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섬기라(눅8:1-3)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전도여행을 하시는데 여인들이 그들의 소유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다는 감동적인 내용입니다.
어떤 위대한 인물이 생겨나는 과정을 보면 반드시 그 뒤에 숨은 공로자가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토머스 에디슨이 있기까지는 그의 어머니가 낸시가 있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라는 위대한 인물이 세워지기까지는 눈물의 기도의 어머니 모니카가 있었습니다. 또 요한 웨슬리에게는 어머니 수잔나가 있었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위해서는 동정녀 마리아의 자기를 버리는 헌신과 희생이 있었습니다.
축구선수가 골을 넣을 때에도 혼자 골을 몰고 가서 혼자 넣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여러 선수들의 패스와 도움을 통해서 골을 넣게 됩니다. 그래서 골을 넣는 선수도 훌륭하지만 골을 넣도록 도움을 준 선수도 똑같이 훌륭하게 평가합니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이들을 통해서 팀이 승리하게 되고 교회가 빛나고 세상이 아름다워집니다.
예수님의 사역에도 예수님을 돕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일명 섬기는 이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제2차 갈릴리 전도여행을 하신 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함께 여행을 하시는데 이 전도 여행을 위해서 조용히 섬기는 자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성경에는 그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자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섬기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의 전도여행에 합류하여 섬기게 되었을 때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겼을 것 같습니까? 퀴즈입니다. 1번, 택해주신 것 감사해서 기쁨으로 섬겼다. 2번, 죽지 못해 따라갔다. 안 따라가면 저주받을까봐. 3번, 돈과 시간이 남아서 섬겼다. 몇 번입니까?
1. 섬길 수 있는 것을 은혜로 여김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섬길 수 있었던 것은 섬길 수 있도록 불러주신 은혜가 커서 기쁨으로 섬긴 것입니다. 당시 여인들은 남자들과 동등한 지위를 갖지 못하였고 온전한 인격으로 대우받지 못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의 경우에는 여인을 남자의 소유물 정도로 여겼으며 인격을 존중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여인들을 남자들과 똑같이 구원을 받았을 뿐 아니라 복음 증거자로서 인정하시어 제자들과 여인들을 전도대로 합류시킨 것입니다. 그러니 여인들에겐 섬길 수 있는 것이 은혜였던 것입니다. 이런 섬김이었으니 섬김에 빛이 났을 것이며 섬김이 힘들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남편 섬기는 일에 감사하면 남편을 섬기는 일에 힘들지 않을 줄로 믿습니다. 남편도 아내 섬기는 일에 감사하면 힘들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을 줄로 믿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섬기게 된 것을 은혜로 생각하고 감사해서 섬긴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런 섬김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것은 섬김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방법이며 예수님을 이해하는 방법이 됩니다. 섬기다보면 예수님을 닮게 될 줄로 믿습니다. 빌립보서 2장 6절로 8절을 보면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고 하신 말씀대로 섬김의 모범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의 모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면서 칭찬받고 대접받고 높임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면서 비난받고 욕도 먹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섬길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께서 섬기셨던 것처럼 나도 섬기다보면 예수님의 인격을 닮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섬김은 자신의 존재목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섬김의 가치를 알았을 때 인간은 비로소 내가 왜 세상에 태어났는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교회에는 이곳저곳에서 섬기시는 여러분들이 계십니다. 잘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아직 섬김의 대열에 들어오지 못하셨다면 어떤 부분에서든지 섬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섬김을 위해 부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해 보십시오. “나는 섬김을 위해 부름 받았다.”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단순히 구원을 받고 천국에 가라고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위해서 부르신 것입니다. 그 고난이 바로 섬김입니다. 골로새서 1장 24절에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주님께서 나를 위해 남겨놓으신 섬김의 고난을 위해 나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기억할 때 나를 섬길 수 있도록 부르신 은혜에 감사하면서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섬김을 통해서 많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고 힘을 얻을 것이며 행복도 얻고, 치유도 얻고, 말씀을 배우고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끼쳤던 드와이트 무디 목사님은 주일학교 교사로 일하고 싶은데 교사로 써주지를 않았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린 아이들 신발 정리하는 것부터 섬겼답니다. 섬김은 어디서나 필요한 것입니다.
