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경외하는 법(신14:22-23)
이 시간에는 십일조에 대해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목회자로서 반드시 사명을 가지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부분이 십일조입니다. 십일조에 대한 바른 가르침이 성도들의 신앙을 바르게 하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길이라고 확신하고 적어도 일 년에 한번 씩은 설교를 통해서 십일조에 대한 말씀을 전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부담스럽게 느끼겠지만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로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전하는 십일조 설교가 성도 여러분에게 은혜가 되고, 깨달음이 되고, 새로운 결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어떤 가난한 소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신문배달을 했는데 첫 월급으로 1만 여원을 받았습니다. 이 소년은 그것을 모두 어머니에게 드렸습니다. 그 때 어머니는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것이 네가 벌어들인 첫 수입이구나. 우선 십일조부터 드리렴. 하나님이 네게 놀라운 복을 주실 것이다.” 소년은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먼저 재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렸답니다. 그 습관은 평생 동안 이어져 한 번도 십일조를 도둑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33세에 100만 달러를 모으더니 53세 때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됐습니다. 이 사람이 바로 록펠러입니다. 많은 돈을 벌어 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구호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는 한 강연에서 부모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당신의 자녀를 위대한 인물로 키우고 싶습니까? 그러면 자녀에게 먼저 십일조를 빠뜨리지 말도록 가르치십시오. 그것은 교회 제도가 아니라 인생의 토대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인생의 토대를 내게 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십일조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을 창조주와 생사화복의 주관자로 믿는 성도에게는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렇지만 처음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에게 십일조는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교회에 나가거나 예수를 믿는 것보다 더 어렵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더러는 이 설교를 들으면서 부담이 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을 뛰어 넘어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성경에는 기도하라는 명령이나 성경을 읽으라는 명령에는 구체적으로 몇 번 또는 얼 만큼 하라는 정해진 양이 없지만 십일조는 10퍼센트라는 분명한 양이 있기 때문에 피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십일조에 관한 문제를 잘 해결하여 하나님과 더욱 가까워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물질문제는 쉽게 넘어가기가 어려운 문제입니다. 쟈끄 엘룰(Jascque Ellul)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은 아무도 피하려야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가정에서든 사회에서든 물질문제는 피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어떤 가정은 물질 때문에 싸움이 일기도 합니다. 부모자식 간에도 고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국가적으로도 이 문제는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세계는 물질전쟁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도 이런 문제가 없을 수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도,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물질문제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돈에 대해 남의 이야기처럼 말하고 인생을 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돈은 모른 척 하고 지나가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자기의 삶이 어떠하며 자기의 신앙이 어떠한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물질 앞에 서야 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물질 앞에 설 때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납니다. 물질 앞에 섰을 때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물질이라는 것은 우리를 시험대에 올려놓는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십일조도 명백하게 나의 신앙을 시험대에 오려놓는 그 무엇이 되는 것입니다.
1. 축복과 상급에 대한 자원 예물
십일조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그 시작은 명령과 율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에 감사하여 자원하여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처음 십일조를 드립니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아브라함이 소돔군대와 전쟁을 하게 됩니다. 창세기 14장 20절에 보면 포로로 잡혀간 조카와 그 가족을 찾아오기 위해서 아브라함이 318명의 군사를 데리고 4개 연합군과 싸웁니다. 이것은 중과부적입니다. 숫자적으로 보면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완전한 승리를 합니다. 포로가 되었던 롯과 그의 가족과 가축들을 다 되찾아가지고 돌아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하나님 앞에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에 관해 말씀하시지 않았지만 여기서 십일조를 드렸다는 것은 자신의 승리가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고백의 표현입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도우심에 감사해서 자원해서 드린 것입니다.
또 그 이후에 야곱이 십일조를 서원하게 됩니다. 야곱은 형과의 갈등가운데서 형을 피해서 도망갑니다. 난생 처음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길을 유랑하게 됩니다. 걱정과 두려움 속에 싸여 있는 이때에 야곱을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만나주시면서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 외롭지.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내가 너의 가는 길을 지켜주겠다. 내가 너의 가는 길을 보호해주겠다.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그리고 내가 너를 다시 이곳으로 데리고 오겠다.” 이런 약속을 받은 야곱은 너무너무 감사해서 자원하여 십일조를 서원하였습니다. 창세기 28장 20절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의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감격 가운데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경험한 자들이 기쁨으로 드린 예물이었습니다.
