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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신 왕 예수
마가복음 11:1~10 유우열 목사 2011-04-17
승리하신 왕 예수(마가복음 11:1-10)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일은 부활주일입니다. 종려주일과 부활주일 사이의 일주일을 고난주간이라고 부릅니다. 이 날에 왕 되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그분께 만 머리 숙이고 그분께 내 삶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니까 이른 아침부터 배낭을 메고 많은 사람들이 이리저리로 오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날씨가 좋으니까 산을 찾는 사람들도 참 많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은 산이 오라고 손짓을 하는데도 안 가셨네요. 또 오후에는 야구장에도 흥미진진한 경기를 관람하는 사람들로 꽉 찹니다. 이처럼 갈 곳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기 때문에, 그 발 앞에 무릎을 꿇어야하기 때문에, 예수님만은 섬겨야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줄로 믿습니다.

 요즈음은 취미 활동도 다양합니다. 바다에서, 하늘에서, 산에서 즐길 수 있는 온갖 운동경기와 온갖 취미 활동이 개발되어 있어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얼마든지 세상에서 즐길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일들이 주일과 연결되다보니 믿음생활 하는 것이 그 어느 때 보다도 어렵습니다. 이러한 시대상황 가운데서 일  평생을 주님 앞에 나아가서 무릎 꿇어 그 주님을 나의 왕으로 모시고 그 앞에 경배하겠다고 하는 우리들의 각오와 결단이 주님 앞에서 흔들리지 않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오늘을 종려주일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군중들이 환호하며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었기 때문입니다. 군중들은 앞에서 예수님의 길을 열고 뒤에서는 끝없이 따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할렐루야는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라는 뜻입니다. 아멘은 무슨 뜻입니까?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당시에 군중들은 예수님을 다윗 같은 위대한 왕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지만 이 일은 며칠 후에 있을 그의 십자가 고난의 전주곡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기본적으로 오늘 군중들의 환영이 오해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일차적으로 예수님은 종려주일에 당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오해받는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환호성을 질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세상의 왕으로 생각하는 오해가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정치적인 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아로, 경제문제를 해결해주는 메시아로 환영했는데 그것이 아니다 보니 그들은 불과 5일 후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외쳤던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예수님께서는 다 알고 계셨으니 환호를 받으면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것이 결코 즐겁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환영하되 오해하여 환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바로 알고 따라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도 목회를 하면서 고난가운데 하나가 있다면 예수님을 잘못알고 따라왔다가,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다가 어느 순간에 뒤도 안보고 돌아서는 성도를 볼 때입니다. ‘가보니까 소용없던데.’ 라고 말하며 뒤 돌아서는 모습을 보는 아픔이 있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군중들이 자신들을 로마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인 메시아, 가난에서부터 해방시켜줄 메시아로 환영했는데 그것을 해결하지 않으시자 실망하고 돌아서서 가는 모습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분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진실로 어떤 분이신지, 우리는 그 분 앞에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바르게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1. 겸손하신 분
 종려주일에 예수님이 타신 것은 어린 나귀였습니다. 군중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생각하고 호산나를 외쳤는데, 정작 예수님은 왕이 결코 탈 것 같지 않은 나귀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성경의 말씀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입니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신 것은 그가 겸손하신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주님은 마음만 먹는다면 군마와 황제의 수레라도 동원하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종려주일에 우리는 먼저 예수님의 이런 겸손을 보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겸손은 오늘 그가 타신 나귀를 보고서야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어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것 자체가 겸손입니다. 인간의 형체를 입고 30여년을 사신 것 자체가 상상하기 힘든 겸손입니다. 만일 왕이 단 하루만 평민처럼 살아도 그것은 대단한 겸손일 것입니다. 그런데 왕의 왕이신 창조주가 30여년을 피조물이 되어 사셨으니, 그 보다 더한 겸손이 어디에 있겠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6절로7절에 보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분이 예수님이신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모습도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겸손입니까? 성경에는 여러 가지 겸손의 모습이 있지만 빌립보서 2장 3절에 보면 바울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 이것이 바로 겸손의 본질입니다. 우리가 이 겸손의 마음을 품게 되면 우리의 언어가 자연히 겸손해 질 것이고, 우리의 행동 역시 자연히 겸손해 질 것입니다. 마음의 겸손함 없이 말과 행동의 겸손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혹시 잠깐 가졌다가도 금방 흐트러지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일에 다툼이 있습니까? 우리의 관계에 허영이 있어서 괴롭습니까? 분명히 이 겸손한 마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창조주가 피조물이 되셨습니다. 왕이 초라한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격 있는 분이었습니다. 다스릴 자격, 말을 탈 자격, 그리고 명령하고 요구할 자격, 모든 자격을 갖추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모든 자격과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겸손히 인간이 되셨으며, 겸손히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구원자가 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주님으로부터 겸손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겸손은 예수님을 닮은 모습입니다. 그럴 때 주님이 나타날 것입니다. 겸손은 이웃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서 모르는 분이 계시더라도 먼저 인사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한 모습입니다. 언젠가 그분이 나를 알게 되었을 때 좋은 인상이 남을 것이며 전도에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2. 평화로우신 분
 예수님이 나귀를 타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평화로우신 분임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이 타신 나귀는 새끼였을 뿐만 아니라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나귀였습니다. 그러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나귀는 분명히 자기 등에 누가 타는 것을 싫어하여 적잖이 저항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이 나귀는 예수님께 조용히 등을 내어드렸습니다. 이것을 보고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그만큼 부드럽고 온유한 분이었다는 것입니다. 생전 사람을 한 번도 태워보지 않은 어린 나귀조차도 두려워하지 않고 편안하게 몸을 내어줄 수 있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하고 평화로운 분입니다.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주님께로부터 온유와 평화를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온유함을 배워 우리의 이웃들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온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이전에 우리의 얼굴과 우리의 언어와 우리의 행동을 통해 사람들이 먼저 안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주는 위로를 전하기 이전에 우리의 평화로운 언행이 주는 위로를 먼저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툭하면 화내고 분노하며 짜증 섞인 낯빛을 가진 사람이 복음을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평화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든지 분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분란을 잠잠하게 하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일터와 가정에서 나로 인해 평화가 깨어집니까? 아니면 나로 인해 평화가 찾아옵니까?

