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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의 증언
누가복음 9:28~36 유우열 목사 2011-03-27
천상의 증언(눅9:28-36)

 “예수님이 누구신가?”라고 질문한다면 내가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데 그렇게 유치한 질문을 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과연 나에게 누구신가?”라는 질문은 우리의 삶이 마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하고 또 해야 할 질문이라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 어떤 이해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예수님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는 말처럼 예수님에 대해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예수님의 전부인 것처럼 주장합니다.

 누가복음 9장의 말씀을 보면 무리들은 예수님을 엘리야로 보았고, 세례요한으로 보았고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본 것은 그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부분적으로 보고 그것을 전부로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셨고 베드로가 대표로 “하나님의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시고 칭찬하시면서 장차 그리스도로서 어떤 고난을 받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무리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은 2천 년 전 유대 땅에서 만 하신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간에 나에게도 여전히 그 질문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질문에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교회를 나오고 있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아는 것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그 시대 사람들만 예수님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교회를 다니는 교인들 역시 예수님에 대해서 심각하게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를 나오지 않는 사람은 아예 예수님에 대해 무지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운데는 예수그리스도에 대해서 온전히 알아서 그의 풍성함과 충만함을 누리는 성도도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에 대해 부분적으로 또는 왜곡하여 알고 있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나의 삶의 조력자 정도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에 도움이 필요해서 선택했다는 태도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드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네. 예수님이라는 분은 도우시는 분이라고 하니까 나 좀 도와주세요.’ 이런 생각으로 내가 선택하였기 때문에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다는 태도를 가지는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취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처음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에게 거의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알아가면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 제가 잘못 알았습니다. 내가 내 삶을 살아가고 예수님께서 내 삶의 조력자가 아니라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군요. 주님이시군요. 주님께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군요. 주님께서 나의 삶을 이끌어 가시는군요. 주님! 어디로 이끌던지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가겠습니다. 주님께선 나의 주님이십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세세에 그에게 있을지어다” 내가 온 것도 그로 말미암고 이 세상을 사는 것도 그로 말미암고 가는 것도 그에게로 가고, 모든 것의 주관자가 예수그리스도이신 줄로 믿습니다. 

 둘째, 예수님을 여러 종교의 창시자 중에 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종교다원주의적인 생각입니다. 이 종교든 저 종교든 모두 같은 것인데 그 중 하나를 택한 것이고 그 분이 예수님이라는 태도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온 분들이라든지 예수님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로 알고 나면 유일하신 예수님을 고백하게 됩니다. 왜 예수님이 유일하신 구원자가 되실까요? 예수님만이 우리 인생을 위해서 죽어주셨고, 부활하셨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예수님을 알면 ‘오직 예수만이 하나님이요, 유일한 구원자 이십니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르면 고백 할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합니까? 타 종교도 용납을 하고 이해를 해야지. 어떻게 예수님만 믿어야 된다고 말합니까? 그러니까 종교 간에 다툼이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말을 그럴 듯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던 사람도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난 후에는 비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욕을 먹는다할지라도 예수그리스도에게만 다른 종교의 창시자들과 비교 할 수 없는 생명이 계시고, 부활이 계시고, 영생이 계심을 증거 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이 세상에 많은 종교 창시자가 있지만 누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습니까?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부활하신 후에 다시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계신분이 누구십니까? 다시 오시마고 약속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없습니다. 오직 유일하신 예수그리스도 밖에 없는 줄로 믿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많은 공격을 받습니다.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립니다. 어느 목사님이 무슨 말을 한  마디하면 그것을 가지고 공격을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말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오히려 감사합니다. 기독교가 사실은 정치계나 사회나 경제계나 거의 모든 부분에서 주류가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인구가 전체인구의 20%라고 말하지만 국회의원의 수를 보십시오. 거의 대다수가 기독교인입니다. 사회에서 기독교가 주도권을 잡아가다보니까 본의 아니게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공격을 당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또 예수 안에 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니까 더 공격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님을 믿으셔도 되고 마호메트를 믿으셔도 되고 석가모니를 믿으셔도 되고 아무거나 잘 믿으면 됩니다.”라고 말한다면 핍박받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대로 예수님만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라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 아닙니까?