십일조는 율법과 의무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복된 관계에서 나온 자발적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나의 길을 인도하시고 도우신 것을 체험했고 이에 대한 고백으로서의 반응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에게 찾고 계시는 십일조의 참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드려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십일조가 율법과 의무이기 이전에 하나님과 복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표현,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는 표현, 하나님은 나를 도우시고 축복하신다는 표현, 하나님께서 나에게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실 것이라는 표현이 되기를 원합니다. 자원하여 기쁨으로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십일조 드리는 것이 삶의 기쁨이 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축복의 상징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어느 교회는 헌금시간에 박수를 친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수를 친답니다. 아프리카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셨나요? 그들도 우리와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사람 사는 곳에 그런 일들이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비교를 해 본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자연과학의 발달로 인해서 온 것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여기까지 온 것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고백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분들이 기쁨으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2. 십일조를 명령하신 이유
그러나 시간이 지나 모세 때에 와서는 정식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해져서 모든 백성이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처음에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드려진 십일조가 왜 나중에 와서는 율법이 되어 지키도록 하셨습니까? 레위기 27장 30절에는 “그리고 그 땅의 십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고 하나님의 것을 선포하시고 더나가 신명기 14장 22절에는 “너는 마땅히 매년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직접적인 명령을 하셨습니다. 자원하여 드리던 십일조가 이제는 명령이 되고 율법이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명령하셨을까요? 이유는 자원함이 사라진 인간의 강퍅함 때문입니다. 사실 이 세상 모든 것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이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드림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탐욕이 생기면서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생겨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자원해서 드리는 십일조가 아니라 이제는 율법에 의해 하나님의 주권을 찾고자 하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즈음은 가정마다 아이들이 적으니까 뭐든지 아이들이 잘 먹도록 합니다. 질서도 별로 따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음식을 먹어도 질서가 있었습니다. 제가 어릴 적만 해도 어쩌다가 밥상에 계란찜이 올라왔을 때 엄마가 아무 말 하지 않으면 아버지는 한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맙니다. 서로 먹으려고 싸웁니다. 그런데 엄마가 질서를 잡으며 한 소리 하면 그때부터 선이 그어져서 아버지도 드리고 아이들도 사이좋게 나누어 먹습니다. 나만 생각하다보니까 하나님도 이웃도 잊어버리고 욕심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계란찜에 줄을 그어 아버지 몫을 챙기는 엄마처럼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선을 그어놓으시고 “이것은 내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율법이 된 것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아버지께서 돈을 벌어다 이렇게 계란찜을 먹도록 하셨으니 아버지 먼저 드세요. 아버지 드실 만큼 드시고 남겨주시면 우리가 먹을게요.” 라고 말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렇게 되기가 사실 어렵습니다.
또 성도는 십분의 일은 하나님의 것이고 그 나머지는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십분의 일만 하나님의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주권회복 선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천하 만물이 내 것이라고 주권을 선언하시기 전에 우리가 먼저 세상 만물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회복해야 할 신앙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는 신앙입니다.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독도라는 영토 분쟁이 있습니다. 너무도 첨예하여서 이 부분에서 만큼은 여야가 따로 없이 하나 된 모습을 보입니다. 나라의 영토 주권에 대한 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일본과 중국의 센카쿠 열도의 문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얼마나 넓은 땅을 가진 중국입니까? 그러나 아주 작은 것이지만 자국의 영토라며 온 중국이 한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습니까? 이처럼 주권 문제는 누구에게나 매우 소중한 것입니다. 나에게 주권이 소중하다면 하나님에게서도 주권은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24편 1절에는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 선언입니다. 특히 출애굽 후에 초태생은 내 것이라고 하신 것과 맥을 같이합니다. 모든 생물의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래서 레위지파는 기업이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이며 십일조는 레위지파의 몫이 된 것입니다.