어느 교회 중직자는 화장실 청소를 한다고 합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들이 이용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들이 쾌적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그들을 섬기겠다는 마음으로 한다고 합니다. 섬김의 동기가 순수하고 아름답습니다. 섬길 수 있는 것을 은혜로 여기기에 부끄럽지도 않고 싫증나지도 않습니다. 섬김 수 있는 것을 은혜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구원의 감격이 기초가 되는 섬김
진정한 섬김은 구원의 감격이 기초가 되어서 섬겨야 합니다.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신 것에 감격해서 섬겼다는 것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아닌 야심에 사로잡혀 우월감 속에서 섬기지 말아야 합니다. 요즈음은 섬김이 변질되어서 하나의 이력이 됩니다. 그래서 봉사 이력을 쌓기 위해서 봉사를 하거나 봉사한 것을 자신을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섬김은 주님이 말씀하시는 섬김이 아닙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섬김은 구원의 감격이 기초가 되어서 섬기는 섬김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구원의 감격이 있는 여인이라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마리아라는 이름이 너무 흔하고 많아서 막달리네라는 지역 명을 앞에 붙여 막달라 마리아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인은 일곱 귀신 들렸던 자이었는데 예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일각에서는 옷을 벗고 다닐 정도로 추하고 더러운 귀신 들린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만나 구원 받았기에 너무도 감사하여 평생 주님을 섬긴 여인이 되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주님을 섬겼을 뿐 아니라 주님의 죽으시는 골고다 언덕에서 주님의 제자들마저 다 도망갔지만 끝까지 남았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지낸바 되었을 때 제일 먼저 향유를 가지고 쫓아간 사람이 바로 이 여인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주님을 제일 먼저 뵙는 영광을 얻은 여인입니다.
요안나는 총독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인데, 헤롯의 청지기이었으므로 그 권세가 대단하였지만 예수님을 섬기는 대열에 들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여인이 요한복음 4장 46절로 54절에 기록된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을병에서 구원 받은 사건에 관계된 그 신하의 아내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이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님께 달려가다 고침 받습니다. 그렇다면 요안나 역시 아들을 구원해주신 감격으로 인해서 주님을 섬긴 것입니다.
수산나와 여러 다른 여자들이 주님을 섬겼는데 이들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지만 분명한 것은 복음을 듣고 구원 받은 감격이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구원의 감격이 이들로 하여금 주님을 섬기게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의 동기가 구원의 감격으로 시작되어야 섬김은 아름답게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간혹 섬기는 일을 하면서 다투고 갈라서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는 동기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섬김의 출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섬김
섬김이 진정한 섬김이 되려면 나는 죽고 하나님만 영광을 받으시는 섬김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섬김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저도 강단에서 “어떤 누가 이렇게 섬기고 있습니다.” 라는 말을 하기가 두렵습니다. 설교하다가 그분들이 생각나서 말한 것뿐인데 “그분들 말고도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모두 다 거명하셔야지 왜 일부만 거명합니까?”라는 말을 듣기도 합니다. 여러 사람이 봉사를 했는데 이름을 적다가 한 사람을 빠뜨리면 그 사람은 삐지거나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하나님만 영광 받으시는 섬김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말로는 쉽게 합니다. 그러나 어쩌다가 이름만 빠져도, 어쩌다가 칭찬과 인정을 조금 덜 해줘도 이것 때문에 갈등합니다.