 저는 어제 인터넷에서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공산당 간부가 지하교회에서 믿음생활을 목숨 걸고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에 지하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김정은 정권이 들어서면서 북한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발각되면 죽음을 면할 수 없답니다. 그런데 목숨을 내걸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최소 10만 명이라고 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50만이라고 말하기도합니다. 그들이 왜 목숨을 걸고 예수를 믿습니까? 대게 사람들은 내가 좀 잘 되려고 조금 도움을 받으려고 예수를 믿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목숨을 내걸고 예수를 믿는 이유는 예수그리스도에게만 진리가 있고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슬렘 권에서 선교하는 선교사님들에게 이 확신이 없다면 그들에게 갈 이유가가 있습니까? 죽음의 위협을 당하면서 선교할 이유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를 깨달았기 때문에 때로는 무모하다는 비판을 들어가면서라도 선교하는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여러분! 예수님에 대해서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는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가이사랴 빌립보 사건이 일어난 후 8일 쯤 되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시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이 산의 이름을 헤르몬 산이라고 도하고 다볼 산이라고도 하는데 정확한 명칭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갑자기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그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예수님과 대화를 하는데 그들은 모세와 엘리야였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졸다가 깬 베드로와 제자들이 이 모습을 보고 여기에 초막 셋을 짓고 이곳에 거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는 촌극이 벌어집니다. 그럴 때 구름이 예수님과 모세 그리고 엘리야를 덮었고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기를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였습니다. 소리가 그쳤을 때는 모세와 엘리야는 간 곳이 없고 오직 예수님만 보였다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핵심 요지는 무엇입니까?

1. 천상의 증언
 오늘 말씀의 핵심은 예수님에 대해서 더 이상 재론이 필요 없도록 하나님께서 직접 증언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직접 음성을 들려주신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예수님이 나의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고 증언하셨겠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대부분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한 기적입니까? 그 기적은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의 구원자시다.’ 라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기적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로 오천 명 되는 사람들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의 떡이 되셔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겠다고 하는 의미로 나타난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병든 자를 고치시거나 여러 가지 기적을 행하신 것은 모두 다 이런 의미에서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무리들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떡만 보는 것입니다. 죽을병에서 고침 받은 자가 병 낫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병 낫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하는 것을 증언하고 계시는 것인데 예수님의 하나님의 아들 되심은 못 보고 병 낫는 것만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답답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엔 예수님에 대해 이런 저런 추측이 난무했을 것입니다. 제자들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여전히 확신이 부족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 증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라는 질문은 가벼운 질문 같지만 아주 중요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을 잘못 아는 사람은 신 신학자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을 잘못 알면 신비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증언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정확하게 알지 못하고 믿는 것이 너무나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열심을 내기 전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정확하게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믿는 것보다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정확하게 아시기를 바랍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높이와 넓이와 길이와 깊이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도록 충만한 지식가운데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첫째, 성령 충만 받아야 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요 그리스도의 영이시기에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깊은 것이라도 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을 바로 알게 됩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들은 성경을 보아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성경은 닫혀진 책입니다. 비밀의 책이기 때문에 그냥 읽어서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가운데 임하셔야 말씀이 이해가 되고 믿어지는 줄로 믿습니다. 성령 충만 받아야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깊이와 넓이가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성경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배워야 합니다. 성경공부를 해야 하고, 경건서적을 읽어야 합니다. 특히 양질의 경건서적을 읽는 것은 예수님을 알아 가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사람과 짐승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짐승은 교육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지식을 통해서 알게 됩니다.

