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를 해야만 할 이유(고린도전서 9:20-27)
어떤 일을 할 때 적극적인 사람과 소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적극적인 사람은 어떤 일이든 시작을 하면 끝까지 합니다. 그리고 일을 할 때 모든 힘을 남김없이 쏟아 넣습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사람은 일을 시작할 때부터 힘을 다하지 않고 집중하지 않고 결국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포기합니다.
신앙생활도 적극적인 사람과 소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일을 적극적으로 한다고 해서 신앙생활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 적극적인 사람은 어떤 일이든 헌신하려고 하고 열심과 충성으로 목표를 향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소극적인 사람은 게으르고 나태하고 해야 할 일도 하지 않고 앞자리보다 뒤에서 바라보고, 안으로 들어오는 것보다 밖에 있고, 가까이 하기보다 멀리 떨어져 관망하고 열심히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선한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의 일이나 교회생활을 어떻게 하시고 계십니까? 만일 소극적으로 하고 있다면 더 이상 머뭇거리지 말고 결단하여 온 힘을 다하여 열심을 가지고 주의 일에 힘써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바랍니다.
사도바울은 누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극적인 사람입니다. 24절을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달리는 사람입니다. 또 빌립보서3장을 보면 사도바울은 뒤의 것은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서 달려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적극적인 신앙생활, 적극적인 헌신과 충성을 이루는 사람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삶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목표를 향해서 헌신하고 충성을 다해서 달려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세상일은 아무리 많이 이루어 놓아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뜻과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면 그것은 영원토록 상급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방향을 분명히 하고 달려갔습니다. 2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지금 여러분이 열심을 내는 부분이 어떤 부분입니까?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향과 맞는지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속도보다 방향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속도도 빠르고 방향도 정확하게 정해졌다면 그것보다 좋은 것은 없습니다. 방향은 맞는데 속도를 안 낸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 방향이 잘못되었는데 속도를 낸다면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될 일입니다. 방향도 맞고 속도도 맞는다면 이것은 꼭 해야 할 일이라고 믿습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방향을 맞추고 그것을 위해서 달려갔습니다. 여러분!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지 않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자유로운 신앙생활이 함정입니다. 자유하다 보면 열매가 없습니다. 달려간다는 것은 무엇에 매인다는 것입니다. 목표에 매인 것입니다. 방향에 매인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다른 것을 바라보지 않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자동차 운전을 할 때도 30km 미만으로 운전하면 주위를 다 보아도 됩니다. 그러나 100km이상으로 달리면 옆을 볼 시간이 없습니다. 오직 앞만 보아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방향을 정확하게 잡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달려가면 우리가 바라보지 않는 나머지 것들도 다 책임져 주시고 역사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달리지 않으면 안 될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날마다 달리지 않으면 몸에 못된 것들이 달라붙기 때문입니다. 온갖 쓸데없는 것이 붙기 때문입니다.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여유 시간에 엉뚱한 일에 시간을 낭비합니다. 걸어갈 때도 천천히 걸어가면 몸에 파리나 모기가 달라붙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리면 어떤 것도 붙지 못합니다. 달리는 인생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즈음은 휴가철인데 휴가도 잘못 보내면 신앙생활의 영성과 좋은 습관, 좋은 방향에 엄청난 문제가 올 수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휴식은 중요하지만 무조건 쉬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쉰다는 것은 일과 생각을 멈추고 몸을 자유하게하며 여유를 갖고 즐기며 재충전을 하고 활력을 얻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쉴 때 치명적인 병에 걸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휴식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도들 가운데 그런 분도 있습니다. 열심히 충성하고 헌신하다가 ‘힘들어 좀 쉬어야겠다.’ 생각하고 멈춥니다. 그러나 쉬면 좋아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쉬니까 오히려 오만 잡생각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더 문제에 빠지는 것입니다. 몸도 정신도 신앙도 건강하려면 달려야 될 줄로 믿습니다.
