되어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4년이 지나 석방되기 한 달쯤 전에 다시 그 부인한테 편지를 했답니다. ‘당신이 지금까지 혹시 집에 있으면 내가 석방이 되어서 나가는데 나를 용서해주시오. 나는 이제 새 사람이 되었으니까 이제 당신하고 살고 싶습니다. 당신이 나를 용서해 준다면 우리 마을 입구에 있는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을 하나 걸어주세요. 그러면 내가 집으로 가다가 그것을 보고 들어가고, 만약 그것이 없으면 나는 뉴욕으로 다시 돌아가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집으로 갈 수는 없습니다.’ 이제 보낸 그 편지의 답을 기다리며 집으로 향하고 있는데 걱정이 앞서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더랍니다.
그 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전해들은 버스 승객들은 “우리 기도합시다. 우리 이제 같이 갑시다.” 라고 말하며 마음을 모았답니다. 버스기사도 “이 버스는 그 마을 옆으로 지나가는데 노선을 바꾸어 그 마을까지 가겠습니다.”라고 하며 도움을 주었답니다. 그래서 버스에 탄 승객들이 같이 가게 되었는데, 드디어 2마일 밖으로 그 마을이 가까이 왔습니다. 1마일 남았습니다. 500미터 남았습니다. 모두 흥분하며, 노란 손수건 있나 없나를 기다리고 가는데, 드디어 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턱 걸린 것입니다. 너무너무 놀라운 것은 노란 손수건 하나만 걸으라고 그랬는데 노란 치마도 걸고 노란 보자기도 걸고, 하여튼 노란 걸로 완전히 나무가 덮었습니다. 너무너무 감사하고 그는 집으로 들어가 잘 살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입니다. 품어주시는 사랑, 받아주시는 사랑입니다. 이 사람이 ‘아내가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아이들이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생각하며 졸이는 마음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있습니까?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가는데 ‘주님께서 나를 더럽다고 내치면 어떻게 할까? 나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 하는 두려움이 없었겠습니까? 이 여인이 바리새인에게 나아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람 취급도 못 받고 내 쫓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의 모든 행실을 아시면서도 받아주셨습니다.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이 여인은 옥합을 깨뜨린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옥합을 깨뜨린 그 여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여인이 오늘 내가 되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만약 그 여인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바리새인의 자리에 앉아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님! 실정법을 어겨서 교도소에 갔다 온 적도 없고 명백하게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죄는 없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이 여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할 것 없습니다. 이런 나를 받아주시고, 이런 나를 용서해주시고, 하나님 자녀 삼아주시고 천국 백성 되게 하셨으니, 구원해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러한 죄 사함의 은혜가 있고, 나 같은 것을 받아주신 그 은혜가 있어서 억지로 체면상 옥합을 깨뜨린 것이 아니라 깨뜨릴 수밖에 없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가장 소중한 것이 옥합이었을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여인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일을 많이 했는가, 적게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마음으로 일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이 여인과 같은 마음으로 해도 해도 부족하고, 드리고도 무릎 꿇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 옥합을 깨뜨리고도 무릎 꿇는, 옥합을 깨뜨린 것이 자랑이 아니라 옥합을 깨뜨림을 받아주시는 것에 감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옥합, 은혜로 말미암아 깨뜨려진 나의 신앙, 은혜로 말미암아 헌신되어지는 나의 헌신, 은혜로 말미암아 섬겨지는 섬김이 우리 속에 있어지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7:36~50 7장 36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 그 동네에 죄인인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으셨음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이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더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저가 가로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 가라사대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저를 더 사랑하겠느냐 43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제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가라사대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44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45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 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 하시니 49 함께 앉은 자들이 속으로 말하되 이가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하더라 50 예수께서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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