 셋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를 통해서 삶 가운데 함께하시는 예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경험으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흔들림 없는 확신을 줍니다. 오늘의 말씀도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기도할 때 변화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러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도 기도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이런 말을 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기도를 무엇인가 하나님께 요청해서 받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기도는 주님께 필요치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나님과의 교제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예수님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기도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대해서도 바로 알아야 하고 이해의 폭이 넓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면 어떻게 경험적으로 예수님을 알 수 있습니까?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하나님께 구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 많습니다. 자녀들이 밥을 달라고 해야 밥을 줍니까? 때가 되면 당연히 줍니다. 옷을 사달라고 해야 사줍니까? 차비 달라고 해야 줍니까?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는 알아서 때 되면 밥 주고, 옷 주고, 차비 주고 용돈 줍니다. 이처럼 구원 받은 성도는 기도하지 않아도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할 때 하나님께서는 더 놀랍고 크고 비밀한 것을 주실 줄로 믿습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하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주셨는지 모릅니다. 기도 수첩에 적어 놓고 기도하고는 잊어버렸는데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대해서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응답해 주셨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하나님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이 쌓여가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흔들림 없는 지식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도는 사귐의 기도와 요청의 기도로 나누어 생각합니다. 요청의 기도는 건강도 부족하고, 지혜도 부족하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능력도 부족하고, 물질도 부족하기에 주님께 부족함을 채워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수준이 요청하는 것에서만 끝나면 주님께서 하신 사귐의 기도는 경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귐 기도의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 한 분이면 만족합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는 것으로 족합니다.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라는 자세입니다. 이는 매우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중요한 것이지 하나님께서 들고 계신 선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아직 성숙하지 못하면 하나님 보다는 들고 계신 선물을 더 좋아한 나머지 그 선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어쩌다 남편이 아내 생일이 되었는데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한 마음으로 “여보 미안해 어쩌다가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어요!”라고 하면 정말 남편을 아끼는 아내는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을 하세요. 당신이 내게 최고의 선물인데요. 나는 당신이면 만족해요.”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어린 아이들인 경우는 어떻습니까? “아빠 싫어! 아빠 미워! 아빤 내 생일도 몰라주고 아빠 저리가!”라고 하지 않습니까? 남편이면 족하다는 아내와 선물이 없다고 투정하는 아이의 모습을 비교해 보십시오. 기도할 때 선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귐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저도 성도님들이 아플 때나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달라는 기도도 많이 합니다. 그러나 길을 가면서 ‘주여! 주님이면 행복합니다. 저와 같이 걸으시는 것만으로도 좋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주님 만족합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나에게 다주셨습니다. 영원한 생명도 주셨고 영원한 천국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하고 기도할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이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기도였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외에 어떤 무엇을 원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셨던 것은 하나님이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우리의 기도는 많이 성숙해야 함을 도전받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이런 경지에까지 이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4월의 추천도서를 ‘사귐 기도’라는 책으로 정했습니다. 기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것입니다.

2. 별세의 은혜
 예수님께서는 변화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내용은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으실 것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매일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매일 죽어 가는데 우리가 썩어질 것을 붙잡고 죽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썩을 열매를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을 붙잡으면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것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위해서 그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는 죽음의 길을 가고 계신 것입니다. 죽음을 은혜롭게 맞이할 수 있고 죽음 가운데 주의 은혜가 임하셔서 우리가 죽어가는 이것이 복되고 열매있고 아름답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기서 별세란 ‘엑소도스’라고 하는 히브리어인데 ‘나감’, ‘출발’이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는 것을 ‘엑소도스’라고 하는 것처럼 영혼이 육체를 빠져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애굽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단한 영광이 된 것처럼 사실 영이 빠져나가 하나님 나라로 간다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에게 최후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도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이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특히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대속 제물로 죽으심은 자신에게 영광이요 이 일을 계획하신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십니다.

 성도에게 죽음에 대한 바른 이해가 필요한 줄 믿습니다. 구원 받은 성도의 죽음은 영광입니다. 옥한음 목사님이 세상을 떠나셨을 때 장례식을 하지 않고 천국환송식을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계신 어르신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십시오. “내가 죽거든 장례식을 하지 말고 천국환송식을 해라.” 하나님 나라에 간 것이니까 이렇게 써야 합니다. ‘축 환송 아무개 권사님 천국가시다.’ 죽음은 구원받은 영혼이 엑소도스하여 영원한 영광의 천국으로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별세하시기 전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분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절망스러운 것을 죽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헤어짐 때문에 아쉬움과 슬픔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영적으로 보면 죽음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출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도 주의 뜻 가운데, 주권 가운데 사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언제 세상을 떠납니까? 주님께서 오라고 하시면 가는 줄로 믿습니다. 모든 것이 주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소망 가운데 하나님나라로 가셨고 남아 있는 우리에게도 소망을 주시고 떠나신 줄로 믿습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아는 만큼 믿는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을 바로 알기를 바랍니다. 아는 것이 힘입니다. 아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서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흔들리지 아니하고 확신 가지고 기쁨 가운데서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9:28~36
9장
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 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30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
31 영광 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씀할새
32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곤하여 졸다가 아주 깨어 예수의 영광과 및 함께 선 두 사람을 보더니
33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34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저희가 무서워하더니
35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고
36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시더라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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