기도도 어제 했다고 오늘 안 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또 기도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어제까지 말씀 읽었다고 오늘 안 읽으면 안 됩니다. 오늘 또 읽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지금까지 봉사하던 사람이 그것을 놓아보십시오. 그때부터 문제가 오는 것입니다. 오늘도 또 봉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성령 충만했기 때문에 오늘부터 성령 충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성령 충만해야 영원히 충만해 질 줄로 믿습니다. 만일 쉬거나 멈추면 버림받는 몸이 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쳐 복종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멈추면 그때부터 문제가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 몸을 복종시켜서 끊임없이 달리는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다른 교회보다 사역이 많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해 3배 이상입니다. 왜 자꾸 “모이라. 전도합시다. 기도합시다. 훈련받으십시오.” 이렇게 쉴 틈이 없이 움직이게 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은 교회부흥 때문만이 아니라 성도 여러분의 몸과 영혼과 신앙을 살리는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쉬는 교회, 일하지 않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몸이 원하는 대로 힘들지 않고 편하게 주일예배나 드리고 자유롭게 기도하고 자기 입맛대로 신앙생활 하면 좋을 것 같지만 그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간단합니다. 여러분 마음대로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교회만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교회도, 목사도, 성도 여러분도 사는 길은 오직하나 몸을 쳐 복종시키는 길 뿐입니다. 전도하라고 하면 싫지요? 그러나 어쩔 수 없습니다. 전도해야 몸도 살고 영혼도 살기 때문에 살려면 전도해야합니다. 전도를 쉬면 버림받습니다. 전도 하지 않고 멈추면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오시면서 우리에 있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으로 인한 기쁨보다도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시는 기쁨이 더 크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서 예배드리는 기쁨보다는 한 영혼을 구원하는 기쁨이 더 큰 줄로 믿습니다.
25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전도는 찬란하게 빛나는 승리자가 받는 영광스런 면류관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관을 받으려면 다른 것은 절제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고 싶은 것, 만나고 싶은 사람, 가고 싶은 것, 다른 일들, 다른 생각들, 다른 계획들은 멈추고 사람을 살리는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영혼구원, 생명역사를 위해 전도하는 일을 위해 달리자는 것입니다.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23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사도 바울이 달리는 삶을 살았던 것은 분명한 방향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방향설정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해줍니다. 잘 세워진 방향이면 달릴수록 득이 되고 결과도 좋습니다. 그러나 잘못 세워진 방향은 갈수록 해가되고 결과까지 가기도 전에 낭패를 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라는 분명한 방향을 삶의 푯대로 세워놓고 달렸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한 가지 듣지 못한 뉴스가 있습니다. 일상적인 뉴스는 TV, 인터넷, 신문을 통하여 다 듣습니다. 그러나 지구촌의 어떤 이야기도 복음이 되지 못합니다. 이 소식은 사람을 구원하여 영원히 살도록 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고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죄 사함을 받고 영생을 얻는다는 복된 소식입니다. 전도는 그 소식을 듣도록 전하는 것입니다.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전도하면 핍박 받습니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때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혼구원은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닌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는 방법으로 전도를 허락하셨기 때문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영혼을 구원하기를 기뻐하신 줄로 믿습니다.
요한복음 6장 38절로 39절에는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잃어버린 사람을 마지막까지 찾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우리도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찾아가 그들을 만나고 이 땅에 사는 이야기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전도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뜻을 이루어 드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예수님의 최후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회심 이후의 삶은 너무 분명했습니다. 삶의 집중력과 추진력이 흔들리거나 여유를 부리지 않았습니다. 본문 26절에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라는 말씀처럼 그는 믿고 나서부터 바로 전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나는 예수 믿은 지 얼마 안 돼서 전도 못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사람이 전도 더 잘합니다. 열매가 새 순에서 맺듯이 오히려 오래 믿은 사람이 전도 못할 때가 더 많습니다. 사도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최후의 명령을 자신에게 주신 명령으로 받았기 때문에 다른 것에 한눈팔지 아니하고 오직 이 일을 위해서 나아가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아무리 열심을 낸다할지라도 그것이 허공 치는 것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지혜를 발견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된 지혜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것인 줄로 믿습니다. 나는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가지고 갔는데 심사하는 사람이 “이 쓸데없는 것을 왜 가지고 왔어?” 라고 한다면 어찌하겠습니까? 학생에게 시험문제를 냈는데 정답과 전혀 관계없는 것을 한바닥 잔뜩 써놨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어찌 보면 우리 인생도 그렇습니다. 잠도 줄여가며 열심히 일했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전혀 관계가 없다면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열심히 사업해서 물질도 많이 버시길 바랍니다. 공부에도 성공하시길 바랍니다. 건강도 유지하시길 바랍니다. 높은 자리에도 올라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위해서 입니까? 주님께서 주신 그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인줄로 믿습니다.
