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서 큰 자(눅9:46-48)
오늘 말씀을 들으면서 여러분의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큰 것에 대한 기준이 바로 세워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가 크냐!”라는 것 때문에 싸워 본 적 있습니까? 아니면 갈등해 본적 있습니까? 아마 대부분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어른들이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싸움을 하고 있다면 어떤 분들을 다 큰 사람이 애들처럼 왜 유치한 싸움을 하느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유치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생존세계에서 인간들의 모든 싸움의 근본이 이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누가 크냐!”라는 것은 누가 높으냐, 누가 힘 있냐, 누가 잘 사냐, 누가 부자냐, 누가 많이 배웠냐 등의 여러 가지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 문제를 가지고 다툼이 일어나고 변론이 일어났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도 그렇지만 성경을 찾아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많이 서로 간에 다투고, 시기하고, 갈등하고,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시험 들고 했는지 모릅니다. “누가 크냐!” 라는 문제는 남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현실의 문제입니다.
세계의 질서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요즘 미국과 중국의 싸움을 보노라면 경제, 군사, 정치, 외교 모든 부분에서 첨예한 대립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봅니다. 1970-80년대만 해도 세계질서가 미국과 러시아의 양강 구도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고르바초프가 페레스트로이카를 외치며 경제개혁을 했고 강력해 보이던 러시아는 하루아침에 거지 국가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에는 미국이 유일한 인류 초강국이 되었고 팍스 아메리카나를 이룰 것처럼 보였지만 지금은 중국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서 미, 중의 양강 구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미국과 중국이 ‘누가 크고 강하냐!’는 싸움에서 서로 한발작도 물러서지 않는 모습을 봅니다.
세계 질서가 이렇다면, 작게 교회 안으로 들어와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구도만 작아졌을 뿐 누가 크고 강하고 부하고 높으냐의 문제는 여전한 것 같습니다. 처음 교회를 나오시는 분들 가운데는 교회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고 생각하여 싸움도 없고 문제도 없는 곳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에서 문제가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더 문제가 많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가장 거룩한 곳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모든 문제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끗이 해결 받고 새롭게 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교회 안에서 이런 저런 문제가 생기는 것은 변화된 크리스천이 있는가하면 아직도 변화되지 못하였거나 아직 변화되는 과정 중인 성도가 많기 때문입니다.
교회 뿐 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토록 고르고 또 고르고 골라서 뽑으셨던 열두 제자들도 누가 크냐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 중 누구를 찾으시면 그 사람을 주변에서 핍박하거나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을까요? 또 예수님께 삐져서 ‘예수님은 베드로, 요한, 야고보만 좋아하시는 것 같고 우리는 찬밥이야.’ 이러면서 제자들 가운데서도 갈등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장차 예루살렘에 올라가 잡혀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고민하고 계신데 지금 이들은 자기 들 중에 누가 높으냐는 문제로 다투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 아닙니까? 그러나 이것은 변화되지 못한 제자들의 실제적인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모습도 다 이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높이냐 라는 것으로 다투는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이런 모습을 보시면서 예수님께서 정말로 크고 높고 강한 것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세워놓은 기준에 의해서 복 받았다, 성공했다, 출세했다, 크다, 강하다를 생각하면 행복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기준에 의해서 복 받은 사람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기준에 의해서 큰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기준에 의해서 성공한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가 영원히 행복할 수 있고, 영원히 큰 자가 될 수 있고, 영원한 성공자가 될 수 있을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곁에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고 하시면서 너희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라고 하십니다.
이런 예수님의 기준설정은 정말로 파격적인 것이며, 영적인 것이며 세상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세우신 기준에 의해서 큰 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기준에 진정 큰 자는 누구입니까?
1. 복음을 전하는 자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어린 아이처럼 사람 수로 세이지도 못하고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지도 못하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영접하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에서 가장 보잘 것 없다고 여겨지는 어린아이에게라도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나님 앞에서 큰 자 라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전도할 때도 나이도 들고 경제력도 있고 영향력이 있는 사람을 전도하면 대단한 사람을 전도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를 전도하면 ‘그까짓 거. 어린 아이 하나를 전도한 것 가지고 뭐’ 하면서 어린 아이를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양초 하나와 같이 생각한다면 50쯤 넘어서 경제력도 있고 영향력도 있는 사람은 초가 절반이상 탄 사람입니다. 절반 이상을 세상에서 태워버리고 이제 예수님을 만나서 불을 밝혀 가려고 해도 뭐 좀 알만하면 벌서 60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그 영혼도 소중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일생을 놓고 본다면 어린 아이는 이제 막 타기 시작한 양초입니다. 그 빛이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의 빛으로 바뀌어져서 평생을 사랑의 빛으로 전하면서 온전히 태워지니 이 세상을 얼마나 환하게 비추어지겠습니까? 시간의 길이로 보나 앞으로의 영향력으로 보더라도 어린 아이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은 소중한 일인 줄로 믿습니다.