그래서 섬김에 있어서 이런 원칙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일보다 관계다.” 얼마만큼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과 교제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못한데 일만하는 경우가 위험한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자신을 드러내게 되고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시험 들게 됩니다. 내가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서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고 섬김의 나타나는 결과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섬김 이전에 주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합니다. 즉 주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 섬김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크고 평판이 좋게 나는 섬김이라 할지라도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멍청하고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영적으로 교제도 없는데 일만 많이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에서 문제가 생깁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가 있는, 영적으로 똑똑한 그런데 약간 게으른 사람이 좋답니다. 일은 조금 부족하더라도 주님과 교제가 우선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 나는 부족합니다. 나는 섬김이 연약합니다.’ 라고 고백하며 하나님 앞에 설수 있는 사람이 좋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교제는 뒷전이고 일만하는 사람들은 사람의 평판을 중요시합니다. 사람의 평판에 기준을 두고 섬깁니다. 칭찬받으면 열심히 하는데 칭찬이 없으면 다 내려놓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들의 섬김은 주님과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섬김입니다. 즉 주님을 사랑하고 진정 주님을 위한 섬김입니다. 섬긴다는 것으로 인해서 자기의 평판을 관리하기 위한 섬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주님은 민중의 환호를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기득권층에게는 핍박과 모함과 곤란을 당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의 섬김은 사심을 품은 섬김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께 도움이 되는 것만을 위해 섬겼던 것입니다. 진정으로 섬기는 사람은 사람의 평판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평가를 기대하면서 섬기는 것이지 사람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섬김입니다.
요즘은 ‘섬기는 사람’이라는 평판이 부자, 정치가, 학자보다 더 존경받는 사람으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섬김의 동기가 사람의 평가에 기준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알아주지 않는 곳에는 결단코 섬기지 않습니다. 자기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섬기는 경우도 거의 없습니다. 섬김을 자기 이미지 관리의 수단으로 여기는 시대가 되었기에 섬김의 정신도 부패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섬김은 사람의 평판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인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섬김은 빛나고 섬김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섬김이 타락하지 않습니다. 이런 섬김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아의 아버지 조지 뮐러에게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고아들을 섬길 수 있었는지 섬김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었답니다. 그는 간단하게 “내가 죽었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면서 “조지 뮐러라는 나는 죽었는데 특히 나의 의견과 선택과 내 뜻에 죽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찬성과 비난에 대해서도 죽었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내 자신이 하나님의 인정만을 받는 것에 모든 기준을 세웠습니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섬김이란 내가 죽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섬김은 진정한 섬김이 될 것입니다.
4. 자기의 소유로 섬김
예수님을 섬겼던 여인들은 자신들의 소유로 주님을 섬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물질적으로 부요한지 알 수 없지만 진정한 섬김은 이처럼 희생을 감내하면서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명예에 조금만 손상이 온다면 섬김을 멈추거나 아니면 물질의 희생이 따르게 될 때 섬김을 멈춘다면 진정한 섬김은 아닙니다.
더나가 여인들의 섬김은 일시적인 섬김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섬겼다는 말이 ‘디에코눈’인데 이는 ‘디아코네오(διακόνέω섬김)’의 미완료 능동태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이들의 섬김은 일시적인 섬김이 아니라 연속적인 섬김이었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섬긴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이 끝날 때까지 섬겼고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는 자신의 삶이 마치는 순간까지 섬겼다는 것입니다.
이런 글을 보았습니다. 돼지가 길에서 암소를 만나 불평을 털어놓았답니다. “나는 죽어서 사람들에게 햄과 베이컨을 제공하고 심지어 내 발까지도 ‘족발’이라는 이름으로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준단 말이여! 그런데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하고 너만 좋아하는 걸까?” 그 말을 들은 암소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죽어서 모든 것을 제공하지만 나는 살아있는 동안에 우유를 주기 때문이야!” 살아 있는 동안에 나누는 것이 진정한 나눔이며 자신의 소유로 남을 섬겨야 진정한 섬김입니다. 타인의 의지로 나누는 것은 해체이지 나눔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로 살아있는 동안에 나누고 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섬겼던 여인들을 보았습니다. 이들에게는 어떤 가식적인 모습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섬김이란 이런 것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섬길 수 있도록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섬김, 구원받은 감격으로 말미암은 섬김,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님께만 돌리고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돌아보는 섬김, 더나가 자신의 소유를 드려가면서까지 헌신적인 섬김의 모습이 우리들의 신앙생활 속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누가복음 8:1~3 8장 1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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