작년 사랑하는 젊은 아들을 잃은 권사님이 있습니다. 아들 강민석 집사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신학대학원에 다니던 중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33살 젊은 아들을 잃었으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창문으로 환한 빛줄기가 들어오더니 아들이 찾아왔더랍니다. 그리고 아들이 어머니 무릎을 베고 눕더랍니다. 그래서 권사님은 아들에게 “내가 하나님께 왜 이렇게 젊은 아들을 데려갔느냐고 따져야 하겠다!” 했답니다. 그랬더니 아들도 “엄마 나도 따져봤어!”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면서 “엄마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생사화복은 아무런 관심이 없어! 구원받아야 돼! 영혼의 구원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해! 엄마 전도해야 돼! 엄마 5명만 전도해!” 라고 하면서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권사님이 낙심 가운데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는 은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생사화복이 제일 중요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이 세상에서의 생사화복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30에 죽으나, 60에 죽으나, 90에 죽으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 안에서 인간의 시간이란 순간에 지나가는 점과 같은 것입니다. 재물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볼 때는 많고 적음의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공부를 해서 박사가 되었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 영혼이 구원을 받았느냐 구원받지 못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유언은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16장 15절로 16절을 보면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영혼구원에 우리의 온 관심을 쏟을 수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교회가 두 배 부흥 기적축제를 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알고 있는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 아는 사람 중에 불신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람이 아무리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도 최하 100명은 안답니다. 많이 관계를 맺는 사람은 만 명 이상 관계를 맺는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구원받지 못한 30명을 관심대상자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찾아보고 섬기는 것입니다. 영혼 구원하는 것이 주님의 유언이기 때문에 이 일에 우리가 힘써야 될 줄로 믿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높이 올라가면 어떤 집도 다 성냥갑 같습니다. 큰 집도 작은 집도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천국에서 보는 기준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잘 사는 것, 부자 된 것, 공부 잘한 것, 출세한 것, 잘난 것, 이러한 것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 보는 것은 오직 영혼이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았느냐 입니다. 따라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세상에서는 별로 관심 받는 일이 아니지만 천국에서는 유일한 관심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영혼 구원을 위해 최고의 관심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전도하는 분들에게 나타나는 고쳐야할 것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전도하러가서 논쟁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교리적, 신학적, 기독교의 우월성과 자기주장을 하며 사람들과 논쟁하거나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전도하러가서 설교하지 마십시오.
성도들은 교회 와서 목사로부터 설교를 많이 듣게 됩니다. 그런데 설교를 자주 듣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설교자가 됩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면서 설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성도들이 주의할 것은 누구를 만나든지 설교하려는 습관을 버려야합니다.
셋째는 전도하러가서 심판하지 마십시오.
전도는 감정으로 하거나 자기의 성격과 성질대로 하면 안 됩니다. 전도할 때 가장 많이 실수하는 것은 쉽게 감정에 사로잡혀 상대방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전도할 때 옳고 그르고, 맞고 안 맞고, 진짜와 가짜를 골라내어 따지고 정죄하고 심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전도는 구원을 전하는 것입니다.
3. 모두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전도를 해야 하는 이유는 모두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전도는 교회, 세상, 가정,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살리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가 있습니다. 썬다싱이 친구와 함께 티베트를 넘어가는데 어떤 사람이 쓰러져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얼어서 동사 직전에 있었습니다. 썬다싱이 친구에게 이 사람을 데리고 가자고 말했지만 그 친구는 이 눈길을 혼자도 가기 힘든데 어떻게 이 사람을 데리고 가냐며 혼자 가버렸습니다. 썬다싱은 그 사람을 메고 산을 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얼마쯤 가다보니 발에 뭔가가 툭 걸렸습니다. 자기만 살겠다고 먼저 간 친구는 얼어서 죽어버렸던 것입니다. 혼자 걷기도 힘든데 사람을 메고 가니 얼마나 힘들고 땀이 나겠습니까? 그 열기로 얼었던 몸이 풀려서 동사직전의 사람도 깨어나고 그 사람을 메고 가는 사람도 얼어 죽지 않고 같이 살았던 것입니다.
영혼구원은 죽어가는 사람을 메고 가는 것처럼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나도 살고 그도 사는 길입니다.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편안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죽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리는 기쁨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기쁨이 없으면 예수 믿는 성도의 진정한 기쁨이 없는 것입니다. 전도는 모두를 살리는 축복입니다.
여러분! 나도 내 믿음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시험 들면 안 믿는 사람하고 똑같습니다. 오히려 믿지 않는 사람보다도 못합니다. 직분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나아가지 않으면 어느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영혼이 피폐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눈에 보이는 것이 다 시험거리로 보이고 문젯거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인터넷에서 교회 비판하는 것만 보고 거기에 시험 드는 것입니다. 거기에 빠져버리는 것입니다. 같이 장단 맞추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은 내 영혼이 망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믿음으로 바라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전도는 나와 세상사람 모두를 바꾸고 새롭게 하는 복중의 복인 줄로 믿습니다. 이 패역한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고 죄로 물들어가는 사람을 방치할 수 없다는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부담감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위대한 구원의 길을 사도바울처럼 달려가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전도해야만 할 이유를 발견하였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를 위해서 온 마음으로 노력을 다해서 수고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일에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리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일에 신경 쓰다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놓쳐버리지 않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 나머지 것은 다 책임져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놀라운 응답과 축복을 누리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9:20~27 9장 20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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