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의 이웃인가?(눅10:25-37)
지난 주간에 인도 의료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여러 성도님의 기도와 후원으로 인도 첸나이 민트지역에서 목회자를 위한 세미나와 안과 진료를 하고 안경도 제공하고 많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였습니다. 의료선교는 이번이 처음이어서 새로운 선교의 장을 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이번에는 극빈자 마을에 위치한 교회에서 진료를 하였는데, 국민일보 기자에 의하면 본인이 알고 있던 세계3대 극빈지역을 돌아보았지만 민트지역과 같이 열악한 곳은 없었다고 합니다. 저도 살펴보니 대책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인도 정부조차 대책이 없어 보였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이들에게는 세상에서의 희망이란 없어 보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욱 복음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처럼 복음이 절실히 필요한 모두가 우리의 이웃입니다. 그래서 사계절이 분명하고 온갖 복을 누리고 있는 한국의 성도들은 현재 주어진 모든 것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주어진 복을 통해 선교와 나눔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합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을 시험한다는 것은 악의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예수님의 말씀에 감탄한 나머지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었느냐?”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율법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을 크게 말하면 두 계명으로 축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해라 다섯째부터 열 번째까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사가 답한 것은 십계명을 둘로 축약해서 답한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맞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의 답은 이미 성경에 다 나와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똑똑하고 머리가 비상한 사람들만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면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또 백 일 기도 천 일 기도를 해야만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았다면 그것 또한 진리가 아닙니다. 누구든지 아주 쉽고 간단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진리의 말씀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깨닫는 것은 하늘에서 별을 따는 것도 아니고 땅속에서 금을 캐내는 것도 아닙니다. 이미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것을 내 것으로 믿고 아멘으로 순종만 하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우리도 신비한 것을 알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계시 받았다. 예언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성경가지고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특별한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사람에게도 율법을 통해서 이미 영생을 얻을만한 길이 있었습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모든 답은 있습니다. 특별한 응답 받으려고 하지 말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하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자 이 때 율법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웃의 범위와 한계에 대해서 질문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도 하실 말씀이 많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웃(πλησίον)의 개념은 어법상 집단적인 의미로서 동족이나 같은 종교관계에 있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더나가 배타적인 바리새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나 이방인은 이웃이라는 범주에서 제외시켜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짐승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웃에 대한 개념을 뒤집어엎어 바꾸시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통해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이웃에 대한 사상을 무조건적이고 희생적인 개념으로 바꾸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웃에 대한 개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이웃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크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시간을 통해 이웃이란 누구인가에 대한 개념을 다시 한 번 적립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웃에 대한 개념이 달라지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과 방법이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비유로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났다고 말씀합니다. 사실 그 길은 36Km정도 되는 길로서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그 길 주변에 암석이 많아서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자주 출몰했다고 합니다. 강도 만난 사람은 맞아서 거의 죽게 되었고 길에 버려졌습니다. 이 때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해 갔습니다. 왜 피해갔는지 정확한 이유는 없습니다. 혹자는 자기도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움에 피했다고 봅니다. 다른 이유로는 제사장은 시체를 만지지 않는 율법이 있어서 죽은 시체라고 판단하여 피해갔다고도 봅니다. 그러나 문제는 강도 만난 자를 이웃으로 보지 않았기에 피해 간 것입니다. 자신의 이웃이었다면 결코 피해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레위인도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그도 제사장과 같은 시각을 가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구해주었습니다. 그를 이웃으로 본 것입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습니다. 이튿날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치료를 부탁하면서 치료비가 더 들면 돌아와서 주겠다고 말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를 자기의 이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선행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너희는 선행을 하라 하지 마라의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닙니다. 선행이 나오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바로 옆에 죽어가는 사람이 있어도 ‘그건 자기 운명이지. 제 팔자지. 저주 받아서 그렇지.’라고 생각한다면 도와주겠습니까? 긍휼히 여기겠습니까? 그런 개념을 가지면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려움 당한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르지만 그를 이웃으로 생각한다면 그냥 넘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마라의 사람의 선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주님께서는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며 말씀을 마치십니다.