 나 때문에 평화가 깨어지는 것은 쉽습니다. 그저 욕심껏 행동하면 됩니다. 하지만 나로 인해 평화가 찾아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워야 하고, 헌신해야 하며, 인내해야 하고, 희생해야 합니다. 쉽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평화의 씨를 뿌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평화로운 사람은 짐승과도 평화를 누립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과 평화를 누릴 수 없겠습니까? 모든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다툼이 사라지고 평화할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승리하신 분
 종려나무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나무입니다. 아무리 칼로 줄기를 베어버리고, 도끼로 밑 둥을 찍어버려도 다시 싹을 틔우는 것이 바로 종려나무입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사막 한가운데서도 이 나무는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종려나무는 무엇보다도 ‘승리’를 상징합니다.

 역사적으로 시리아 왕이었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예루살렘을 침공했고 성전에 들어가 돼지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당시 유대의 지도자 마카베우스는 더렵혀진 성전을 정결하게 했고 유대인들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승리한 전쟁 영웅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죽여도 죽지 않는 근성을 가졌기에 승리를 상징합니다. 이런 종려나무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영접했던 것은 예수님을 왕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승리자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중이 예수님을 승리하시는 분으로 본 것은 옳았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승리가 무엇에 대한 승리인가 하는 것입니다. 군중이 기대했던 승리는 무엇입니까? 로마의 정치적 압제에 대한 승리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이 제 2의 유다 마카베우스가 되어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어주길 바랬던 것입니다. 또, 배고픔에 대한 승리입니다. 한 순간에 이스라엘의 경제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랬던 것입니다.

 오늘 종려주일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 그런 승리를 기대하면서 손에 종려나무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물론 그런 승리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승리 정도를 가져다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정도의 승리를 위해 창조주가 피조물로서 30여년을 사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의 정치적 압제로부터의 구원이 아니라 마귀의 영적 압제로부터의 구원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궁핍과 배고픔으로부터의 구원보다 훨씬 근본적으로 중요한 영적인 구원을 가져다주는 승리입니다.

 이 세상의 정치문제가 어디서 왔습니까? 이 세상의 경제문제가 어디서 왔습니까? 이 세상의 죽음의 문제가 어디서 왔습니까? 육신의 질병의 문제가 어디서 온 것입니까? 다투고 싸우는 전쟁의 문제가 어디서부터 온 것입니까?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또 이 죄는 누구로부터 온 것입니까? 사단마귀로부터 온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와 사단으로부터 우리를 승리케 하시는 만앙의 왕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 3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오늘 저와 여러분이 예배에 참석했다는 것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종려나무가지를 흔들어야 합니까? ‘주님! 내 정치문제 해결해 주세요. 경제 문제 해결해 주세요. 내 질병의 문제 해결해 주세요.’ 물론 이런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런 문제보다는 죄와 사단마귀와 죽음이라는 근본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우리를 영원히 해방시켜주시는 영원한 승리자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을 바로 알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아주 감동적인 간증을 들었습니다. 인천 어느 교회에 출석하는 분이신데, 그 딸이 서울대학교 음대에 입학하여 첼로를 전공하고 있다고 합니다. 서울대학에 입학하는 과정에서 있었던 간증입니다. 그 학생이 고등학교 때 가지고 있던 첼로가 9천만 원 정도하는 거랍니다. 그런데 레슨 하는 선생님 말이 이 첼로로는 곤란하다며 더 좋은 첼로로 연습할 것을 권면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서울대학교 아무개 교수가 있는데 그분 첼로는 국내에 5대 밖에 없는 귀한 것이고, 값이 10억이 넘는 것인데, 그것으로 연습하고 시험을 보아야 한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그 첼로를 빌리면 1개월에 임대료가 1%로써 약 천만 원을 렌트비로 지급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니 몇 개월을 임대하려면 돈도 많이 들고 활과 그 외의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이 문제 때문에 울면서 기도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첼로를 가지고 계신 서울대 교수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나는 가난한 학생 중에서 이 첼로를 사용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기도제목이었습니다.” 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나 단 이 첼로를 사용하는 조건이 있는데 첫째는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약속을 하는 것이고, 둘째는 앞으로 봉사활동을 할 것을 약속하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약속을 하고 그 첼로로 연습하였고, 시험에 합격해서 지금 대학에 다니고 있으면서 그 약속대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지금은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감동되는 것은 우리나라 요처 요처에 이토록 주님을 사랑하고 복음을 전하려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질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으로 도와주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을 도와주는 것이 진정으로 도와주는 것입니까? 진정한 도움은 우리가 가진 것을 사용하여 죄와 사단에 매여서 고통당하는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이 사실을 바로 알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 수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그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예수님을 전파하기를 바랍니다. 승리하신 왕, 죄에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시고 마귀에게서 우리를 승리하게 하신 왕 되신 예수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엎으려 경배하며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으름으로 축원합니다.
마가복음 11:1~10
11장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섰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가로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의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걸쳐 두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은 자기 겉옷과 다른 이들은 밭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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