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기도하라Ⅱ(눅(11:5-13)
지난 주간에는 매년 진행되는 목회자 하계수련회가 태백에서 있었습니다. 기도와 성령 충만에 관한 주제를 통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돌아와 목요일 저녁 8시부터 3시간 정도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도하는데 얼마나 성령님께서 회개를 시키시는지요! 첫째, 힘들고 지친 성도들에게 생명의 꼴을 풍성하게 공급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회개가 되었습니다. 둘째, 기도의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셋째, 예수님께서 기도하시고 사역하신 것을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부끄럽고 부족한 종이었다는 것을 회개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이런 결단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하신대로 흉내 내는 목회를 해야 하겠다고 결심을 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신대로 기도해보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벽으로 기도하셨고, 저녁으로 사역을 마치신 후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한 때에는 철야하며 기도하셨고 금식하며 기도하셨습니다. 심지어는 사역을 하시다가도 병자들을 놓아두고 기도하러 가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사역에서 가장 우선 된 것은 기도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역하신대로 사역해보고 싶습니다. 앞으로 목회 사역의 초점을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에 맞추어서 따라가 보려고 합니다. 부족한 목사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함께 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대한 교훈입니다. 기도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기도는 쉽고 행복할 수 있고, 반대로 어렵고 힘들고 지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기도 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있는 것처럼 포근함을 느낍니다.” 그래서 기도가 즐겁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성도는 “기도처럼 중노동이 없습니다. 기도는 기름을 짜내는 것과 같은 힘든 작업입니다. 기도는 생명을 건 줄다리기와 같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기도에 대한 이해 차이가 이렇게 클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해서 왜 이처럼 시각차가 큰 것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기도가 고역이라고 생각한다면 기도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가 쉽고 편안하고 즐겁다고 생각한다면 기도는 계속 이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에겐 자녀들이 있습니다. 부모 앞에서 자녀들은 어떤 존재입니까? 이처럼 뻔뻔스러운 존재들이 없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위해 해 준 것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그들은 부모에게 요구가 많습니다. 무엇을 달라고 할 때에도 너무도 뻔뻔스럽게 요구합니다. 당연한 듯이 요구합니다. ‘돈 달라. 무얼 사 달라. 가고 싶은 곳에 보내 달라. 이렇게 해 달라. 저렇게 해 달라.’ 심지어는 숙제까지 해 달라고 합니다. 어렸을 때만이 아니라 나이를 들어서까지도 도와주기를 바라는 경우도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부모와 자녀라는 돈독한 관계 때문에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하나님은 아버지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이기 때문에 뻔뻔스러울 정도로 기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 뻔뻔하지만 뻔뻔하지 않는 기도
오늘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친구가 밤중에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떡 세 덩이를 꾸어달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친구가 왔는데 그 친구에게 줄 떡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잠을 자고 있는 친구의 집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는 자기의 친구도 아니고 친구의 친구 먹을거리로 인해서 떡을 달라는 요구를 받은 것입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친구가 먹을 것이 없다는 것도 아니고 친구의 친구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는 것이기에 일단 거절을 합니다. 7절을 보면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가 없노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친구는 간청합니다. 그러자 8절에는 “비록 벗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친구에게 떡을 달라고 간청한다는 것은 ‘아나이데이아’(άναίδεια)라는 헬라어인데 ‘부끄러움이 없고 뻔뻔스러운’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내용이 그렇습니다. 자기 먹을 것도 아니고 자기 친구의 먹을 것을 위해 잠자리에 든 친구를 깨우는 이 사람이야 말로 뻔뻔한 사람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기도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자녀 된 성도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뻔뻔스럽게 요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입니까? 당당히 하나님께 요구할 만큼 완벽한 존재입니까? 헌신과 충성을 다 했습니까? 하나님 앞에 내 놓을 만큼 잘한 것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시며 피를 흘려 우리를 구원하셨건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서 별로 헌신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은 둘째 치고 오히려 죄를 짓고 부끄럽고 죄송한 일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하나님께 요구사항이 많습니다. 무얼 맡겨 놓은 것처럼 ‘이것도 해 주세요. 저것도 해 주세요.’하고 요구합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기도는 뻔뻔스러운 것이다.”
만약 우리가 기도할 만한 어떤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에 기도한다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모두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기도는 사실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물론 기도에 더 깊이 들어가서 어떻게 기도 할 것인가를 생각한다면 주기도문의 교훈을 따라서 기도하면 좋을 줄로 생각됩니다. 그러나 기도를 시작함에 있어서는 내 체면 생각하고 내가 한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뻔뻔스럽고 하나님 앞에 염치도 없고 부끄러운 것이 많지만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나님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있는 모든 문제들을 주님 앞에 나가서 내려놓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어떤 때에는 육신의 문제, 물질의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으려고 나아갔다가도 사실 그 문제만을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그 외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내려놓게 됩니다. 주님께 기도로 나아가는 것처럼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무릎 꿇고 문제를 아뢰다가 죄를 고백하기도하고, 주님 사랑한다고 고백하기도하고, 주를 위해서 헌신하겠다고 결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새벽으로 저녁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서 모든 것을 내려놓는 복된 성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제 말씀을 준비하는데 이 찬양이 입에서 맴돌았습니다.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모든 짐 내려놓고
주 십자가 사랑을 믿어 죄 사람을 너 받으라
주 예수께 조용히 나가 네 마음을 쏟아노라
늘 은밀히 계시는 주님 큰 은혜를 베푸시리.