이 비유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이웃에 대한 폐쇄적이고 편협하고 이기적인 개념을 바꾸어놓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우리가 주변의 어려운 일을 당한 모든 사람의 어려움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미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게 할 수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핵심적인 내용은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개념을 바꾸면 끊임없이 섬기고 도울 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에 대한 개념이 유대인처럼 편협하고 이기적이고 조건적이면 도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도와주려고 생각했는데 그 사람은 게을러서 못 도와주겠고 또 어떤 사람은 성질이 못 되서 못 도와주겠고, 이처럼 이래서 못하고 저래서 못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이웃이라는 개념이 왜 중요합니까? 이웃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이라야 어려울 때 돕기도 하고, 이웃이라야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아파트에서도 늘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니까 이웃이라고 생각해서 인사도하고 예의도 지킵니다. 이웃이 아니라면 누가 인사를 합니까? 이웃이란 나의 관심과 애정이 머물러야 할 대상입니다. 그래서 이웃이라는 개념이 세계적이면 세계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이웃이라는 개념이 없으면 자폐증환자처럼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시기에 유대인의 문제점은 이웃의 개념이 너무 폐쇄적이고 율법적이기에 사랑과 섬김의 대상이 되지 않고 정죄와 판단의 대상이 된 것이라고 보신 것입니다. 누가 문제를 만났을 때 그를 이웃으로 보면 잘못된 것도 덮을 수 있고 문제된 것도 이해할 수 있지만 유대인들은 이웃에 대한 개념이 좁으니까 누가문제를 만나면 바로 심판합니다. 정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이웃 개념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유대인처럼 폐쇄적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50년 동안 예수를 믿었다 할지라도 누구도 섬기지 못합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웃에 대한 개념이 넓어질 때 우리의 삶에 아름다운 향기가 나타날 것입니다. 이웃에 대한 개념이 넓은 사람이 큰일을 하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에 일등으로 들어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큰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최고의 대학에 일등으로 들어갔을지라도 오직 나와 내 가족만 안다면 그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러나 조금 부족해도 이웃에 대한 개념이 넓은 사람은 아프리카의 오지에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삶은 넓은 삶이 되고 세계적인 삶이 되리라고 믿습니다.
제가 인도를 방문하며 3번 정도 예수님의 제자였던 도마의 무덤이 있는 성지를 보았습니다. 가톨릭에는 세계에 3대 대성당이 있는데 대성당의 조건은 주님 제자의 무덤이 있어야 된다고 합니다. 인도 첸나이에는 주님 제자 도마의 무덤이 있는 곳이라 그곳이 대성당이 되었습니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세계 3대 대성당은 로마의 베드로 성당과 스페인의 산티아고 성당 그리고 인도의 산토메 성당입니다.
도마가 인도에 와서 순교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인도까지는 얼마나 먼 거리입니까? 그때 당시 생각에는 거기가 땅 끝이라고 생각해서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듭니다. 왜 도마는 자기가 사는 주변에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는가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그의 친족조차 구원하지 못했을 그는 왜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했느냐는 것입니다. 평생 자기 주변의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도 다 전하지 못할 텐데 땅 끝이라는 인도까지 와서 복음을 전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여행광일까요? 아니면 시간이 많아서 그곳까지 왔을까요? 무엇 때문에 도마가 인도까지 왔겠습니까? 그에게 성령께서 임하시므로 복음을 전해야할 강도 만난 이웃을 주변으로 한정하지 않았고 땅 끝까지라고 생각했기에 인도까지 온 것입니다. 이웃의 대상을 자기 주변, 자기 마을, 자기 동족에서 땅 끝까지로 성령께서 확장시켜 주셨기에 인도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가 유대인과 같은 마인드를 가졌다면 우리 가족도 다 구원하지 못했는데 누구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느냐고 할 것입니다. 요즘도 간혹 이런 말을 하는 분이 있습니다. 아니 우리가 사는 동네에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국내에도 섬과 오지에도 교회가 열악하거나 없는데 뭣 때문에 아프리카니 인도니 하면서 선교한다고 하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이런 사람은 이웃을 주변과 동족으로만 생각하는 유대인적인 생각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웃에 대한 개념이 중요한 것입니다.