어떤 분이 늦깎이로 60쯤 되어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그러면 안타까운 일은 예수 잘 믿다가 천국가시는 것 밖에는 별 것이 없습니다. 그 늦은 나이에 신학공부를 해서 목회자가 될 수 있습니까, 선교사가 되어보려고 기회를 얻겠습니까, 아니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60세가 넘으신 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시간을 가지고 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면 장차 무디목사님처럼 될 수도 있을 줄로 믿습니다. 빌리 그레이엄목사님처럼 될 수도 있을 줄로 믿습니다. 빌리 그레이엄목사님은 어린 시절에는 바람둥이였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이 변화되어서 세계를 움직이는 인물이 된 줄로 믿습니다. 어린아이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린아이에게는 별로 희망을 가지지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위해서 수고하고 헌신하는 분들을 많이 격려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돈 버는 일에 바쁘고, 사업에 바쁘고, 세상일에 바쁘지만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보면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큰일은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린아이를 사랑하고 품어주고 그들에게 예수사랑, 예수생명을 심어주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지미카터 대통령이 대통령이 된 후에도 주일학교 교사를 놓지 않은 것에는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를 가르치는 일에는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어른을 가르치라 하면 자신이 인정받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어린아이가 얼마나 소중합니까? 지극히 적은 자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할 수 있는 사람, 천국의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큰 자인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간에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어느 권사님이 안타깝게도 대학병원에서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단 후 수술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특새에 참석하면서 말씀을 듣는 중에 은혜를 받고 한 영혼구원의 귀중함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붙잡고 기도하는 중에 성령님의 강력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수술하기 전에 아직 믿지 않는 언니와 동생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감동을 하시는지 순종 하지 않으면 다시는 성령님께서 감동하지 않으실 것 같은 강력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몸의 컨디션은 복음을 전하러 갈 상황이 아니지만 남편이 운전을 하고 딸과 함께 평택으로 내려가서 언니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답니다. 훈련받았던 전도폭발 복음 메시지를 울면서 전하였고, 언니도 울면서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금주에 교회에 꼭 나가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영접한 후 고백하기를 정말로 네가 전하는 복음을 들으니 하나님께서 계신 것이 느껴진다고 고백하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정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입니까?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더더욱 가족과 친지 가운데서 아직도 예수 믿고 죄 사함 받아 천국 영생을 얻지 못한 분들이 있어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이보다 귀한 일은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혼 구원의 천국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가장 큰 자인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제시하신 큰 자의 기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기준에 의해서 사람을 평가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서 조차 유명해지거나 부자가 되었거나 권력을 가진 사람을 가리켜 성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또 이런 사람을 복 받았다고 평가합니다. 물론 세상 적으로는 성공한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제시하신 기준으로 볼 때도 그렇습니까? 세상에서는 성공했고 복을 받았다고 할지모르지만 주님의 기준으로는 아닙니다. 물론 세상적인 복을 받으면서 동시에 주님께서 세우신 기준에 맞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기준에 따라서 ‘이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큰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하나님 앞에 영향력 있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복 받은 사람이다.’라고 말 할 수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세상의 성공과 출세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왕이면 세상에서도 성공하고 하나님 앞에서도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하나님의 기준에서 큰 자가 됩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복 받은 자, 성공한 자, 출세한 자가 됩시다.” 어떤 기준을 적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세상은 다 지나가는 것입니다. 저도 30대 때에는 50대 되신 분들이 “세상 짧다. 다 지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하면 속으로 비웃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50대가 되니까 그 말이 맞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 별것 아닙니다. 세상에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만을 위해서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것은 너무나 부질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짧은 3년 동안 많이 모으시고 출세하시고 하시지 무엇 때문에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증거 하는 일만 하셨을까요? 예수님의 기준은 세상의 기준과 다른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다 포기하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준은 분명히 주님께서 세우신 기준이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기준은 영적인 기준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6장 63절에서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라고 말씀하셨으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 18절에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주님의 기준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육이 아니요 영이며, 세상이 아니요 천국이었습니다. 우리의 자녀를 이 기준에 맞춰서 키울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경을 열고 믿음의 눈으로 성경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 보아도 이 기준은 금방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이 기준으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기를 축원합니다.