우리의 모든 문제를 주님 앞에 내려놓으면 은밀히 보시는 주님께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늘 5분 안에 끝나는 기도는 기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를 안 하는 분들은 짧은 기도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지면 5분 기도는 넘어서야 됩니다. 최소한 30분을 넘기는 기도를 해야 됩니다. 또 30분의 벽을 넘어서 1시간 이상 기도할 수 있는 깊은 기도로 들어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1시간은 기도해야 하나님 앞에 감사를 고백하고, 사랑을 고백하고, 마음을 통하여 내가 주님 안으로 들어가고 주님이 내 안으로 들어오는 교통이 있고 그 다음에 쏟아놓는 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의 상태를 점검해 보고 기도가 발전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날마다 기도응답이 있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을 경험하는 역사가 있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어떻게 기도를 계속할 수 있을까?
9절로 10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린다는 것은 기도를 삼중으로 강조하는 강조 어법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기도란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원하는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은 한번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응답될 때까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계속적 용법입니다.
즉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기도는 지속해야 한다.” 한번 구하고 주시지 않는다고 포기한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계속 두드리면 열어줄 줄로 믿고 두드리는 것이 기도인줄로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에 낙심하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성숙한 믿음도 필요합니다. 기도를 계속할 수 있는 것이 기도의 비밀이며 능력이며 축복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도를 계속할 수 있다면 기도 쉬는 죄를 범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더 깊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의 삶, 풍성한 삶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도를 계속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 왜 기도를 지속하지 못할까요? 첫째 이유는 기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받아내지 못하면 기도를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기도는 무엇인가를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청이라고 해서 일방적으로 무엇을 얻어내는 것으로 이해하면 기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아내가 남편이 들오면 부탁해야 할 목록을 빼곡히 적어놓고 남편이 들어오자마자 “여보! 첫째, 시장에서 물건 좀 사다 주세요. 둘째, 문을 고쳐주세요. 셋째, 변기가 고장 났으니 고쳐주세요. 넷째, 형광등 갈아주세요.” 라고 줄줄이 요청한다면 이것은 요청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 남편은 집을 나가버릴 것입니다. 기도를 이런 것으로 생각해서 하나님께 수십 수백 가지 목록을 나열하는 것으로 기도의 의미를 한정한다면 기도는 지속될 수 없습니다. 기도는 필요를 요청하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대화입니다. 관계가 이루어지고 대화 속에서 요청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따라해 보실까요. “기도는 관계다.”
둘째이유는 기도를 듣는 이 없는 독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듣는 이 없는 나 혼자만의 독백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계신 하나님, 풍요한 하나님을 누리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인내가 필요하고 노력이 필요한 줄로 믿습니다. 끊임없이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면 성령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기도도 그런 기도이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0절 말씀입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또 요한계시록 3장 20절에는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며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아버지를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누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의 누림이 있을 때 기도는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이해가 안 되시는 분은 기도의 깊은 은혜를 경험하지 못한 분입니다. 이것을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계속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3. 성령이 일하심을 봅니다.
기도의 결과는 성령께서 나타나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내가 나타나지만 기도하면 성령께서 나타나십니다. 11절로 13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뻔뻔스럽고 염치가 없어도 끊임없이 하나님을 찾아 우리의 마음을 쏟아 놓고 기도하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고의 선물로 성령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성령을 주신다는 것은 성령을 나의 소유물로 삼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기도할 때 임하셔서 깨달을 것을 깨닫도록 하시고, 가르칠 것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갈 길을 인도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비전을 발견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나타나시어 우리가 간구한 모든 것을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해결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성도가 손해를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하나님, 손해나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손해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손해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했는데 손해가 났으니 내 기도가 응답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역사하신 것이면 그것이 답인 줄로 믿습니다. 때론 그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여러 번 그런 경험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추진하다가 물질적인 손해를 입습니다. 분명 기도하고 일을 추진하는데 추진하고자 하는 계획이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에 상처를 입기도 합니다. ‘하나님 왜 그렇습니까?’ 하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두 달 사이에는 그것이 답으로 보이지 않지만 1년, 2년 쯤 지나면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응답하셨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꼭 좋은 것이 아닙니다.
생선을 달라하면 꼭 생선만 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 좋은 것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물질손해 안 되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했는데 천만 원 손해 보았다면 그것을 통해서 나중에 수십억 손해 볼 것을 미리 막아 주신 것입니다. 성령님이 일하시는 것, 성령님이 임하시고 나타나시는 것,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낙심치 않고 쉬지 않고 기도할 때 주시는 응답인줄로 믿습니다.
저도 목회하면서 사람들에게 이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하고 싶은 경우들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전화를 들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내려놓을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때는 사정하고 싶고, 붙잡고 싶고, 도와달라고 하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 오히려 기도하고자 합니다. 그러면 성령님께서 나타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든 원치 않는 방향으로든 해결하십니다. 처음에는 실망되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나중에 보면 모든 일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것을 봅니다. 사람이 하면 좋은 것 같아도 결과가 좋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나타나시면 당장은 좋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는 정말로 좋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속상하고 억울한 일이 있습니까? 힘든 일이 있습니까? 문제가 있습니까? 이사람 붙잡고 이말 저말 하지 마시고 하나님께 조용히 마음을 쏟아 놓기를 바랍니다. 은밀히 보시는 주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실 줄 믿습니다. 성령으로 임하셔서 가장 좋은 방법으로 해결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응답을 풍성히 누리는 믿음의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누가복음 11:5~13 11장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6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저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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