나와 내 가족만 생각한다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면 뭐합니까? 아무리 돈을 많이 벌면 뭐합니까? 내 영향력은 너무도 좁은 것입니다. 이웃의 개념을 넓혀보십시오. 그러면 할 일이 많고 섬겨야할 대상이 많습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영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의 개념이 넓어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만약 시카고 남부에 글도 못 읽는 아이가 있다면, 비록 내 아이가 아닐지라도 나는 그 아이를 보호할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믿음이고 세상을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연설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나와 상관없는 어려운 사람조차 이웃이라고 생각하며 관심을 쏟을 수 있는 것이 미국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사실 미국이란 나라는 세계의 문제를 시시콜콜 간섭합니다. 속된 말처럼 들리지만 속된 말이 아닌 말인 오지랖이 넓다는 말이 있습니다. 오지랖이 넓다는 말은 제 일은 놔두고 남의 일까지 참견한다는 나쁜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좋은 의미로는 주변의 여러 일들을 돌봐 주는 사람을 오지랖이 넓다고 표현합니다. 긍정적인 의미로 미국이 여기에 딱 맞습니다. 자기 나라 문제만 생각해도 복잡할 텐데 남의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엄청난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세계의 경찰국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미국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수만의 희생을 당하며 전쟁을 치룬 것을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미친 짓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미국이 그렇게 하는 것은 모두 다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치적인 목적이 있다할지라도 자국국민의 수많은 목숨을 희생하면서까지 그렇게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들은 이웃이라는 개념이 우리 민족과 다릅니다. 중국과 다릅니다. 미국은 내 나라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 세계에 문제가 있고 어려움이 있는 국가에 대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국가입니다. 우리 민족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민족은 그렇게 하라 해도 못합니다. 우리나라 GNP가 10만 불이 되어도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나라 청년 10명만 남의 나라 전쟁에 죽어보십시오. 당장에 대통령 하야시킵니다. 우리 민족은 남을 위해서는 못하는 민족입니다. 우리도 이웃에 대한 개념을 넓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가 선교에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2020년까지 100개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포했습니다. 혹자는 왜 우리가 인도의 가난한 교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웃에 대한 개념을 내 교회, 내 지역, 내 나라에 한정지을 수 없기 때문에 해외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특별히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웃이라는 개념의 폐쇄성에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가지고 있던 이웃의 개념이 넓었을 뿐입니다. 유대인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서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구원받는 도리를 깨달은 민족입니다. 하나님은 이 도리를 이방에 알리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방인을 개나 창기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비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폐쇄적인 선민사상에 사로잡혔고, 그들에게 이웃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이웃에 대한 개념을 넓혀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슈바이처 박사가 스물한 살 되던 어느 봄날, 아침에 잠에서 깬 그에게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나는 이런 행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 된다. 이 행복의 대가로 이 세상에 무엇인가 주어야 한다.’ 누구도 그에게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는 이 결심대로 서른 살 전에 뛰어난 신학자, 철학자, 그리고 음악가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스물아홉에 아프리카에 의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7년간의 준비 끝에 의사가 되어 남은 생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는 195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이런 삶을 산 것은 그의 이웃의 개념이 세계에 있는 모든 어려운 사람들로 넓혀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목사님이 한 분 있습니다. 조현삼 목사님이십니다. 조 목사님은 세계 어느 곳이든 재난을 만나면 무조건 달려가서 돕습니다. 누가 요청하지도 않지만 달려갑니다. 국외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큰 재난을 당한 곳이 있으면 그는 어김없이 나타나서 섬김의 자리에 있습니다. 중국에서 지진 난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러나 거룩한 부담감 때문에 그곳까지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에게 이웃이라는 개념이 넓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이웃 개념은 어떠하십니까? 혹시 나와 나의 가족 안에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우리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제사장, 레위인은 특별한 어느 누구가 아닙니다. 이웃에 대한 폐쇄적인 개념을 가진 자입니다. 이웃에 대한 개념을 넓히기를 바랍니다.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지만 갈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기를 바랍니다.
예수를 오래 믿었느냐 그렇지 않느냐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웃에 대한 개념이 어떠한가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성령님 내 마음의 그릇을 넓혀주시옵소서. 나의 이웃의 개념을 넓혀주시옵소서. 모두를 다 도울 수는 없지만 그들을 향한 마음을 갖게 해 주시옵소서.’ 사마리아인처럼 누군가를 위해서 사랑을 베풀고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으로 하나님께 잘했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삶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누가복음 10:25~37 10장 25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35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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