3. 여호와 경외하는 법
십일조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주권 앞에 무릎 꿇는 행위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를 드림으로 우리는 어떤 복을 받는 것일까요? 엄격하게 따지고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를 사랑하시고 복주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만 옳으면 나머지는 물을 필요도 없는 줄로 믿습니다. 자녀가 아빠에게 “아빠, 내가 공부 열심히 하고 말 잘 들으면 나를 도와주실 거예요?”라고 물을 필요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당연히 없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말씀 따라 순종하고 살면 복을 주실 것이냐는 것은 물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것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라기 3장에 보면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는 하늘 문이 열러지고, 황충을 금해주시고, 기한이 되기 전에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런 축복을 약속하셨습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욕심이 많아서 하나님 것도 모르고, 남의 것도 모르고 욕심을 부리니까 너무 안타까워서 약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근본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시고 복되기를 원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말라기 3장 10절에 보면 온전한 십일조를 드릴 때 하늘 문이 열리는 복을 받습니다. 하늘 문이 열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관계가 깨어졌을 때 도움을 청하면 도움이 됩니까? 관계가 풀어지기 전에는 도움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열려지는 기본입니다.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통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또 황충을 금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종 질병과 재해를 막아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영적인 질병, 정신적인 질병, 육체적인 질병을 얼마나 많이 겪습니까? 몸이 아픈 사람도 있지만 평생 먹고 살 돈을 쌓아 놓고도 왜 사는지 모른다고 푸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의미가 없다고 말합니다. 행복이 없다고 말합니다. 수면제를 먹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다고 합니다. 우울증 약을 먹어야 됩니다. 죽고만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적인, 영적인 황충이 먹어서 그렇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좋은데 건강이 좋지 않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물질적으로도 그렇습니다. 다 갖추었는데 물질이 너무 없으면 살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황충을 금해주신다는 것은 영혼이 잘 되고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도록 우리의 삶을 이끌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복된 약속입니다.
또한 기한이 되기 전에 곡식이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농사짓는 분들에게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사업을 하는 분이 외국 업체와 계약을 했습니다. 계약금을 받고 물건을 보냈는데 잔금이 안 옵니다. 이것이 기한 전에 곡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남겨야할 이익이 들어오지 않으면 기한 전에 곡식이 떨어지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것입니다. 포도 농사를 9개월 동안 지어야 열매를 얻을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농사가 8개월 20일 동안 잘 되다가 결실을 며칠 앞두고 문제가 생기깁니다. 그러면 8개월 20일 동안 잘 되었던 것이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기한 전에 열매가 떨어지지 않게 하신다는 것은, 따라해 보실까요. “내가 너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니까 끝까지 책임지시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라도 달려가서 지켜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러한 축복의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그 약속이 있어서, 그 축복을 받기 위해 십일조를 드리는 것은 바람직한 것은 아닙니다. 그 약속이 없으면 십일조를 드리지 않을 것인가요? 그건 아니지요. 물론 십일조를 드리는 자에게 축복의 약속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조건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어렵든 어렵지 않던 하나님이 나의 주관자라는 고백만큼은 흔들림 없는 줄로 믿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당장 다음 달에 수입이 줄어들었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주관자이십니다. 십일조를 드렸는데 어려워졌다할지라도 하나님은 주관자이십니다. 이번 달에 십일조를 드렸기 때문에 다음 달에는 반드시 소득이 늘어난다는, 계산적으로 드리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이시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 우리가 믿음으로 나아가면 더 좋은 축복을, 더 큰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한 순간 어려움도 있을 수 있지만 그러한 때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러한 믿음을 기뻐하실 줄로 믿습니다.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23절 말씀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소와 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아 사용하면서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는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가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록펠러가 말한 대로 인생의 토대를 내게 둘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에게 둘 것인가를 결정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기로 결단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 믿음으로 삶의 토대를 하나님께 두고 모든 것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의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평생 누리면서 록펠러처럼 간증하면서 살 수 있는 믿음의 승리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신명기 14:22~23 14장 2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23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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