2. 작은 그가 큰 자
주님께서 세우신 또 하나의 기준은 작은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조건 낮아지고 작아지라는 것은 아닙니다. 무조건 못 배우고 가난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천대받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자는 복이 있나니” 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직함을 가지고 있어도 마음이 가난할 수 있고 세상에서 별것도 아닌 사람이 거만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서 작은 자라는 말씀은 나를 낮추고 겸손히 여기는 자를 말하는 것입니다. 작은 자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절대로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내가 주인인데 누구를 영접하겠습니까? 내가 나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주를 위해서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작은 자가 큰 자인 것은 작기 때문에, 겸손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므로 큰 사람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주를 위해서 한다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습니까? 그러면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큰 자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시고 여러 가지로 메시아적인 기적과 능력을 행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교만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는 자신들을 큰 자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복음조차 수용할 수 없었고 하나님의 말씀조차 거부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큰 자가 되려면 철저하게 작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크다는 것은 비교의식이 작용되어서 자기를 남 보다 낫다고 여기는 사고방식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크다고 생각하는 자는 시험도 자주 들고 문제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자기를 작게 여기는 사람은 비교의식이 작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남을 용납할 수 있고 더 나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작게 여기는 그가 큰 자가 되는 역설적인 진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본래의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그 뜻은 ‘큰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그의 이름을 바울로 바꾸었는데 ‘작은 자’라는 뜻입니다. 작은 자 만이 예수님을 주인으로 영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작은 자 만이 어린 아이처럼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여자나 아이는 작은 자로 여겼고 심지어는 사람의 수로 계산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점에서 어린아이를 예수님을 영접하듯이 영접하거나, 어린 아이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자는 큰 자인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듣고 영접하는 자는 작은 자입니다. 영혼구원에 초점을 맞추는 성도는 작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작은 자가 되어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작은 자가 큰 자인 것은 주님의 말씀을 전부로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큰 자는 주님의 말씀을 부분적으로 걸러서 자기의 기준에 맞추어서 받습니다. 지식으로 걸러내고, 경험으로 걸러내고, 판단으로 걸러내고 받을 만한 것만 받으니까 어떤 말씀도 은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받는 사람에겐 역사가 일어나지만 자기 기준에 걸러서 받는 사람에겐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자가 큰 자입니다. 주의 말씀을 받은 자들 가운데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주의 말씀에 전적인 순종을 했던 작은 자들입니다. 이들이 성령 충만을 받았고 마침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되는 큰일을 했습니다.
작은 자로 살아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작은 자는 작은 일을 큰일처럼 생각하며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일들이 모여져서 진정 큰일을 이루는 것입니다. 맡겨진 작은 분야에서 큰일처럼 여기며 헌신하며 충성하면 사람이 변하고 세상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집사님! 주일 학교 한 반을 맡아 보시지요.”
“그 반이 몇 명인데요?”
“3명밖에 없지만 맡아주시겠어요?”
“에이, 그까짓 3명밖에 안 되는 아이들을 내가 어떻게 맡아요?”
만약 이런 마음이 우리 속에 있다면 이미 내가 커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큰일을 작게 여기는 것입니다.
“집사님! 꿈꾸는 나라 어느 부서에 교사가 부족한데 아이들이 3명밖에 없답니다. 맡아 주시겠어요?”
“아! 예! 이렇게 귀한 일을 나에게 주셨습니까?”
세상에서는 작은 일로 보지만 주님께서 맡겨주셨기 때문에 큰일로 생각하고 그 일에 헌신하고 충성할 때 3명이 30명이 되고, 30명이 300명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그 일이 세상 적으로 보면 힘없어 보이고, 가치 없어 보이고, 돈 생기는 일도 아니고, 명예가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큰일인 줄로 믿습니다. 작은 일을 크게 여기고 일하는 사람이 큰 사람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큰일을 갖다 주어도, 아무리 소중한 일을 갖다 주어도 그까짓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작은 일이라고 생각하니까 시간을 쏟지도 않고 헌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열매가 없는 것입니다.
무디 목사님이 원래부터 유명한 목사님이었습니까? 무디 목사님이 주일학교교사를 하고 싶었지만 당신 같은 사람은 교사할 자격이 안 된다며 신발정리나 하라고 했답니다. 그런데 신발 정리를 얼마나 성실하게 잘했는지 모릅니다. 작은 일에 충성한 것입니다. 그러다 아이들을 모아오는 일을 하게 되었고 교사로 쓰임 받게 되어 결국 무디 목사님으로 인해 주일학교에 큰 부흥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또 미국의 어느 교회는 화장실이 주의백성들이 출입하는 화장실이기에 성실하게 감당하여 깨끗하게 청소해 놓았답니다. 화장실에서 커피를 마셔도 될 정도로 깨끗하게 청소를 해 놓으니까 교회가 부흥되더라는 것입니다. 화장실 청소 같은 작은 일도 큰일로 생각하면 여기에서 영혼구원의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목장에서 40일전도 페스티발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프로그램을 여러분께 드렸습니다. 그 실천 과정을 목장보고를 통해서 보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프로그램대로 실천하여 태신자를 섬기는 모습과 그로 인해 태신자들이 변화된 모습들을 적어 놓은 보고를 보면서 제가 말한 부분들을 작은 일로 받지 않고 큰일로 생각하는 목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반드시 그 목장에서 태신자를 구원하는 역사가 일어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목장전도 페스티발을 아무리 강조해도 그것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수십 번 페스티발을 해도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일을 큰 일로 여기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지만 주의 일을 작은 일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기 때문에 결국은 내가 작은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 앞에서 큰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이 어떤 일이든 간에 그것을 소중하게 여기고 충실하게 그 사명을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작은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기준에 맞추어서 우리의 삶을 사는 믿음의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9:46~48 9장 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47 예수께서 그 마음에 변론하는 것을 아시고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자기 곁에 세우시고 48 저희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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