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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혜사 성령님
요한복음 14:26~26 유우열 목사 2011-06-19
보혜사 성령님(요14:26)

 ‘보일 듯이 보일 듯이 보이지 않는’으로 시작되는 한정동 선생이 지은 ‘따오기’라는 동요가 있습니다. 이 노래가사가 성령님에 대해서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상태를 잘 표현한 것처럼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성도는 성령님에 대해서 많이 말하고 있지만 정작 성령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고 또 성령님은 우리 눈에 보이는 분도 아니고 손에 잡히는 분도 아니기 때문에 오해도 있을 수 있고 바른 이해가 없음을 보기도 합니다.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고, 그러나 모른다고 말 할 수도 없을 만큼 알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오늘 이 시간 집중함으로 성령님에 대한 바른 정확한 이해가 생겨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늘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 있다면 예수님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가장 복된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역이 있다면 성령님의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죽은 영혼을 살리시며 영혼을 생명이신 예수님께로 인도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예수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알게 하고 깨닫게 해서 믿게 하고 믿어서 죄 사함 받고 구원받게 하시는 사역을 성령님께서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령님의 사역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들 가운데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성령님에 대해서 깊은 이해가 부족한 분들이 많습니다. 성령님에 대해 알기를 원합니다.

1. 성령님은 누구이신가?
 성령님은 누구이십니까? 성령님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려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가 신비이기에 삼위일체를 인간의 언어로 완벽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한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라는 숫자에 존칭을 붙인 것입니다. 그러나 가톨릭에서는 우리와 다른 것이 하느님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하늘님에서 나온 것으로 하나에 강조점을 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강조를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일하신 하나님에 강조점과 위대성을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정말 한 분이십니까?  요한복음 14장 16절을 읽어보시겠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이 말씀에는 하나님, 예수님 그리고 보혜사이신 성령님이 나옵니다. 즉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그리고 보혜사 성령님이 나옵니다. 또 잘 아시는 말씀대로 마태복음 28장 19절에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곧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삼위일체를 부정하고 오직 하나의 하나님만 인정하는 단일신론은 이단으로 정죄 되었습니다. 또한 양태론이라는 것도 나왔는데 이것은 구약시대에는 성부하나님이 역사하시고, 신약시대에는 성자예수님이 역사하셨고, 지금은 성령하나님 시대라고 구분하는 것인데 이런 이론 역시 이단으로 정죄되었습니다.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이어야 정확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입니다. 누가복음3장 21절로 22절을 다 같이 읽겠습니다.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모습입니다. 같은 시간 장소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같이 나타나셨습니다. 따라서 양태론은 잘못된 것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은 구약에도 함께 사역하시고 신약에도 함께 사역하시고 지금도 함께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은 세 분이신가 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교리적으로 삼신론이라고 합니다. 이것도 이단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한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한분이시면서 동시에 세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신비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설명하기 위해 빌립보서 2장 6절로 7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근본이 하나님과 하나이고 본체로 하나님과 하나인데 수적으로는 셋이라는 말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분이신데 세 위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즉 존재는 하나인데 수는 셋입니다. 놀라운 신비입니다.

 삼위일체론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로 인해서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신천지에서는 아예 삼위일체론을 부정합니다. 심지어 신천지 교주 이만희는 자신을 보혜사라고 합니다. 어제 어떤 자료를 보니까 신천지교주 이만희가 휠체어를 타고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보혜사성령이 인간이 만든 병원에서 치료를 받습니까? 이런 이단을 믿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삼위일체에 대해서 조금만 이해를 해도 이단에 미혹되지 않을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사역을 통해서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성부 하나님은 창조의 사역을 감당하셨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그러면 태초에 성부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성자하나님과 성령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창조사역에 동참하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면 성자 하나님, 즉 예수님은 어떤 사역을 하셨습니까? 성자하나님의 사역은 속량의 사역입니다. 에베소서 1장 7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우리대신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시고, 우리의 죄를 갚아주시고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사역은 예수님께서 혼자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누가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이 보내주셨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도록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성부하나님 성령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성령하나님의 사역은 보혜사의 사역입니다. 보혜사란 요한복음 14장 16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라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우리에게 보내실 성령님의 역사를 지칭한 것입니다. 이 보혜사 성령님은 요한복음 14장 26절 말씀처럼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예수님에 대해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또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님을 증언하는 역사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보혜사성령님의 역사를 쉽게 말하면 예수 믿게 하는 역사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을 예수 믿도록 감동하시고 감화하시고 가르치시고 깨닫게 하셔서 그 입술로 ‘예수님은 나의 구주십니다.’ 라고 고백하게 하는 역사를 하십니다.

2. 보혜사 성령님
 위에서 살펴 본 대로 성부 하나님의 사역에 대해 쉽게 이해합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역인 속량사역에 대해서도 큰 문제없이 믿고 나갑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사역에 대해서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마치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보며 로마에서 정치적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선지자로 오해한 것과 같이 성령님에 대해서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성령님을 어떤 현상이나 특이한 기적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일들을 일으키는 분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령께 임하시면 여러 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뜨겁고, 꿈꾸고, 방언하고, 불이 떨어지며, 입신도합니다. 사도행전 2장 1절로 4절을 보면 오순절 날이 이르렀을 때에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나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오늘도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과 같은 역사가 일어나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 역사는 아주 특별한 사건입니다. 이 일이 있기 전 까지는 한 번도 주도적으로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님께서 주도적으로 역사하는 시대라는 것을 표현하기 위한 역사였던 것입니다. 성령을 알지 못한 이들에게 성령을 가장 쉽게 알도록 도와준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이 강림할 때 모두가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후에 사도행전을 보더라도 성령 받을 때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처럼 받은 적은 없습니다. 어느 경우엔 말씀을 들을 때 성령 받고, 어느 경우엔 안수를 받을 때 성령 받고 어느 경우엔 기도하다가 성령 받기도 합니다. 이처럼 성령 받는 양태는 여러 가지인 것입니다. 만일 성령의 역사가 신비체험, 초월적 경험, 특이한 느낌으로만 해석되는 것은 매우 위험한 것이며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성령님에 대한 오해가 있는 이유는 성령께서 왜 그런 역사를 하시는지 목적을 몰라서 그렇습니다. 성령님은 보혜사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 깨닫고 믿도록 하시는 일을 하시는 분입니다. 이를 위해 때론 기적도 행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적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성도는 성경공부를 통해서 예수님을 깨닫고 믿게 됩니다. 이것도 보혜사의 역사입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의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말씀처럼 누구든지 예수님을 주로 고백한다면 그가 기적을 보고 고백을 하든, 공부를 하고 고백을 하든, 설교를 듣고 고백 하든 모두 보혜사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결과인 것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는 “예수는 주시다.”라는 고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혹 바람소리를 못 듣고, 불을 못 받고, 방언을 못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구주라고 믿고 고백하게 된다면 성령께서 임하신 것이고 역사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똑똑하고 잘났다고 예수님을 주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부족하고 못났기 때문에 부르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성령님께서 역사하셔야 예수를 주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나의 주라고 하는 성령체험이 가장 중요한 체험이며 위대한 체험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을 보혜사 성령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있기를 바랍니다.

3. 성령 받은 사람의 책임
 보혜사 성령님은 크게 두 가지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받도록 예수님에 대해 깨닫게 하시는 역사를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나오고 나서 사업이잘 되니까 “예수님은 나의 구주십니다.”라고 고백하다가 사업이 안 되면 “예수고 뭐고 다 소용없어. 구주는 무슨 구주야?” 라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닌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 건강하든지 몸이 약하든지, 사업이 잘 되든지 못 되든지 “예수님은 나의 유일한 구주십니다.”라고 고백되어지면 보혜사 성령님이 내 안에 임하신 증거인 줄로 믿습니다.

 둘째, 내가 믿어 구원을 받게 된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증인이 되게 하십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피할 수 없는 책임이 바로 이것입니다. 방언을 하는 것도 아니고, 바람 소리를 내고 다니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1장 8절 말씀대로 증인되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증인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라는 사실을 외치는 것을 말합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외치는 것입니다. 손해가 와도 외치는 것입니다. 핍박이 와도 외치는 것입니다. 기회가 되는 안 되든 외치는 것이 증인인줄로 믿습니다. 성도들은 성령이 임하시면 신비한 현상과 표적이 일어나는 것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성령이 임하시면 증인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성령 받은 성도는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시라는 확실한 고백이 있고 간증이 있는 성도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증언하는데 부끄러움이 없고 나의 주이신 예수님을 자랑하고 소개하는 것이 기쁘고 즐거운 사람입니다. 이런 성도가 바르게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입니다.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 받은 제자들은 더 이상 불 받고, 화끈 해지고고, 쿨 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습니다. 증인 역할을 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증인으로서 나아가서 예수를 전하다보니까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방언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전하니까 역사가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이런 모습이 정상적으로 성령을 받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간혹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표적과 기적, 예언과 입신 같은 신비한 현상만을 추구하는 사이비 교회와 교단들이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기성교회 신자들을 미혹하고 성령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불신자 전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의 전략은 기존교회 성도들을 미혹해서 예언, 입신, 표적으로 기존교회에 대한 불신을 심어 기존신자를 빼내 가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성도들은 무엇을 보았다 하고 또 무엇이 들린다고 하면서 미혹하니까 쉽게 교회를 옮깁니다. 이들은 이런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한 후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어떤 것이 부흥입니까? 불신자가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부흥인줄로 믿습니다. 우리교회에 만 명이 모여도 불신자가 회개하고 돌아오지 않으면 부흥이 아닙니다. 물론 이사를 할 수도 있고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서 교회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불신자가 회개하지 않으면 교회의 진정한 부흥은 아닌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올바른 성령역사를 지향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불신자에게 증인의 사명과 책임을 다하게 합니다. 정상적인 성령의 역사는 불신자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이 때 성령께서 역사하심으로 믿어지고 깨닫게 하시어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은 우리가 하지만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고 고백하게 하시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보혜사성령님이 충만히 임하시기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흔들림 없는 예수그리스도에 관한 확신을 갖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예수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는 마음의 간절함과 뜨거움이 있기를 바랍니다. 지혜를 가지고 온유와 부드러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낼 수 있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두축이 시작되어 셋째 주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두축 과정에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던 120문도가 성령 받고 증인 된 것처럼 우리도 증인으로 헌신하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증인으로 순종할 때 죽은 영혼이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금번 두축에 여러분이 기적의 주인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4:26~26
14장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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